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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든 풀씨의 반세기 서울문화 만보(漫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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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형국
Issue Date
2007
Publisher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Citation
환경논총, Vol.45, pp. 1-9
Abstract
|. 서울을 제 2고향이라 하면 어폐가 있다 4. 19가 나던 1960년에 내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 정들면 고향이라 했는데, 미운 정 고운정 들기가 약 반세기를 헤아리는 세월에서 서울을 겨우 ‘제 2고향’이라 부르면, 본의 아니게 이 도시와 거리를 두는 어폐(語弊)가 될 것이다. 그 사이 서울의 외형 변모만 따지만 우선 인구가 5배로 불었다. 그리고 상경 기차 길에서 영등포 다음 한강을 건너야 서울인줄 알았던 도시구역은,1970년대까지만 해도 땅 이름을 제대로 작명하지 않은 채 “영등포 동쪽”이라며 ‘영동(永東)’이라 어정쩡하게 불렀던, 지금의 ‘강남(江南)’ 땅까지 껴안는 거대 시가지가 되었다. 도시외관이 “뽕밭이 푸른 바다로 변모”하는 사이에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문화도 혁명적으로 변모한 것은 당연했다. 내가 서울문화에 포섭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이에 희비(喜悲)교차의 곡절이 많았다. 압축 고도성장의 주역은 서구 산업혁명의 전철을 밟으려 했던 1960년대 초, 발전도상국 한국의 산업화정책이었다. 성공의 여파로 산업주의의 각종 발상법이 우리사회에 전방위로 확산한다. 대량생산과 대형건설의 미덕이 우리사회의 성취를 재는 잣대가 된다. 제철공장의 일관 작업이 대량생간의 성소(聖所)로 떠받들어져 산업관광의 필수 코스가 되었고, 밤을 지세며 박차를 가하던 고속도로 공사가 대형건설의 전시장이 되었다. 한 시대를 압도했기에 산업주의는 그 시대의 사고방식이자 행동방식이던, 바로 우리 문화였다. 세계에서 가장 신도가 많은 교회의 탕생도 그 시절이었다. 대량 대형주으는 ‘빨리빨리’의 속도문화이기도 했다.덕분에 나라경제가 초고속 압축성장을 이룩하지만 부작용이 뒤 따른 것은 필지의 일이었다. 1990년대 중반, 삼풍아파트 성수대교 붕괴같은 참사는 차치하고라도 한국사람의 인성이 일반적으로 거칠어졌고, 부패를 포함해서 법질서에 자못 둔감하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ISSN
2288-4459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90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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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Graduate School of Environmental Studies (환경대학원)Journal of Environmental Studies (환경논총)환경논총 Volume 4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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