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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渤海의 對唐藩鎭交涉 硏究 : 新羅·渤海の対唐藩鎮交涉に関する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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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고미야히데타카

Advisor
노태돈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4-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견당사외교무역조공·책봉관계번진체제문사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4. 2. 노태돈.
Abstract
신라·발해의 대당번진교섭이 이루어진 9세기는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당 중심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過渡期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발해의 대당번진교섭은 한국고대 대외관계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8세기에 신라·발해가 번진과 접촉하게 된 계기는 번진체제의 성립에 있었다. 710년부터 당 변경에 10절도사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당과의 친선외교를 원하던 성덕왕에게 유리한 전개였고, 발해의 입장에서도 안정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한편 10절도사의 설치는 당과 다른 왕조와의 대립을 야기하였으므로, 신라·발해가 국제분쟁에 휘말리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 설치되었던 절도사는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당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신라·발해의 대당번진교섭이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다만 위구르, 토번, 그리고 남조와 당 변경번진 사이의 교섭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 변경번진은 이들 세 왕조의 침략을 對備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변경번진과 쉽게 교섭할 수는 없었다.
신라·발해는 안사의 난 때 번진과 접촉한 바 있었지만 안사의 난 이후에도 친당적 자세를 유지하였으므로, 기본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번진과는 교섭하지 않았다. 신라·발해와 번진과의 교섭 형성에 바탕이 된 것은 번진체제의 확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은 번진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변경에서 입당사신을 접대하는 주체를 州縣에서 번진으로 변화시켰으므로, 입당사신이 모두 번진을 경유하게 되면서 왕조-번진 교섭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안사의 난 이후 신라·발해의 대당교섭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신라·발해 측에서는 왕위교체를 둘러싼 국내 문제, 당 측에서는 황제 옹립에 대한 환관 세력의 개입 문제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왕위교체를 둘러싼 세 나라 내정의 불안정한 정세는 조공·책봉관계의 이완을 야기하는 동시에 신라·발해와 번진의 교섭이 성립하게 되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신라·발해가 번진과 상시적으로 교섭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신라·발해와 당의 내정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발해는 선왕대 요동으로 세력을 팽창하여 번진과 지리적으로 가까워지면서 교섭하게 되었다. 신라의 경우, 반측 번진이 신라인들을 노비로 掠賣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산동반도를 피하고 다른 번진을 통과하여 대당교섭을 전개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신라·발해와 번진의 교섭은 당이 내란을 일으킨 번진을 토벌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9세기 중반 이후 신라·발해가 전개한 대번진교섭의 양상은 물적 측면과 인적 측면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물적 교류는 신라·발해 조정과 번진 사이에 상대방의 선호도를 중시하는 무역의 형태로 나타났다. 신라·발해는 노비, 매, 도검, 금은과 같은 번진의 무인정권에 맞는 물품을 보내고, 번진에서는 瑟瑟과 같은 동남아시아산 물품이나 絲織物이라는 당시 신라·발해가 필요한 물품을 받았다. 신라는 淮南·浙江 지역의 번진과 교섭하였는데 그 까닭은 회남·절강 지역과 신라상인들의 사치품 교섭을 신라조정이 통제하여 원활하게 무역을 추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발해는 내정 관제가 확충됨에 따라 직물 수요가 높아졌으므로 직물을 구하기 위해 盧龍藩鎭과 교섭했다. 한편 당에서는 절도사가 출세를 위해 당 환관에게 진기한 물품을 보내는 藩鎭進奉이 유행하였다. 번진은 진봉물을 구하기 위해 신라·발해로 물품을 구하려고 하였다. 왕조-번진 교섭은 신라·발해가 상대방이 원하는 물품을 고려하여 보냈음을 의미하므로, 왕조간 교섭에서 이루어진 자기 땅에서 나는 물품을 보내는 토공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신라·발해와 번진 사이에는 인적 교류도 있었다. 884년 신라는 빈공급제자 崔致遠의 귀국을 요청하기 위해 淮南藩鎭 고병에게 入淮南使 金仁圭를 보냈고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최치원 귀국의 배경에는 瑞書院, 崇文臺 등의 文翰기구를 설치하고 그곳에 빈공급제자를 적극적으로 채용하려 했던 憲康王代의 정책이 있었다. 왕조-번진 교섭에는 신라 조정의 의도가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발해의 경우에도 하수겸이라는 문사가 노룡번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므로 문사의 왕래는 왕조-번진 교섭의 특징이었다. 이들 문사가 禮에 입각하여 왕조-번진 교섭에 임하였기 때문에, 禮的 질서가 왕조-번진 교섭에서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다만 그 禮에는 토공을 의식한 물품의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상하관계의 체현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朝貢과는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9세기 신라·발해와 번진의 교섭에서 신라는 순지 번진과 교섭하고 발해는 반측 번진과 교섭하는 구도가 갖추어졌는데, 이러한 교섭 대상의 성격 차이는 10세기 신라·발해와 오대십국 간의 교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노룡번진이 大燕이라는 왕조로의 변화를 꾀하자 발해는 국제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이후 大燕의 멸망은 발해의 對거란정책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이에 반해 신라의 대번진 교섭은 무역과 유학생의 왕래라는 9세기의 특징을 유지하며 10세기 이후 對五代十國外交로 변화하였다. 10세기에 접어들어 신라 왕조를 대신하여 제해권을 장악한 王建이나 甄萱과 같은 호족세력들은 유학생을 채용하여 왕조화된 번진과 교섭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빈공급제자를 발탁하여 외교문서의 작성이나 사신의 접대를 담당하게 하고, 이들 문사를 직접 외교사신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호족세력이 文士를 채용하여 외국에 사신으로 보내는 현상은 이후 세력이 약한 호족이나 해상상인집단에게서도 확인된다. 그들은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신라를 표방하면서 교섭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10세기 이후 상인이 왕조의 사신을 자칭하며 조공하는 상인의 조공의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호족들의 대외정책으로 文士들의 왕래는 후삼국의 혼란기에도 끊어지지 않았으며, 이들은 고려 통일 이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문사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까닭은 복잡한 국제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외교 실무를 담당할 인재로서 문사가 중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문사가 국제관계의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0세기에 신라·발해가 다른 結末을 맞이한 까닭은 발해와 교섭한 번진이 반측 번진으로서 중원쟁탈전에 참가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라·발해의 대당번진교섭은 10세기 이후 고려-오대십국 외교로 나타난 다원적 조공·책봉 관계를 형성하는 架橋로 기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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