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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공업고등학교의 설립과 엘리트 기능 인력의 활용, 1973-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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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임소정

Advisor
최형섭
Major
자연과학대학 협동과정 과학사및과학철학전공
Issue Date
2015-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금오공업고등학교중화학공업화 선언과학기술인력 정책엘리트 기능 인력공업교육 개편군 기술하사관 양성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협동과정 과학사및과학철학전공, 2015. 2. 최형섭.
Abstract
동양 최고의 공업고등학교라는 수식어와 함께 1973년에 설립된 금오공업고등학교는 당대 최고의 기능 인력 양성기관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국내외에서 파견된 최고의 기술교사 아래에서 최첨단 실습 장비들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 혹은 장차 한국의 공업을 짊어지고 나갈 공업 역군, 산업 전사 라고 일컬어졌던 금오공고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중견급 이상의 기능을 갖춘 기능 엘리트로 활약할 것으로 기대와 주목을 받았고, 각종 기능대회의 석권, 국제기능대회에서의 우수한 성적 등이 그 명성을 입증해 보이는 듯 했다. 금오공고생들이 본격적으로 출전하기 시작한 1977년 국제올림픽에서 한국은 첫 종합우승을 차지했고, 이들의 선전은 곧 중화학공업화의 성공과 첨단산업 국가로의 진입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고의 기능 교육 기관이었던 금오공고가 군 기술하사관 양성학교였으며, 따라서 금오공고생들이 졸업 직후에 산업 현장이 아닌 군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이는 거의 없다. 금오공고는 개교를 불과 몇 달 앞둔 1972년 말에 군 기술하사관 양성학교로 긴급히 전환되었으며, 이후 금오공고의 운영 전반에는 군에서 활용할 우수한 기능 인력을 양성하고자 했던 정부의 의도가 적극 반영되었다.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운 우수한 학생들이 무시험 전형에 의해 선발되었고, 이들은 3년 동안 강도 높은 기술훈련과 군사교육을 함께 받았다. 특히 군에서는 금오공고생들이 졸업 후에 예비역 훈련을 받지 않고 곧바로 기술하사관으로 투입될 수 있도록 예비역 하사관 훈련에 의거한 기초적인 군사교육을 재학 중에 별도로 실시하였다. 1975년 금오공고 1기생이 졸업하기 직전에 군 의무복무 조항이 삽입되었고, 금오공고생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졸업과 동시에 군 기술하사관으로 임용되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중견 기능 인력에 대한 수요가 가장 치열했던 1970년대 말까지 금오공고생들은 산업계에 기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것이다.
상공부와 군에서 각각 금오공고 출신 기능 엘리트에게 요구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본 연구에 따르면 상공부와 군 사이에서 금오공고의 전환과 운영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의 추진 배경 및 과정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안보 불안과 경제 위기라는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박정희 정부가 타개책으로서 선택한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에는 자주 국방과 경제 발전이라는 두 가지 논리가 혼재해 있었다. 특히 중화학공업화의 출발 단계에서는 방위산업의 육성이 일차적인 목표였으며 민간 중심의 병기생산 체제에서 군은 무기 국산화와 병기 생산의 최종적인 단계를 맡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금오공고는 바로 이러한 최종적인 역할을 수행해야할 우수한 기술 인력을 군에 공급할 목적으로 긴급히 전환된 것이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민간 산업을 추동한 것은 국방 논리가 아닌 경제 논리였고 중화학공업화와 방위산업에서 군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게다가 군에서는 금오공고 졸업생들을 일반 기술하사관으로 임용하며 그들의 역할을 단순 기능공으로 제한시켰다.
반면 금오공고 설립을 추진하던 당시에 상공부가 금오공고에 요구했던 역할은 두 가지로 기술교육의 이상적인 표본이자 중화학공업화에 요구되는 숙련 기능공의 실질적인 양성기관이었다. 이는 당시 금오공고생들의 기대와도 일치하는 것이었으며, 전환 이후에도 금오공고가 기술 교육에 있어서만은 상공부의 구상을 따르며 기술교육의 표본으로서 여전히 기능하였다. 그러나 금오공고의 전환과 동시에 상공부의 두 번째 목적은 군에서의 활용 이후의 이차적인 문제가 되었고, 졸업생들은 일차적으로는 일반 기술하사관으로서 5년간 복무해야 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금오공고 졸업생들은 자신들의 기능 수준과 기대에 부합하는 역할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상당수가 전역 후 다른 진로를 선택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군과 산업 현장 모두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본 연구에서는 이와 같이 금오공고 사례를 재조명함으로써 엘리트 기능 인력이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에서 부여받았던 역할과 기대를 살펴본다. 자주 국방과 경제 발전이라는 두 논리 사이에 접해있는 금오공고 사례를 통해 과학기술 인력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기대가 시대적, 사회적 요구에 따라 어떻게 다양하게 형상화되는지를 볼 수 있다. 동시에 인력 정책에 대한 정책적 시사점을 제공함은 물론이고 장기적인 비전을 향해 일관되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다고 믿어져 왔던 박정희 시대의 과학기술 정책의 또 다른 단면을 볼 수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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