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幕末의 정치적 변동과 幕府目付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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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황수경

Advisor
박훈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4-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幕末期幕府目付페리 내항學問吟味적극적 개국론다이묘와의 협조慶應改革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4. 2. 박훈.
Abstract
본고는 幕末期 幕府 目付의 정치적 활동에 주목하고 이에 그들이 정치적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 글이다. 막말기는 이후 메이지 시대를 견인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기에 이 시기 막부 役人의 활동을 고찰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 중 目付는 막부에서도 출세 시작 단계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을 뿐 아니라 目付는 감찰기관으로 상당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 目付에 등용되는 役人 또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현직 目付가 후임 目付를 투표로 임명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目付 役人이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目付는 감찰 외에도 여러 일들을 맡았는데 그 중에 외교가 있었다. 그래서 막말에 目付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이런 目付에 대해 기존 연구는 目付의 정치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본고는 정치적 성장의 배경 및 해당기 目付 활동의 경향성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페리 내항 이후 대외적 위기가 증대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외교를 담당하면서 정치적 발언력이 높아졌다. 이들만이 외교를 담당한 것이 아니라 다른 役人들도 함께 외교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目付는 大目付와 함께 일본을 적극적으로 개국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열강들과 조약을 맺어 무역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화적인 해외진출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직접적으로 외국인들을 응접하여 그들의 실력을 알았기 때문이며 이 당시 目付로 새로이 등용된 인물들 중 學問吟味라는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있어 이들의 영향력이 미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學問吟味가 실시되었던 昌平坂學問所에서는 이와 관련된 세계관을 주장한 儒者가 있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덧붙이자면 學問吟味 급제자들의 目付 진출은 페리 내항을 계기로 두드러졌다. 이는 외교 업무를 맡아야 하는 目付 役職의 중요성 때문에 유교적 교양을 지니고 있던 인재들을 目付로 등용한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전체 비율로 따지면 대략 20%여서 10명의 目付 중 2명이 學問吟味 급제자 출신이라고 볼 수 있다. 學問吟味 급제자 출신의 目付 役人들은 뛰어난 문장력을 바탕으로 보고서 작성 및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했던 부분들에서 충분히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였을 것이다. 더불어 이들은 目付 役職의 특성인 후임 선정 방식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아무튼 大目付와 目付의 이러한 발상을 당시 老中가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미일통상조약 조인을 둘러싸고 일본 내부에 반발이 있었다. 결국 당시 老中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고 적극적인 개국론을 주장하였던 目付도 정치적 발언력이 약해졌다. 이는 보수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던 大老 井伊直弼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文久期가 되자 막부는 松平慶永, 一橋慶喜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원래 막부 정치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이때에 막부 정치에 참여하여 여러 개혁을 수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막부 役人들 중에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시기 이들을 정치적으로 지지한 세력은 目付를 역임하고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大久保忠寬와 大目付, 目付였다. 安政 5년(1858)의 쇼군 후계자 선정 논란 시에 당시 目付는 越前 藩主 松平慶永에게 협조한 전사가 있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目付가 동일인은 아니지만 이런 전사가 있었기에 협조 노선이 쉽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目付는 松平慶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사안에 따라서는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攘夷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이 일어났다.
慶應期에 막부는 幕政改革을 통해 막부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 慶應改革을 추진하였던 사람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대체로 大目付, 目付를 역임했거나 현임 目付였다. 이렇게 目付는 여전히 막부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쇼군 慶喜는 자신의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目付에 자신의 오랜 측근을 등용하였는데 이를 통해서도 目付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얼마 후 막부는 없어지게 되지만 目付를 역임한 사람들 중에서는 明治期에서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目付는 막말에 目付 役職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安政改革, 文久改革, 慶應改革 막말 막부 3대 개혁의 중요한 役人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의 정치적 활동을 바탕으로 目付 役人의 경향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대외침략이 아닌 평화를 전제로 한 적극적인 개국론을 지지하였다. 이는 동시기 다른 사람들이 대외침략을 바탕에 둔 해외팽창 혹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열강과 친교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독특한 것이었다.
둘째 사건에 따라 松平慶永를 비롯한 다이묘와 협조하였다. 安政 5년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쇼군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文久 2년(1862)에는 幕政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 松平慶永에게 협조하였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막부를 우선시 하고 막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한 방편이었기에 松平慶永와 이런 점에서 의견 차이가 나면 目付 役人들은 松平慶永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目付 役人은 어디까지나 막부의 役人으로 언제나 막부에 충성하였다. 토막파 세력이 번에 대한 충성에서 이탈하여 일본 전국을 시야에 넣어 번을 단순히 수단화하는 데에까지 나아간 데에 비해 目付 役人에게 막부는 언제나 충성의 대상이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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