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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龍臣筆 崔益鉉 肖像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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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진아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채용신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2017. 2. 장진성.
Abstract
국 문 초 록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은 구한말(舊韓末)과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초상화 전문 화가이다. 그는 50세인 1900년에 역대 선왕의 어진도사(御眞圖寫)에 참여했으며, 190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주로 호남 지역에서 활동하며 부호(富豪), 유림(儒林) 등 다양한 인물의 초상을 남겼다. 특히 1900년대에서 1910년대 전반에 채용신은 항일 의식을 표출하기 위해 항일지사(抗日志士)의 초상을 제작하거나, 자신과 교유 관계에 있는 유학자의 초상을 주로 그렸다고 평가된다. 본고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초상화로 거론되어 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초상의 제작 원인을 채용신 개인 뿐 아니라 당시 유림들의 초상 제작 문화라는 측면에서 다각도로 고찰한 연구이다.
최익현은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문인을 배출하였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년) 계열 유학자이자 만년에 항일 의병 활동에 투신한 우국지사(憂國之士)이다. 채용신은 최익현 초상을 그의 생전과 사후에 반복적으로 제작하였다. 현전(現傳)하는 채용신 필(筆) 최익현 초상만 총 열 점이 확인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채용신 필 최익현 초상의 제작 원인을 채용신의 우국지심(憂國之心) 혹은 교유 관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채용신이 단순한 직업 화가가 아닌 무관직을 역임한 양반 출신의 화가라는 그의 출신 배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채용신의 무관 경력은 『평강채씨대동보(平康蔡氏大同譜)』, 『석강실기(石江實記)』등의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무관복을 입은 자화상, 무과 급제와 수군 훈련 장면을 포함한 평생도(平生圖) 병풍 등의 작품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관련 문헌 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채용신은 그간 알려진 무관직에 임직(任職)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채용신의 항일지사 및 유학자 초상화는 양반 출신이었던 채용신의 창작 의지보다는 그의 초상화에 대한 수요와 주문자 측의 요구라는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현전하는 열 점의 채용신 필 최익현 초상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제작 시기 및 봉안처가 확인된다. 이를 통해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 유림 집단의 초상 제작 및 소비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열 점의 초상은 1905년의 , 1909년 , 1911년의 , 1923년 , 1924년 , 1925년의 , 1925년의 , 그리고 제작 연도 미상의 , , 이다. 채용신은 1905년에 최익현의 후손과 문인들의 요청으로 최익현의 73세 상을 여러 벌 제작한 이래 최익현의 사후에도 약 20여 년 동안 최익현 초상을 이모(移摹)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초상화는 대부분 최익현 사후에 건립된 사우(祠宇)에 봉안되었다.
이러한 사우는 최익현과 관련된 장소에 후손과 문인들이 세우거나, 문인들이 각자 그들의 근거지에 후학 및 향중(鄕中) 유림들과 협력하여 건립하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 최익현 초상과 문인의 초상이 함께 제작되어 봉안된 사례들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그 밖에 최익현을 모신 사우는 화서학파 동학(同學)이나, 경주최씨 문중에서 세운 경우도 발견된다. 이는 스승을 존숭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다양한 맥락에서 최익현 초상이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최익현 초상이 약 20여 년이라는 기간 동안 많은 수가 제작된 것은 사우를 건립하여 선현(先賢)과 선조(先祖)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향사(享祀)했던 유림들의 문화와 관련이 깊다. 최익현 사우의 첩설(疊設)은 유교적 지배 체제가 사라져가던 시대 상황에서도 기존의 문화와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유림들의 사우 건립 문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사우의 배향(配享) 인물 중에는 최익현을 비롯한 한말 항일지사나 유학자가 다수 포함되었다. 이는 채용신의 항일지사 혹은 유학자 초상화가 당시의 배향 인물에 대한 초상화의 수요에 부응한 결과일 가능성도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최익현 초상은 심의(深衣)를 착용한 유복본(儒服本)과 오사모(烏紗帽)에 단령(團領)을 입은 관복본(官服本), 이렇게 두 가지 유형으로 제작되었다. 심의를 착용한 최익현 초상은 그의 생전에 제작되었으며 그의 사후 문인들에 의해 이모되었다. 최익현이 심의를 선택한 것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위시한 노론(老論)계 문사(文士)들에게서 제작되었던 심의본 초상화가 화서학파를 비롯한 당시의 노론계 인물들에게서 다시 유행했던 현상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울러 심의는 19세기 후반의 복제(服制) 개혁을 맞아 고례(古禮)에 따른 전통 복식을 착용함으로써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유림들이 애호했던 의복이다. 최익현의 사후에 이모된 심의본 초상화는 모두 그의 문인들의 거주지에 세워진 사당에 문인들의 심의본 초상화와 함께 봉안됨으로써 학맥의 시각화가 이루어졌다.
현전하는 최익현의 관복본 초상은 모두 그의 사후에 이모된 것이다. 채용신에 의해 초상 모사가 이루어졌던 1905년은 최익현이 관직에서 떠난 지 오래된 시점이었다. 따라서 최익현의 생전에 관복본 초상 제작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의 경우 관직을 떠난 인물들의 관복본 초상 제작 예가 적지 않다. 또한 이모본은 최대한 원본을 충실히 반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1905년에 원본으로서의 관복본 초상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학맥이 강조되었던 사당에 유복본 초상이 봉안되었던 것과 달리 관복본 초상은 주로 후손이나 문중에서 관리하여 문중의 인물이 배향되었던 사당에 봉안되었다.
최익현 초상은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사라져가던 구한말과 일제시기에도 초상화를 제작, 이모하여 사당에 봉안하였던 유림들의 문화 내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본고는 채용신이라는 화가에 초점이 맞추어 심도 있게 연구되지 못했던 최익현 초상의 제작 맥락을 다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한 연구이다. 최익현 초상의 제작, 이모, 봉안 양상에 대한 본 연구는 20세기 초반 유림들의 초상 제작 및 향유 과정을 구체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채용신 필 유림 초상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주요어: 채용신(蔡龍臣), 석강실기(石江實記), 최익현(崔益鉉), 화서학파(華西學派), 이모(移模), 사우(祠宇), 봉안(奉安).
학번: 2008-20097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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