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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건축, 채워진 공간 : 김수근의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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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성효진

Advisor
김영나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Issue Date
2012-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김수근오사카 만국박람회한국관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2012. 8. 김영나.
Abstract
김수근(金壽根, 1931-1986)은 1970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렸던 일본만국박람회(日本萬國博覽會, The 1970 Japan World Exposition)(이하 오사카 만국박람회)에서 한국관의 설계와 전시기획을 맡았다. 한국관은 박람회가 끝나면서 해체되어 사라졌으나 한국관의 설계 및 전시 준비 과정은 김수근이 발행하였던 『공간(空間, Space)』지와 그가 설립하였던 인간환경계획연구소(人間環境計劃硏究所)의 활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박람회 직후인 1971년 김수근이 자신의 공간론, 「궁극공간(Ultimate Space)」을 발표하였으며 그가 설계한 공간사옥 내에 마련한 공간사랑(空間舍廊)을 통해 이를 구현해나갔다는 점은 한국관이 김수근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논의되어야 함을 말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를 김수근 활동의 과도기로 설정하면서 이 시기에 나타났던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한국관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김수근이 1967년 부여박물관 논쟁을 통해 전환점을 맞았으며 그 결과 1971년 궁극공간을 발표하고 공간사옥을 설계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근이 그가 한국관을 설계하였던 1967년 몬트리올 세계박람회(The 1967 International and Universal Exposition)나 1974년 스포캔 세계박람회(The Spokane World Exposition 1974)와 다르게 내부의 전시까지 맡았으며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해두었다는 점은 한국관을 과도기에 나타났던 실험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공간』지, 공간사옥, 공간사랑 등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던 김수근의 활동들은 김수근을 단순한 건축가를 넘어선 문화의 매개자이자 후원자로 자리하게 하였는데 한국관은 이 여정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관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김수근이 보여주었던 치열한 의식과 작업도 보다 넓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김수근은 1967년 몬트리올 세계박람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에 들러서 한국관의 설계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부여박물관 논쟁의 발생, 박람회 참가 측과의 의견 충돌 등으로 한동안 한국관 설계에 참여하지 않았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다시 설계자로 돌아왔던 김수근은 외부에 스테인리스 거울재질의 원기둥 18개를 설치하고 이 원기둥을 이어 프레임을 덮은 내부에 세 동의 건물을 배치하는 현대적인 안을 구상하였다. 또한, 한국관의 전시까지 기획하게 되었던 김수근은 1969년 후반 미래학세미나를 진행하며 한국관 전시의 이념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한국관 설계와 전시를 위한 김수근의 노력에도 한국관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이와 같은 논란이 발생하였던 본질적인 이유는 한국 정부 측과 김수근이 박람회와 한국관 자체를 보는 시각이 확연하게 달랐던 데 있었다. 한국 정부 측은 한국관을 국가적인 프로젝트로만 보았으나 김수근은 한국관을 자신의 예술 작품으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가시적으로 드러났던 논란의 원인은 예산의 문제로 기둥의 색이 은색에서 군청색으로 변경되어 한국관의 외형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데 있었다. 결국 한국 정부가 조사하여 외형 일부분을 수정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나 논란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3월 오사카 만국박람회 개최와 함께 한국관은 성공적인 전시관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는 한국관이 세계적인 예술의 흐름에 조응하면서 한국의 미를 구현하는데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계안의 변경으로 3개가 감소하였던 15개의 기둥은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5)가 지은 하얀 박람회장에서 한국관을 상징하는 하나의 지표였다. 또한 기둥과 지붕 등에서 나타나는 하이테크 건축과 같은 새로운 건축적 요소의 도입은 한국관을 세계 건축의 전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게 하였다. 세계 속에서 한국을 재정립하려는 김수근의 노력은 한국관 내에 전시하였던 조각을 통해서도 이어졌다. 물질성을 나타내는 한국의 현대조각들은 전시관 전체 및 전시와 조화를 이루었다. 나아가 4층에서부터 내려오도록 설계된 관람 동선을 따라 이동하는 관객들은 한국의 고유한 미와 현재, 변화된 미래의 한국과 그 문화예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김수근은 문화유산만을 전시하지 않고 그것이 발생하였던 사회나 생활유산들을 함께 자리하게 함으로 한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촉진하였다. 미래학세미나의 이상을 구현하는 이들은 『공간』지를 통해서 어느 정도 축적을 이룬 내용들이었기에 가능하였다.
한국관으로 공간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의 소통과 통합이 가능함을 확인하였던 김수근은 공간사옥을 통해 이를 지속해갔다. 공간미술관, 공간소극장, 『공간』지로 연결되어 있는 김수근의 활동은 그를 문화의 매개자이자 후원자로 만들었다. 공간미술관에서는 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던 화가와 조각가, 전위미술가들 등 다양한 장르의 전시가 열렸다. 『공간』지에서 주최하였던 공간미술대상이나 판화전, 다른 화랑을 후원하기 위한 전시 등을 하며 김수근은 한국 문화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소극장 역시 잊혀져가는 한국의 전통예술을 공연하게 하고 그들과 함께 한국의 현대예술이 자리하게 함으로 한국의 문화예술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문화예술 강좌들은 김수근의 말처럼 『공간』지와 함께 한국인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자 하였다.
김수근을 한국 시각문화의 형성과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문화예술인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던 김수근의 활동들이 한국의 시각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에 있다. 이를 고려해볼 때, 김수근이 설계와 전시 모두를 맡았던 한국관은 문화예술인 김수근을 이해하는 데 있어 분명히 중요한 지점에 있다. 한국관 설계와 전시, 미래학세미나에서 논의하였던 내용, 이 시기 『공간』지에 수록되었던 기사들이 만들어내는 긴밀함이 한국관에 투영된 김수근의 신념을 증명한다. 또한 한국관을 선보인 다음해 발표하였던 김수근의 공간론과 그 구현물인 공간사옥,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 활동들 역시 그 연장선에 있기에 한국관은 연구될 만한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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