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

<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연구
A Study of Jangyanggong jeongto sijeonbuho do (Lord Jangyang Yi Il's Conquest of the Sijeounbu Jurchens)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
이재호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Issue Date
2013-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북관유적도첩전쟁기록화이일김종서악비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충렬록노론시전부락여진족콜칸 우디거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2013. 8. 장진성.
Abstract
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 1538 -1601)이 1588년 1월 15일에 경흥(慶興) 인근의 여진족 시전부락을 공격한 사건을 후대에 그린 전쟁도이다. 현재 거의 동일한 내용과 형식의 가 육군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및 경기도박물관에 각각 한 점씩 모두 세 점 전하고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 는 군사사(軍事史)의 영역에서 다루어진 바 있으나 세 점의 를 대상으로 한 미술사학적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일의 실기(實記)인 『장양공전서(壯襄公全書)』에는 이일 현양(顯揚)과 관련된 기록이 다수 실려 있다.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참고하지 않았던 『장양공전서』에 실린 관련 기록 등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를 조선후기 정치적 변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1849년의 모사본인 육군박물관 소장본의 발문에 의거해 의 첫 제작자는 이일의 손자인 경상좌수사 이견(李汧, 1616-1668)이며 제작 목적은 조상 현양일 것으로 언급되어왔다. 그러나 육군박물관 소장본의 범본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했다. 현존하는 는 작품 제목에 시호 ‘장양’이 명기되어있으므로 이일의 시호가 연시(延諡)된 1745년 이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기장(鄭夔章, 1684-1754)은 연시 직후에 「정토시전부호전도서(征討時錢部胡戰圖序)」를 썼다. 정기장의 서문은 1745년 3월의 연시 행사에 즈음하여 이견이 주문했던 전쟁도를 바탕으로 가 새로이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현존하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본은 이 때 제작된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본 연구에서는 세 점의 의 세부를 비교 관찰하여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본이 나머지 두 점의 범본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세 점의 작품 세부에 나타난 형태적 유사성 및 차이를 통해 뒷받침된다. 육군박물관 소장본 및 경기도박물관 소장본의 몇몇 특정 이미지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본을 그대로 본뜬 것으로 보이며 모사에 따른 형식화의 경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1745년 이후의 작품인 현존 이전에도 라 불리던 시전부락 소탕 그림이 이일 가문에 존재하고 있었다. 1708년 이담(李橝, 1629-1717)은 이일의 증손인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진방(李震芳, 1643-1724)의 요청으로 이 그림의 서문인 「토멸시전부호전도서(討滅時錢部胡戰圖序)」를 썼다. 는 육군박물관 소장 의 발문에 언급된 이견이 주문한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가 의 직접적인 범본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는 무관 가문 차원에서 주문한 보다 격이 높은 그림으로 새로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 제목에는 시전부락을 공격한 이일의 정통성과 명분을 ‘토멸’보다 격이 높은 ‘정토’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는 의 제작에 이일의 후손들 뿐 아니라 18세기 전반의 노론 고위 관료들까지 관련되어있었다는 정황과도 연결된다.
노론은 1700년대 초에서 1740년대에 걸쳐 이일의 현양을 주도한 정치세력이었다. 이일의 행장(行狀), 신도비명(神道碑銘), 시장(諡狀) 등을 쓴 이담, 이재(李縡, 1678-1746), 안윤행(安允行, 1692-?), 이의현(李宜顯, 1669-1745) 등은 18세기 전반 노론의 핵심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상주전투 패전 등의 결과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온 이일을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 재평가하는 한편 그의 업적을 현양하고자 하였다. 이들에 의해 이일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할 때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증보(增補)한 업적이 특히 강조되었다. 『제승방략』은 김종서가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저술한 방어 지침이다. 조선후기에 이일이 증보한 『제승방략』을 처음 재간행한 인물은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재직한 이선(李選, 1632-1692)이었다. 이선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인으로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후 김종서의 신원(伸寃)을 처음 요청한 인물이다. 노론은 김종서 복권의 연장선에서 『제승방략』을 증보한 이일을 함께 현양하려 했으며 1745년 이일의 시호 연시, 1746년 김종서의 복권으로 이를 완수하였다.
는 이담이 쓴 행장 가운데 시전부락 소탕에 대한 대목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이담이 기술한 출진・행군・전투의 내러티브(narrative)는 화면 속에 연속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에 묘사된 아오지(阿吾地), 백안연대(白顔烟臺), 무이보(撫夷堡) 등의 지리 및 관방시설 또한 행장의 내용과 대응된다. 텍스트에 등장하는 넓은 공간을 조망(眺望)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지도는 1740~50년대의 관찬 군현지도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 및 《해동지도(海東地圖)》 계열의 경흥부 지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가 1745년경 제작되었다면 작품에 최신 관찬 지도의 지형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이일 가문에는 관찬 지도에 접근할 수 있는 관직 경력자가 없었다. 따라서 노론 고위 관료들이 의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시호 연시 행사 때 이의현 등 노론 관료들이 참석해 를 관람하고 시를 남긴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의 이미지에는 18세기 시각 문화의 경향이 잘 반영되어있다. 무이보 봉수대는 화면의 중심에서 전투 장면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이미지로 표현되어있다. 이는 당시 기행문학의 영향으로 무이보 봉수대에서 팔지(八池) 및 조선왕조 창업의 터를 조망하는 풍조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1716년에 무이보 봉수대를 방문한 김창흡(金昌翕, 1653-1722)과 이를 전해 듣고 팔지 등의 경관을 그림으로 그린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1750년경의 《해동지도》에는 시전부락이 팔지 동쪽 산맥 너머에 표시되어있다. 이는 화면 우측 바깥에 해당한다. 의 제작자는 의도적으로 시전부락의 위치를 팔지 가운데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속 시전부락의 위치 변경은 태조(太祖)의 고조모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안릉(安陵)과 증조부 익조(翼祖)가 세거(世居)했던 알동(斡東)을 무이보 봉수대에서 조망했던 당대의 문화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해동지도》에는 우측 산맥에 해당되는 지점에 안릉의 옛 터가 ‘고릉(古陵)’이라 표기되어있다.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경흥 무이보(慶興撫夷堡)」라는 시에서 “왕업의 자취 남은 옛터가 이역(異域)이 되었으니, 동해물 기울여 되놈 누린내 씻고 싶어라”라고 읊었다. 즉 지형 이미지를 통해 에는 ‘창업의 땅을 더럽힌 이민족을 정토한 전투’라는 의미가 담길 수 있었다.
화면 중심에 묘사된 이일의 포로 심문은 어떤 기록에도 전하지 않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핵심 주제 장면으로 표현되었다. 포로 심문 장면은 1585년 조선에서 간행된 악비(岳飛, 1103-1141)의 실기(實記)인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의 삽화에서 비롯된 이미지라고 생각된다. 『정충록』 삽화의 하나인 에는 악비가 적장을 포로로 잡은 모습이 묘사되어있다. 주요 인물의 자세 및 차림새, 기수(旗手) 및 군사들이 주장(主將) 좌우에 늘어선 구성은 와 매우 유사하다. 포로 심문 이미지는 중국 판본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의 삽화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와 유사한 구성은 찾기 힘들다. 『정충록』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가 처음 간행한 후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1709년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1769년에 각각 중간(重刊)했다. 숙종과 영조는 금(金)과의 화친을 거부하고 맞서 싸웠던 악비를 ‘척화(斥和)’ 및 ‘숭명반청(崇明反淸)’의 표상으로 높여 제사를 올렸다. 하단의 행군 장면 또한 『정충록』 삽화의 한 장면인 에서 세부 이미지 및 구도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악비와 이일은 모두 ‘여진족’을 정벌했다는 점에서 등치(等値)될 수 있었다. 이는 숭명반청의 명분을 견지한 18세기 초 노론의 입장과 부합된다. 또한 조상 현양을 통해 가격(家格) 상승을 추구한 무인 가문의 입장에서도 이일이 영웅적 이미지를 통해 악비와 동일시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일이 시전 땅에서 실제로 소탕한 부족은 여진족의 한 분파인 콜칸 우디거(骨看 兀狄哈)의 소부락이었다. 그러나 의 제작자는 이들을 청대 복식으로 등장시켜 의미를 바꾸어놓았다. 즉 이일은 만주족의 청을 정토한 인물로 전화(轉化)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의 제작자는 이미지를 통해 1588년에 이일이 여진족 소부락을 소탕한 사건을 12세기 초 남송과 금의 전쟁, 17세기 초 조선과 청의 전쟁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화(華)와 이(夷)의 대립상황과 등치시켰다. 이는 의 제작목적이 단순히 무관 개인의 현양에 그치지 않고 당대(當代)의 정치적 상황 및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對淸)의식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This study analyzes the context in which Jangyanggong jeongto sijeonbuho do (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Lord Jangyang Yi Il's Conquest of the Sijeounbu Jurchens, was created. Today, three versions of Jangyanggong jeongto sijeonbuho do remain. Each of them is in the Korea Military Museum, Samsung Museum of Art, and Gyeonggi Provincial Museum. The three works use almost identical scale, appearance and composition. The paintings are comprised of the title, the battle scene, and the list of the names of 58 war veterans. It is inferred that the work in the Samsung Museum of Art is the oldest of three, and could be the original model for the other two paintings when one carefully observes the details. It is unclear when the works were painted, except the one in the Korea Military Museum that was copied in 1849.
Yi Il (李鎰, 1538 -1601) was the Commander of Northern Hamgyeong Province, the northeast frontier of Korea, from 1586 to 1588. At the time, there was severe military crisis caused by Nitanggae (尼湯介), the chief of a Jurchen tribal branch, advancing attack of the area in 1583. While the Joseon military troops successfully defended the northeast territory, it came to suffer the shortage of provisions. To solve the problem, the Joseon army had started cultivating a garrison farm at Nokdundo (鹿屯島), a delta of the River Tumen (豆滿江) estuary from 1584. In the autumn of 1587, Sijeonbu (時錢部), a branch of Jurchen tribes–known as a village of Hūrha- which settled at the other side of Tumen River near the town of Gyeongheung (慶興), attacked the Nokdundo farm to plunder the crops and captives. The Joseon army failed to defend. Thus, the farm was abandoned. Yi Sunsin (李舜臣, 1545-1598) who was in charge of the farm stood up against the attack though. After the defeat, Yi Il led the troop of 2,000 organized of provincial army and expeditionary force from Seoul, carried out retaliatory attack on the fifteenth day of the first month in 1588.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mentions that as a result of Yi Il’s military operation to burn Sijeonbu to the ground, about 380 Jurchens had been killed but no Joseon soldiers were killed. Nevertheless, Yi Il’s fame was disgraced and forgotten after the appalling defeat at Sangju, the first grand battle on the plain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During the 1660s, the military officer Yi Gyeon (李汧, 1616-1668), a grandson of Yi Il, commissioned a war painting depicting Yi Il’s conquer of the Sijeonbu. Yi Gyeon’s war painting no longer exists. It seems that the title of the work was 'Tomyeol sijeonbuho do (討滅時錢部胡圖 Exterminating the Sijeonbu Jurchens).' Yi Gyeon tried to vindicate the honor and achievements of Yi Il with the painting. Yi Jinbang (李震芳, 1643-1724), a great-grandson of Yi Il, showed Yi Gyeon’s war painting to bureaucrats of the Noron (老論), Old Doctrine Faction, and asked them to contribute writings for Yi Il to maintain his family’s status as military officers. The painting played a role as an evidential material of Yi Il’s military merits, though it was painted at least 80 years after the battle. In 1708, Yi Dam (李橝, 1629-1717), an important political figure among the Noron faction, observed Yi Gyeon’s war painting and wrote Yi Jinbang a preface in elegant style to praise the painting and Yi Il’s accomplishment depicted or proven in the painting. The vision of Tomyeol sijeonbuho do could have been a highly influential means to restore and revive the fame of a forgotten military hero, Yi Il.
Jangyanggong jeongto sijeonbuho do is highly likely to have been painted after 1745, when the posthumous title ‘Janyanggong(壯襄公 Lord Jangyang)’ was bestowed upon Yi Il by the royal court. The formal exaltation of Yi Il had been practiced by Noron members since the 1700s. Major members of the Noron faction cooperated closely with the Yi family for enhancing Yi Il’s reputation. The Noron politicians needed the support of powerful military families to win harsh political strife against the Soron (少論), Young Doctrine Faction. Since 1680, the Noron pursued the restoration of Kim Jongseo (金宗瑞, 1390-1453), a well-known minister who was sacrificed by the coup of Grand Prince Suyang, who later became King Sejo(r. 1455-1468). Kim Jongseo conquered the Jurchens to expand the northeastern area up to River Tumen and wrote a text of strategic plan Jeseung bangyak (制勝方略 Methods of Winning Victories). Yi Il made an enlarged edition of the text. The Noron faction praised Yi as a true successor to Kim. As a result of the Noron factions's efforts, Yi Il could receive the posthumous title after almost 150 years after his death. On a day of March, 1745, at the banquet for celebrating the acquisition of posthumous title, held at the Yi family’s residence in Yongin(龍仁), Yi’s scions and Noron bureaucrats appreciated a war painting titled Jangyanggong jeongto sijeonbuho do. The painting shown at the banquet could be one of the three extant works, most probably the one in the Samsung Museum of Art. While the work might have taken references from Yi Gyeon’s war painting
nevertheless, it is more likely to be the newly painted one. While who exactly painted or patronized the Jangyanggong jeongto sijeonbuho do is not known, it can be inferred that not only the Yi family but the Noron faction was engaged to the work judging from the attendance list of the banquet.
Images in Jangyanggong jeongto sijeonbuho do built up specific meanings in the context of the visual culture of 18th-century Joseon Korea. To decode the layered meanings of the image, it is required to explore cartography, publication, and literature of the period. The background depicted in the painting shows precise geographic details, adapting images of the maps made by the Joseon court during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Nevertheless, the location of Sijeonbu had been manipulated in the painting. In the maps, Sijeonbu had been marked on a plain in the northeast part of Gyeongheung, but in the painting it was moved west and located in Palji (八池), the Eight Ponds. Palji had been famous as an exotic spectacle and became an important topic of travel literature in the 18th century. The image of Palji was a well-known symbol of the region. To facilitate viewers to acknowledge the location of the background, Sijeonbu was depicted as if it was located near Palji. Furthermore, by adjustment of the location, the important sites of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could be captured in the painting. With the background images, Yi Il could be admired as a figure which conquered the barbaric Jurchens who defiled the homeland of the founders of the Joseon dynasty.
It is observed that the march and battle scene of Jangyanggong jeongto sijeonbuho do were influenced by the illustrations in Jeongchunglok (精忠錄), a biography of Yue Fei (岳飛, 1103-1141) printed in Korea in 1585 and reprinted in 1709. In 18th century Joseon Korea, Yue Fei became one of the figures venerated in the national ritual system. Yue Fei was the leader of the army of volunteers in the Southern Song dynasty, who stood up against the Jin, the Jurchen dynasty in North China. Joseon was defeated by the Jurchen nation after the Manchu war of 1636, degraded to become a tributary state of Qing. Elites of Joseon, especially Noron members, ostensibly despised the Manchus as barbarians to set a pretext for political power. As Yue Fei was the icon of resistance to the Jurchens, later the Manchus, the images from Jeongchunglok could establish Yi Il as a hero who fought against the Jurchens, a man equal to Yue Fei. In the painting, the Sijeonbu Jurchens, which were just a branch tribe of Hūrha, are depicted as wearing the costume of Qing Manchus. It is considered as synecdoche strategy to cast present significance on Yi Il. In conclusion, Jangyanggong jeongto sijeonbuho do, possibly painted in around 1745 for the first time, was a war painting designed to exalt the military accomplishment of Yi Il, a hero who conquered the Jurchens. It is thought that the painting had a significant value to the Noron faction and Yi Il's scions who struggled for political power and made efforts to enhance the social status of the Yi clan in the eighteenth century.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32270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rchaeology and Art History (고고미술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고고미술사학과)
  • mendeley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