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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해석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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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시모카와 아야나

Advisor
최정운
Major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외교학전공)
Issue Date
2014-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4·195·16민주주의반공사상계학생운동통일 문제냉전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정치외교학부(외교학전공), 2014. 2. 최정운.
Abstract
본 연구는 1960년에 일어난 민주 혁명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른바 4·19에 대한 해석을 재검토하려는 것이다. 4·19에 대한 대부분의 선행연구들은 4월 19일 서울에서 일어난 대학생이 주도한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민주화 요구라는 사건 해석에 획일적으로 동의하고 있고, 다양한 연구 설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해석에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4·19에 참여하거나 목격한 자들에 의한 기록문이나 당시 신문 보도 등을 보면 4·19 참여자는 대학생뿐만이 아니라 구두닦이나 거지 등 가난한 도시 빈민들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4·19가 일어나기 전인 1960년 2월부터 각 지방에서 일어난 데모는 고등학생들이 일으킨 것이었고 대학생은 거의 두 달 후인 4월 18일이 되어서야 데모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 요구라는 4·19 해석은 1960년 당시 학문지 혹은 신문이 선호해서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따라서 4·19에 대한 해석은 사실과 완전히 부합한다고 볼 수 없으며, 사건 초기 단계에 형성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러한 해석이 어떠한 의도와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 왔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
위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연구에서는 4·19를 주도한 자로 간주되는 대학생과, 4·19를 밖에서 보면서 잡지나 신문을 통해 사건에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시도했던 1960년 당시의 한국 지식인들에 주목하며 4·19의 해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재검토한다. 4·19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데모 현장에 직접 나서게 된 대학생과 그것을 밖에서 보고 있었던 지식인은 서로 교류가 있었지만 활동영역이 달랐고 그들 사이에는 연대 관계와 갈등 관계가 각각의 시기에 따라 형성되었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통일 문제를 둘러싸고 그들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선행연구에서는 흔히 동일시되어온 이 두 집단을 나누어서 그들의 관계 변화와 4·19 담론 형성을 설명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4·19 당시 한국 지성계는 한국전쟁 전후 북한에서 월남해온 비교적 젊은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강력한 반공이데올로기와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교육을 통한 한국의 근대화, 자세히 말하자면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4·19가 발생하기 전부터 4·19에 관한 움직임을 민주주의라는 틀에 놓고 설명하려고 했다. 특히 당시 유력 지식 잡지였던 『사상계』는 한국 지식인들의 공론영역으로 기능하고 있었고 4·19에 관한 논고를 다수 기재하였다. 이런 점에서 『사상계』는 4·19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시각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본 연구에서는 『사상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같은 일간지에서 활동한 지성계 인사들을 '『사상계』 지식인'이라고 부르고, 그들에 의한 4·19 해석 변화에 주목했다.
본 연구는 고등학생 데모가 처음 일어난 1960년 2월부터, 1960년 4월을 거쳐서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시기에 4·19에 관한 초기 담론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4·19의 전개 과정과 함께 보고, 그 후 박정희 정권 초기에 일어난 대표적 반정권 운동이었던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과 1969년 3선개헌 반대운동에서 4·19 초기 담론이 어떤 변화와 연속성을 보여줄 것인지에 중점 두었다.
4·19란 사실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에 공산주의적 색채가 나타날 우려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요소로 사건을 포장하려 한 『사상계』 지식인들의 국내 위기 극복을 위한 전술이었다. 1960년 중반까지는 『사상계』 지식인들이 마련한 4·19 해석에 대학생들은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되는 데모를 통해 오히려 사회 혼란을 일으킨 주범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학생들은 '통일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사상계』 지식인들과의 관계는 악화 되었고 대학생들의 행동과 4·19 초기 규정 사이에는 괴리가 생기게 되었다. 오히려 5·16 이후 박정희 정권과 대립함에 있어서 『사상계』 지식인들이 마련한 4·19 초기 담론이 반정권 운동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봤을 때 4·19는 냉전체제 하의 자유민주주의진영과 공산주의진영의 대립이라는 국제 상황 속에서 국내 혼란을 막고 한국의 근대화를 달성하려고 한 『사상계』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민주주의를 추구한 선구적인 움직임이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대학생을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무조건 평가하는 현재 시각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라는 점을 제의한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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