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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町殿의 出行과 그 의미
室町殿の出行とその意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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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고대성
Advisor
박수철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8-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무로마치도노(室町殿)공무관계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참내(參內)참원(參院)오나리(御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18. 2. 박수철.
Abstract
무로마치도노(室町殿)는 아시카가 가문(足利家)의 가장(家督)이자 공무(公武)를 아우르는 무로마치 막부 최고 권력자를 가리킨다. 사료에서 출행(出行)이라 표현되는 무로마치도노의 외출에서는 무로마치도노와 주요 정치 행위자와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출행 양상은 각 무로마치도노마다 뚜렷한 차이가 있으며, 동일 인물이라도 시기에 따라 변화한다. 이 글에서는 무로마치 막부 제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와 제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 시기의 공무 관계가 잘 드러나는 참내·참원과 공가 및 무가 저택 방문에 초점을 맞추어 관련 사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참내와 참원 경향은 크게 세 분기점으로 나눌 수 있다. 쇼군 취임 직후 요시미쓰는 참내를 거의 하지 않았고 참내를 하는 경우에도 무가의 선례를 따랐으며 호종(扈從) 행렬도 모두 무가로 이루어졌다. 요시미쓰의 무가의 수장이라는 측면이 두드러지는 시기이다.
첫 번째 분기점은 1378년의 권대납언(權大納言) 겸 우근위대장(右近衞大將) 승진이다. 이후 요시미쓰는 공가 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잦은 참내를 통해 조정 정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공가로서 행동했다. 이 시기의 참내에서 요시미쓰는 공가의 최고 가격(家格)인 섭관가(攝關家)의 예를 따르거나 선례에 없는 파격을 많이 취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위를 과시했다. 또한 요시미쓰는 호종 행렬에서 무가를 배제하고 공가가 수행하게 했다. 이러한 참내에서의 무가 배제는 천황과의 관계를 독점하여 유일무이한 무가 공경(武家公卿)으로서 무로마치도노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였다.
두 번째 분기점은 1388년의 좌대신 사임으로 이후 요시미쓰는 참내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이는 공가 사회에서의 그의 지위가 정점에 도달하여 참내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참내가 없었다고 해서 이 시기의 요시미쓰와 천황가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요시미쓰는 참원을 통해 천황가와의 유대 관계를 유지했으며 ‘공무어계약(公武御契約)’에 의거하여 천황가의 존속을 위해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모습도 보였다.
마지막 분기점은 1406년으로 이 해부터 참내 횟수가 다시 급격하게 증가한다. 이는 아들 요시쓰구의 공가 사회 진입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공무에 절대적으로 군림했다는 평가를 받는 요시미쓰도 후계자 문제를 두고 다시금 천황의 권위를 이용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렇듯 요시미쓰의 참내 양상을 살펴보면 ‘일본국왕(日本國王)’ 요시미쓰가 일방적으로 천황가의 권한을 흡수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요시미쓰는 시기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천황가의 권위를 인정하며 ‘공무어계약’이라 불리는 관계 하에서 천황가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 그 권위에 기대어 자신을 다른 무가와 차별화했다.
요시미쓰의 공가 및 무가 저택 방문은 참내와 같이 극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지만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요시미쓰는 1378년 이후 섭관가를 비롯한 상급 공가 저택에 방문하여 공가 사회의 규칙을 학습하고 그들과 함께 렌가(連歌) 등의 예능을 즐기는 등 공가 사회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이 시기 참내 경향과 일치한다. 공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히노 가문(日野家) 방문이나 무가 저택 방문에 공가를 데려가는 모습에서는 특징적으로 공무를 휘하에 두고 지배한 요시미쓰의 모습이 드러난다. 또한 요시미쓰는 자신과 천황가·히노 가문을 혈연적으로 매개하는 스켄몬인(崇賢門院)과도 함께 자주 출행하는데 여기서도 요시미쓰와 천황가의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무가 저택 방문은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도이며 전체적으로 많은 횟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요시미쓰가 자신이 공가나 무가의 저택을 방문하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저택인 무로마치도노에 불러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요시미쓰가 추진한 공가화에 대한 반발로 정권 초기에 공가 사회와 거리를 두었으며, 참내도 거의 행하지 않았다. 이후 쇼코 천황(稱光天皇)의 즉위식에 관여하며 자신의 지위를 섭관가에 준하는 위치로 확립하는 과정에서는 공가에게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또한 요시모치는 요시미쓰와는 다르게 공가로서 조정 정무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무가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는 요시모치가 요시모치 정권 초기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무가 우위 정책을 펴 왔다는 기존 연구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14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요시모치의 참내·참원 횟수가 증가하기 시작하고 후기로 갈수록 더욱 많아진다. 이러한 참내·참원의 증가 경향은 1419년 내대신 사직, 1423년 쇼군직 사직과 출가라는 요시모치의 지위 변화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이 시기 천황가는 연이은 불상사로 권위가 흔들리고 후계자 문제로 존속마저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에 요시모치는 참내와 참원을 통해 천황가를 적극적으로 보좌하면서 천황가의 권위를 세우는 데 주력했다.
이렇듯 요시모치가 천황가를 힘써 보좌한 이유는 무가 내의 세력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우에스기 젠슈의 난(上杉禪秀の亂)을 전후한 1417년, 요시쓰구 처분의 후유증으로 중앙 정세가 혼란해진 1419년, 간토(關東)·이세(伊勢)·규슈(九州) 방면에서 동시에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난 1423년, 쇼군 요시카즈(足利義量)의 사망으로 쇼군 공위 상태가 된 1425년에는 모두 그 전후보다 참원 횟수가 각별히 많다. 여기서는 무가 내의 세력 다툼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요시모치가 천황가의 권위에 기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요시미쓰 시기와 마찬가지로 요시모치 시기에도 참내·참원 호종에서 무가는 일관되게 배제되었다. 요시모치의 참원은 천황가의 가장인 고코마쓰(後小松) 상황의 권위를 세우는 한편, 상황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유일한 무가로서 요시모치의 지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정권 초기와 후기의 차이는 요시모치의 무가 저택 방문 경향에서도 나타난다. 요시모치는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치세 초기에 빈번하게 무가 저택을 방문하였다. 요시모치 시기 무가 저택 방문의 핵심은 향연과 증답 의례로 이를 통하여 상호간의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무가 저택 방문은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특히 정치적 긴장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완화하는 기능을 했다. 반면 요시모치는 정권 초기에 공가를 매우 경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공가 저택 방문을 거의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시모치의 무가 저택 방문은 14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급격히 감소한다. 이는 요시모치가 권력 기반이 안정되자 무가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는 방향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정권 초기에는 드물었던 상급 공가 저택 방문이 이루어지고, 공가에 대한 강압적인 태도도 완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무가 우위 정책 일변도였다는 종래의 평가를 요시모치 정권 초기로 한정시키고 후기는 이와 구분해야 함을 시사한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42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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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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