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駕洛三王事蹟考의 간행과 金海金氏의 문화의 정치 : The Publishing Of the Book of Garak-samwang-sajeok-go (駕洛三王事蹟考): Considerations on the Achievements of Three Great Kings in the Ancient Kumgwan-gaya Country(金冠伽倻) And the Cultural Politics Of the Kimhae Kim Family(金海 金氏) in the 19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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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혁

Issue Date
2017-06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Citation
규장각, Vol.50 No., pp. 239-301
Keywords
김해김씨문중문서삼왕김유신 후손규정산청완문규약가락삼왕사적고사회체계증간본문화의 정치특권the Book of Garak-samwang-sajeok-go(駕洛三王事蹟考: Considerations on the Achievements of Three Great Kings in the Ancient Kumgwan-gaya Country金冠伽倻)Kimhae Kim Family(金海 金氏)the privilegesancheong(山淸)political purposecultural politicsdocumentspublic agreements
Abstract
이 논문은 19세기 駕洛三王事蹟考의 간행이 편찬자인 김해김씨와 연관된 각별한 의미에 관해 탐구하였다. 이 책은 1800년에 서울의 外閣(前 校書館)에서 초간본이 간행되었고, 그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增刊이 이루어졌는데, 1832~1834년 사이에 淸道에서, 1842년에 나주에서, 1851년 1월에 김해에서, 1851년 11월에 산청에서, 1867년에 다시 산청에서 간행되었다. 이 간본들은 간행 주체에 따라, 간행의 의도에 단층적인 관찰이 요구될 만큼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 같은 차이에 주목한 이 연구는 세 가지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하나는 가락삼왕사적고의 간행이 김해김씨의 문화의 정치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이 책에 자신의 특권 보장과 관련된 문서를 실음으로써 어떠한 현실적 효과를 기대하였는가하는 점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를 통해 김해김씨가 창출한 삼왕의 개념이 이후 그들에게 이념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통해 19세기에 벌어졌던 책과 문서의 기능적 독특성, 국가와 가문 통합 간에 내재해 있는 적대적 상관성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결과 다다른 결론은 이러하다. 첫째, 1800년에 간행된 초간본에는 山淸의 三賢派가 김해김씨를 통합하는 이념인 삼왕 개념을 창출하여 삼왕사와 이 책으로 구상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자기 지역 중심의 특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책의 편제에 너무나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후 증간본 발간의 계기가 되는 동시에, 지역 간의 갈등을 야기시키는 불씨가 되었다. 둘째, 김해김씨 모두에게 특권이 부여되었던 것은 아니고, 오직 김유신 후손에게만 한정된 국가의 규정은 김해김씨의 통합에 장애가 되었다. 셋째, 추상적인 개념어인 삼왕은 삼왕사와 가락삼왕사적고로 구상화되었다. 여기서 가락삼왕사적고에는 삼왕의 개념을 널리 유포시키고 최근에 급조된 삼왕사를 포함한 각종 비석들을 공인하는 역할이 부여되어 있었다. 넷째, 초간본에는 삼왕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현시하면서도 지역적으로 산청을 중심으로 하는 구성에서의 편협성을 강조하는 모순의 씨가 배태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주, 김해 등 다른 지역의 김해 김씨가 불만을 갖는 것은 당연하였고, 그들은 자신의 불만을 새로운 의도를 반영한 증간본을 간행함으로써 표출하였다. 산청에서는 이 같은 도전에 대한 대응으로서 새로운 종합을 시도하여 새로운 증간본을 다시 발간하였고, 책의 재구성을 통해 산청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서 포괄적이고 균형 있는 구성을 시도하였다. 다섯째, 1800년에 간행된 초간본인 外閣本은 主張을, 1832년~1834년 청도본은 사실의 公告를, 1842년 나주본은 자신들이 취한 특권의 선포를 위해, 1851년 1월 김해본은 역사서로서, 1851년 11월 산청본에서는 여러 계파의 통합을 위해, 1867년 산청개정본에서는 책의 체제를 통일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 간행되었다. 이 중에서 1867년 산청개정본이 통일성과 균형성을 함께 갖춘 선본임을 밝혔다. 여섯째, 가락삼왕사적고에 실린 完文, 關文, 受敎, 牒呈, 題辭, 上言 등 이 집안의 특권 보장과 연관된 문서들은 애초에 가지고 있던 증빙, 전달, 인증, 보고, 처분, 명령, 청원 등의 효력 대신에, 이 책이 갖는 특성을 통해 主張, 公告, 證據, 宣布, 規約 등을 실현하는 쪽으로 자신의 역할을 바꿔 수행하는 원리를 가락삼왕사적고의 간행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가락삼왕사적고를 바라볼 때, 이 책이 19세기 내내 벌어졌던 김해김씨의 갈등과 통합을 거듭하는 역사를 증언하는 명백한 목격자이자, 그러한 사실을 간직하여 후대에 전해주는 유일한 증인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통해 김해김씨의 역사가 직선의 행로가 아니었으며, 장애와 난관을 벗어나고자 도약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빚어진 구불구불한 역사였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도상에서 결성된 20세기 초의 왕산화수계는 계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전라도 권역의 김해김씨와 광범위하게 연합하는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산청의 삼현파가 압도적으로 다수로서 특정 지역으로의 치우침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는 애초에 조선의 왕권체제 아래에서 삼왕의 개념 안에서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현실과 이념의 충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락삼왕사적고 간행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이념은 어디까지나 이념의 차원에서 통합, 통일, 균형을 창출할 수는 있었지만, 다시 책 속에 실린 문서를 통해 파악된 현실에서 삼왕의 이념이 실제로 실현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해김씨 중에서 조선의 국왕이 공식적으로 그 후손에게 특권(특혜)을 인정하였던 왕은 興武王 한 명뿐이었고, 이것조차 자손들이 국가에 대해 그로부터의 出系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특권 규정은 삼왕의 혈연을 매개로 분산된 지역성을 극복하여 대통합으로 나아가는 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 사실상 문중의 통합이 가능한 현실적 조건은 국왕으로부터 부여되는 특권 제도의 해체에 있음을 알 수 있으며, 大宗中이 번성할 수 있었던 때가 오히려 일제 강점기 이후라는 사실이 이를 역설적으로 반증한다. 이와 같이 가장 다수를 차지하였던 김해김씨 문중의 대통합 과정이 한국의 사회체계 변동과 깊이 연동되어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ISSN
1975-6283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74455
DOI
https://doi.org/10.22943/kyujg.2017..5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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