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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初期 支配勢力의 再編과 政治體制의 變動 : 高句麗初期における支配勢力の再編と政治体制の変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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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성현

Advisor
서의식
Issue Date
2021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舊고구려諸加二重聳立體制國王集權體制旧高句麗二重聳立体制国王集体制
Description
학위논문(박사) -- 서울대학교대학원 : 사범대학 사회교육과(역사전공), 2021.8. 서의식.
Abstract
本稿では、韓国の古代社会の表徴である「部」を分析対象にして、支配層が国政に参与して政治を運営した原理と様相を究明した。そのため、古朝鮮及び「旧高句麗」社会と有機的な連結の中で、高句麗の国家成立の過程に系統的にアプローチし、朱蒙を求心点として成立した高句麗初期の歴史が古代社会の再編の過程であったということを明らかにした。
紀元前2世紀の後半に、旧高句麗は衛氏朝鮮や「濊」と共に東夷地域を代表する政治勢力であった。また旧高句麗には諸加が連帯して構成した政治組織の「部」が成立していたのであった。部の中核とされる諸加は、独立の政治力をもった王者であり、「加」の王者性は加が諸邑落を統主することから生じる行政的ㆍ軍事的ㆍ経済的などの支配権に基づいたものであった。諸加は連帯を通じて部を組織し、累層に疊築して上位権力を創出することによって自分の支配権をより鞏固化させた。すなわち、上部国家としての旧高句麗であり、その王としての高句麗王の存在であった。
高句麗王は五部に所属した支配層の国人によって共立された。国人の共立は新たな王が高句麗王としての正統性を確保するための重要な手順であった。そのため、たとえ現王の直子の優先継承という原則のもとに優先権をもっていた候補者であったとしても、国人の決定を受容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とされる。この点で、当時の高句麗王は「共立王」としての性格があったと言うことができる。こうした性格を表す高句麗語は「皆次」である。「皆次」は語義及び音價上の新羅語の「居西」と相同の言葉である。高句麗と新羅で、このような共通点が発見される理由は、「皆次」や「居西干」を共立する政治構造が先行の体制から継承されたためであると考えられる。
この時期の政治体制は、王者的な存在の諸加がまた上位王者としての高句麗王を聳立する前提の上で成り立っていた点から見ると、「二重聳立体制」と呼ばれる。二重聳立体制の上で、政治権力は部から生成ㆍ保持され、諸加は各部に所属することによってその権力を享有することができた。このような権力は、諸加が主体となって高句麗を建設したことから発生した国家権力を各部が分有した形態であった。高句麗王も部に所属して政治権力を獲得することができた。
しかし、玄菟郡の設置や逐出の過程で、旧高句麗の王部としての消奴部とその王室としての沸流国がもっていた主導権と影響力は次第に微弱となってきた。従来の対漢関係を導いた旧高句麗の王室の立場は、旧高句麗の国政を主導する新たな人物が擡頭すれば王統すら変わってしまうほど、相当劣悪であった。そこで、朱蒙が登場したのであった。旧高句麗の王室であった沸流国王の松譲の投降によって、朱蒙は新しい王室を開創し、これにより高句麗の王部は消奴部から桂婁部に交替された。
王部の交替の当代には、朱蒙が高句麗を「建国」したという認識より、旧高句麗を「継承」したという認識が普遍的だったと推定される。朱蒙の高句麗の「建国」は、彼が国家の始祖として確固に位置づけられながら現れた象徴的な表現だと言える。朱蒙は、新しい国家を建設したというよりも、すでに存在していた「高句麗」を「継承」して即位したのであった。従って、旧高句麗を継承した上で成立した高句麗の国政は、しばらくの間は旧高句麗から運営されてきた組織と秩序に基づいて展開された。部を中枢とした国家運営体系の維持である。
諸加は部に所属する加として諸加会議に参加して、国家の重大事に関して審議ㆍ決定し、ここから決定されたことを施行する権限は高句麗王に委任された。諸加会議は国中大会で開催された会議を含めた定期の諸加会議と、諸加の共論によって事案を議論した別の会議機構で構成され、また、平時に小規模で運営された諸加会議には、各部の代表としての大加が参加したと推定される。大加は、勢力的な側面にも大者であったが、同時に国政の運営上の一種の政治的な地位であった。
一方、王部が交替された後、高句麗王に要求された政治的な懸案は、旧高句麗から離脱した支配勢力に対する統合であった。対内的には、特に琉璃王代に支配勢力の再編が一段落つくと、各部に所属していた全体の諸加が参加して国政を運営することができる空間の必要性のために断行されたのが尉那巖への遷都であった。
対外的には、朱蒙から大武神王代までに五部に所属した諸加と共に積極的に周辺の勢力を統合してきた。特に、大武神王代の扶餘の征伐によって、濊貊社会の主導権を掌握した。また、琉璃王代に西方への拡張を企図し、高句麗県を攻撃して中原の勢力の影響力を抑制しようとしたことと、扶餘の征伐による濊貊社会の主導権を掌握した基盤の上で、南方に勢力圏を拡大しながら、漢の郡県に付庸していた諸勢力を統合しようとした。この過程の中で、政治権力は高句麗王へ集中しはじめ、また租賦統責権ように諸加の経済的な基盤を拡大することができる権限を分配するのに、高句麗王との結託が重要とされて、各部も積極的に国政の執行の過程に参与し始めた。太祖大王代の以後から官等を持つ部の所属の諸加層が現れる様相はこうした文脈で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
高句麗王も諸加を包容しながら国政を運営しようとした。急激に拡張された領域を統治するのに要求される行政力や支配力を充当するためには、部との提携が依然として必要であった。新たに拡張された領域を効率的に統治するのに、二重聳立体制に基づいて運営されてきた支配方式が有効であった。従って、既存の政治体制を無理に再編するより、部に所属していた諸加の統主権を認定した上で、諸加が自発的と主体的に新しい統治理念を受容し、彼らがこれに適合な体制を整備するのに参与させてきた。
新しい統治理念とは、すなわち高句麗王が諸加の支配の下戶もまた国王の民として直接に統治するという理念であり、閔中王から賑恤を通じて表出された意思は太祖大王代に入ってさらに拡散されて政治的にも現実となり、故国川王代には、賑貸の恒式化として制度化された。このような時勢の中で、政治権力は国王に集積され、国政は、国王によって決定され、国王の官僚と政治機構により運営し、国王を頂点とする支配秩序が定立した上で、従来の邑落社会を「地方」と再設定した。このような点を特徴とする政治体制は、国王が原理的に政治権力を掌握した上で行われた点に着目すれば、「国王集権体制」と呼ぶことができる。
国王集権体制を鞏固にしながら、政治権力の獲得は部に所属するのではなく、高句麗王との関係を通じることによって獲得された。このようにして、従来の諸加の王者性を支える統主権は地方社会を実質的に支配するための権力として転換されたり、また中央から政治権力を獲得するための現実的な背景として作用したりした。そして、このような過程を通じて、支配勢力は中央政治権力を中心として再編され、「貴族化」ㆍ「官僚化」し、新しい形態の部としての「方位名部」が成立した。
太祖大王代から可視化されたこうした変動によって、高句麗王は諸加とは性格の異なる存在として新たに位置づけられてきた。つまり、諸加が共立した王だったのではなく、国王を頂点とする支配体制上、すべての民を統治する君主の性格であった。国王集権体制を整備しながら現れた新しい性格の王権である。よって、次大王以後の国王は現王及び先代王との血縁関係により王位継承の正統性が確保され、国人の共論による共立の王位継承への位相は以前とは異なるものとなった。
結局、二重聳立体制が行われた旧高句麗は、支配階級であった諸加が自分の利益を維持するために被支配層を支配し、これを強制し正当化することができる制度を用意した古代社會であったと言える。旧高句麗から存在した部は国家が建設ㆍ運営されるのに核心基盤であった。従って、朱蒙の「建国」以後の高句麗は、先行した歴史の経験から発生した懸案を解決しながら、それに伴って、新しい政治体制を準備していき政治権力構造を新たに調整した、すなわち古代社会の再編の過程として理解することができよう。
본 논문은 한국 고대사회의 表徵으로 나타나는 部를 분석대상으로 삼아 지배층이 國政에 참여하여 정치를 운영해 나간 원리와 양상을 究明하고, 고구려의 국가 성립 과정을 고조선 및 舊고구려 사회와의 유기적인 연결 속에서 系統的으로 접근하여, 주몽을 구심점으로 하여 들어선 고구려의 초기 역사가 고대사회의 재편 과정이었음을 밝힌 글이다.
서기전 2세기 후반, 舊고구려는 위만조선 및 濊와 함께 東夷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었으며, 舊고구려에는 諸加가 스스로 連帶하여 구성한 정치조직인 部가 성립해 있었다. 部의 中核을 이루는 諸加는 독립된 政治力을 보유한 王者였고, 加의 王者性은 그가 諸 읍락을 統主하는 데서 지녔던 行政的ㆍ軍事的ㆍ經濟的 측면 등의 支配權에 기반을 두었다. 諸加는 연대를 통해 部를 조직하고 누층으로 疊築하여 상위권력을 마련함으로써 그들의 지배권을 더욱 鞏固化하였다. 곧 상부국가로서 舊고구려의 건설이며 그 왕으로서 高句麗王의 존재이다.
고구려왕은 五部에 소속한 지배층인 國人이 共立하였다. 國人의 共立은 새 왕이 고구려왕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절차였다. 따라서 國人의 共論에 따라 고구려왕이 추대되면, 설령 現王의 直子 우선 계승이라는 원칙하에 우선권을 지녔던 왕위계승 후보자였다고 할지라도 그 결정에 따랐다고 이해된다. 國人이 共立하여 推戴한 왕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왕은 共立王으로서의 성격을 띠었다. 당시 고구려 王權의 이러한 성격을 나타내는 고구려어가 곧 皆次이다. 皆次는 고구려어로 王이란 뜻으로, 語義 및 音價 상 신라의 居西와 相同한 단어이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은, 皆次ㆍ居西干을 共立하는 정치구조가 선행한 체제에서 이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정치체제는 王者的 存在인 諸加가 다시 그들의 상위 王者로서 고구려왕을 聳立시킨 전제 위에서 작동하였다는 점에서 二重聳立體制라 할 수 있다. 이중용립체제 하에서 정치권력은 部에서 生成ㆍ保持되었고 諸加는 각 部에 소속함으로써 그 權力을 享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치권력은 諸加가 주체가 되어 고구려를 건설하면서 발생한 國家權力을 각 部가 分有한 형태였다. 고구려왕 또한 部에 소속하는 위에서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玄菟郡의 설치 및 축출 과정에서 舊고구려의 王部로서 消奴部와 王室로서 沸流國의 주도권 및 그 영향력은 점차 미약해져 갔다. 종래 對漢 관계를 이끌던 舊고구려 왕실의 입지는, 舊고구려를 이끌 만한 새로운 인물이 대두한다면 王統이 바뀔 정도로 상당히 열악한 처지에 있었다. 곧 주몽의 등장이다. 주몽은 舊고구려의 王室이었던 沸流國王 松讓의 투항을 받아냄으로써 고구려의 새로운 王室을 열었고, 이로써 고구려의 王部는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교체되었다.
王部가 교체된 당대에는 주몽이 고구려를 建國하였다는 인식보다는 고구려를 繼承하였다는 인식이 더 보편적이었다고 추정된다. 주몽의 고구려 건국은 그가 국가의 시조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하면서 등장한 象徵的 表現이라 할 수 있다. 주몽은 스스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고구려를 繼承하여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舊고구려를 계승한 위에서 성립한 고구려의 국정은 한동안 舊고구려로부터 운영되어 온 조직과 질서에 기반을 두고 전개되었다. 곧 部를 中樞로 한 국가운영체계의 유지이다.
諸加는 部에 소속한 加로서 諸加會議에 참여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審議ㆍ決定하였고, 여기서 결정된 사항을 시행하는 권한은 고구려왕에게 위임되었다. 諸加會議는 國中大會에서 실시하던 諸加評議를 포함한 정기 제가회의와 諸加의 共論을 통해 사안을 논의하는 별도의 회의기구로 구성되었으며, 평시 소규모로 운영되는 제가회의에는 각 部의 대표로서 大加가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大加는 세력 면에서도 大者이겠으나 그와 동시에 국정 운영상 주어지는 일종의 정치적 지위이기도 하였다.
한편, 王部 교체 이후 고구려왕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현안은 舊고구려에서 이탈한 지배세력에 대한 통합 및 정돈이었다. 대내적으로는 특히 유리왕 대에 지배세력의 재편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추정된다. 나아가 新왕실을 중심으로 지배세력의 재편이 일단락하면서, 각 部에 소속한 전체 諸加가 참여하여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으로 단행한 것이 尉那巖 천도였다.
대외적으로는 주몽 이후부터 대무신왕 대까지 五部 소속 諸加와 함께 적극적으로 주변 세력을 통합해 나갔다. 특히 대무신왕 대에는 부여를 정벌함으로써 예맥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유리왕 대 서쪽 방면으로의 확장을 도모하고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중원 세력의 영향력을 억제하고자 한 것과, 부여 정벌을 통해 예맥사회의 주도권을 차지한 기반 위에서, 남쪽 방면으로 세력권을 확대해 나가면서 한 군현에 附庸하고 있던 諸 세력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은 점차 고구려왕으로 집중하였고, 또한 租賦統責權과 같이 諸加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할 수 있는 권한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왕과의 결탁이 중요하게 되면서, 각 部에서도 적극적으로 국정 집행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태조대왕 이후 官等을 소지한 部 소속 제가층이 나타나는 양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고구려왕 또한 諸加를 포용하여 국정을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급격히 확장된 영역의 통치에 요구되는 行政力과 支配力을 충당하기 위해서 여전히 部와의 提携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확장된 영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데에는 이중용립체제를 바탕으로 운영되던 지배방식이 유효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정치체제를 무리하게 재편하려고 하기보다는 部에 소속한 諸加의 統主權을 일단 인정한 위에서 諸加가 자발적ㆍ주체적으로 새로운 統治理念을 수용하고 이에 걸맞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참여케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새로운 통치이념이란 곧 고구려왕이 諸加가 지배하는 下戶 또한 국왕의 民으로써 직접 통치한다는 이념으로, 민중왕 대부터 賑恤을 통해 표출되었던 이러한 의지는 태조대왕 대에 들어서 더욱 확산되며 政治的으로도 現實化하여 갔으며, 고국천왕 대에는 賑貸의 恒式化로써 制度化하였다. 이러한 時勢 속에 정치권력은 국왕에게 集積하여, 국정은 국왕에 의해 결정되고 국왕의 관료 집단 및 정치기구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질서가 정립하는 위에서 종래의 읍락사회는 地方으로 재설정되었다. 이러한 점들을 특징으로 하는 정치체제는 원리상 국왕이 정치권력을 掌握한 위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國王集權體制라 부를 수 있다.
국왕집권체제가 공고화하면서 정치권력은 部에 소속하면서가 아니라 고구려왕과의 관계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면서, 종래 諸加의 王者性을 뒷받침하던 統主權은 지방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權力으로 전환되기도 하고, 또 그것이 중앙에서 政治權力을 획득하기 위한 현실적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중앙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지배세력은 재편되어 貴族化ㆍ官僚化하였고, 또한 새로운 형태의 部로서 方位名部가 성립하였다.
태조대왕 대 이후 可視化한 이러한 변동으로 고구려왕은 점차 다른 諸加와는 성격을 달리 하는 존재로서 새롭게 위치하게 되었다. 이제 고구려왕은 諸加가 共立한 왕이 아니라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 속에서 모든 民을 통치하는 君主로서의 성격을 띠어 갔다. 국왕집권체제가 정비되어 가면서 나타난 새로운 왕권의 성격이었다. 이에 차대왕 이후의 국왕은 現王 및 先代王과의 혈연관계에 의해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확보되었고, 國人의 共論을 통한 共立은 왕위계승 과정에서 이전과 같은 위상을 지닌 절차로서의 성격을 상실하였다.
결국 이중용립체제가 작동하던 舊고구려는 지배계급인 諸加가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피지배층을 지배하고, 이를 강제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놓은 古代社會였다고 할 수 있다. 舊고구려 시기부터 존재한 部는 국가가 건설되고 운영되는 데 핵심 기반으로 작동하였다. 따라서 주몽의 건국 이후 고구려는, 앞선 역사 경험에서 비롯된 현안을 해결해 나가며 이에 동반하여 요구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마련해 나가고 정치권력구조를 새롭게 調整하는, 곧 고대사회의 재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78765

https://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67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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