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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군과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관계에 대한 연구: 이병휘, 전봉준 공초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 Study on the Political Coalition between the Donghak Peasant Army and Hungson-Daewonk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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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영수

Issue Date
1997
Publisher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Citation
한국사회과학, Vol.19 No.3, pp. 144-184
Abstract
이 논문의 목적은 1894년 발생했던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과 흥선대원군의 연합관계를 실증하고, 그 정치적 의미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통상 양자의 정치적 연합관계는 부정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었다. 그 중요한 이유는 양자의 정치적 지향이 상반된 것으로 예단하거나, 또는 갑오농민전쟁의 근대혁명적 의의가 훼손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관계를 긍정하는 경우에는 그 정치적·역사적 의미를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원군 세력의 연락자였던 이병휘 訊問記錄을 검토해 본 결과 양자의 제휴는 분명한 듯하다. 또 전봉준 신문기록을 검토해 보면, 농민군의 제2차 봉기는 대원군과 긴밀한 연락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농민군은 신분구조를 혁파하려 하면서도 성리학적 인간관계와 정치질서를 거부한 것이 아니어서 순수하게 근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들과 대원군의 정치적 지향은 완전히 합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원군 외의 정치적 대안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원군은 1873년 실권 이래, 민씨 일파의 개방정책과 폐정에 저항하고자 했던 유학자집단으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에서 병사들 역시 대원군을 정치적 대안으로 선택했다 1886년 김옥균 역시 대원군의 집권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그 같은 정치적 비중 때문에 1894년 일본 또한 대원군을 통해 사태를 수습코자 했다. 그러나 당시 저항적인 정치집단은 모두 애국적이었으나 동시에 세계관과 정견의 차이 때문에 완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연합시켜 부패하고 무능한 고종과 민씨 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대원군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대원군과 농민군의 연합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예상치 않게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ISSN
1226-7325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4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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