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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의 禮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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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uthor鄭景姬-
dc.date.accessioned2010-05-04T04:58:22Z-
dc.date.available2010-05-04T04:58:22Z-
dc.date.issued2002-12-
dc.identifier.citation奎章閣, Vol.25, pp. 201-226-
dc.identifier.issn1975-6283-
dc.identifier.urihttps://hdl.handle.net/10371/63927-
dc.description.abstract선초 성리학이 조선의 국가 이념으로 채택된 이후 그 위상에 대한 다양한 입장 차이는 있어 왔으나 공식적인 국가 이념으로서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면서 그 위상 또한 점차 높아져 갔다. 성리학 이해의 진전 결과 16세기 후반~17세기 초에는 학파의 분기가 있었는데, 여기에 兩亂이라는 외부적인 충격이 가해지면서 성리학 이해 방식의 차이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兩亂의 후유증 해결을 위해 성리학의 義理論이 가지는 효용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조선후기 성리학의 공식적인 위상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성리학의 의리론은 西人-老論 계열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關宗 後半期 이래 국왕들도 의리론에 공감하면서 왕실이 이를 주도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英祖代 이후 본격화되었다. 王世弟 시절 영조는 성리학의 聖學觀에 따라 堯舜之治를 이상으로 삼게 되었는데, 이는 영조 평생 학문의 중심축이 되었다. 영조 전반기 영조의 심리학 이해는 의리론에서 출발하면서도 현실적인 更張을 펼쳐야 하는 君王의 입장에서 功利論 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절충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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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language.isoko-
dc.publisher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dc.title英祖의 禮學-
dc.typeSNU Journal-
dc.contributor.AlternativeAuthor정경희-
dc.citation.journaltitle奎章閣-
dc.citation.endpage226-
dc.citation.pages201-226-
dc.citation.startpage201-
dc.citation.volume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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