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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錄을 통해 본 郭再祐(1552~1617)의 義兵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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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uthor姜文植-
dc.date.accessioned2010-05-07T03:59:23Z-
dc.date.available2010-05-07T03:59:23Z-
dc.date.issued2008-12-
dc.identifier.citation奎章閣, Vol.33, pp. 95-121-
dc.identifier.issn1975-6283-
dc.identifier.urihttps://hdl.handle.net/10371/64681-
dc.description.abstract『선조실록』과 『신조수정실록』에 수록된 곽재우의 의병 관련 기사들을 보면, 비록 실제 전투에 참여한 관군 장수나 의병장들이 작성한 기록만큼 세밀하지는 않지만, 김성일을 비롯한 지방관들의 보고에 기초하여 곽재우 의병 활동의 전반적인 상황이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실록에는 곽재우에 대한 선조와 정부 관료들의 인식과 평가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그의 의병 활동 및 임란 중반 이후의 행적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발발한 지 불과 10여 일 만에 사재를 털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는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 장수로서의 능력에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확실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쟁 수행 과정에서 관군 장수들과 잦은 갈등과 의견 충돌을 일으켰고, 이는 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특히 선조는 곽재우가 관군 장수 및 조정 대신들과 대립했던 것을 왕명에 대한 거부ㆍ부정으로 인식하였다. 그 결과 선조는 곽재우를 크게 불신하였고, 그에게 병권을 맡기거나 그를 공신으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전란이 끝난 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辟穀餐松으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임진왜란 이후 많은 의병장들이 전공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였고 일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곽재우의 벽곡찬송은 당시 의병장들의 불우한 삶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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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language.isoko-
dc.publisher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dc.title實錄을 통해 본 郭再祐(1552~1617)의 義兵 활동-
dc.typeSNU Journal-
dc.contributor.AlternativeAuthorKang, Moonshik-
dc.citation.journaltitle奎章閣-
dc.citation.endpage121-
dc.citation.pages95-121-
dc.citation.startpage95-
dc.citation.volume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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