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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울산지역 상급 향리직의 구성과 향리 가계의 변동 - '향리'의 의미 변화 및 위상 변동과 관련하여
Composition of Senior Local Clerks in the Ulsan area during the Latter half period of the Joseon dyansty, and changes in the Clerk houses - Changes in the meaning of 'Local Clerks'("Hyang'ri")' and their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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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종서
Issue Date
2014-09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Citation
한국문화, Vol.67, pp. 81-117
Keywords
ProfessorDepartment of History and CultureUlsan University
Abstract
조선 시기의 향리(響吏)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고려와 조선 향리의 차이, 조선후기 향리 직제의 구성, 향리층의 내부 질서와 가계 구성 등 많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조선시기 향리의 신분 내지 사회적 위상과 변화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규명되지 못하였다. 특히 상층 가계에 대한 견해 차이가 크다. 상층 향리가계는 전통적 특권과 위상을 유지했다는 견해와 가리(假吏)등 하층 가계의 진출로 인해 상층 가계를 포함한 향리층 전반의 위상이 하락했다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소수 가문이 상층 직임을 독점하고, 새로 진입한 가문이 하위직임을 담당했다는, 단성호적에 근거한 최근의 연구도 상층 향리가계의 특권 유지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기의 법제에 근거하면 향리의 신분은 중인이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법제적인 신분제는 양·천제였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까지도 대과(大科)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다. 대과 응시 자격의 유무는 중인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향리의 신분을 대과 응시가 금지된 서얼이나 기술관과 같이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시기, 특히 조선 후기의 향리는 ‘중인’으로 간주되었다. 향이를 ‘아전(衙前)’으로 지칭하며 중인으로 간주하는 인식은 아직도 지역사회에 강고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후기 이래 유지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향리가 ‘중인’이 된 원인은 법제적인 조치가 아니라 향리 사회 내부의 변동과 그로 인한 인식의 변화에서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존 연구에서 최상층 직임을 담당한 가계의 구성과 변동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가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최상층 가계의 구성과 변동, 이들이 담당한 직임의 구성과 변동을 살피는 것이 향리가 ‘중인’이 된 원인을 파악하는 데 유효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본고에서는 먼저, 조선후기의 상급 향리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직임들을 확정할 것이다. 이어 『울산부선생안』과 『울산호적』에 근거하여 조선후기 울산지역 상급 향리층의 구성과 변동을 살펴볼 것이다. 『울산부선생안』에서 ‘호장’과 ‘조문기관(뒷 시기에는 기관·부기관 또는 이방·부이방)’을 담당한 인명을 추출하여, 이를 담당한 성씨의 구성과 변화를 살펴볼 것이다. 이어 1609년부터 1870년에 이르는 시기에 작성된 호적을 분석하여 상층 향리 직임을 담당한 성씨 및 가계의 구성과 변동을 확인하고 이에 근거하여 울산 향리 층의 위상 변화를 판단할 것이다. 이는 곧 조서후기 향리의 보편적인 위상 변화를 판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In the latter half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from senior clerks like Ho’jang(戶長) or Gi’gwan(記官), to lower posts like Eui’saeng(醫生, medics) and Seo’weon(書員, scribes), were all called “Hyang’ri(鄕吏),” which essentially meant ‘local clerks.’ Their social class was designated as ‘Jung’in(中人),’ which meant ‘Middle figures.’ Yet until the 17th century, the term “Hyang’ri(鄕吏),” only referred to posts of the former, and their social class was above that of a ‘middle figure,’ so they were even allowed to apply to the Grand national exam(“Dae’gwa, 大科”). Only in the 18th century the term “Hyang’ri” ca,e tp refer to all local or indigenous figures, from top to bottom, serving the regional governing offices. It was only then when their social status was officially designated as “Jung’in(中人).” The “Hyang’ri” circle of the Ulsan region went through a similar transformation, with some local characteristics. Until the 18th century the high-ranking posts were all assumed by members who belonged to the so-called “To’seong(土姓, Local Surnames)” house that hailed back to the Goryeo dynasty period. They were the original “Hyang’ri” figures. But later, some of the renowned houses came to no longer provide figures to fill those high-ranking posts, and some of the commoners rose to the occasion and assumed the highest of those posts’ functions. And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18th century, members whose social statuses were even lower than those of the commoners came to assume highest ranking posts in the “Hyang’ri” circle.
ISSN
1226-8356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95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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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규장각한국학연구원)Korean Culture (한국문화) Korean Culture (한국문화) vol.65/6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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