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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對外征伐 정책의 본격화와 對明意識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during King Sejong’s Reign and Attitude Toward 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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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규철
Issue Date
2014-09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Citation
한국문화, Vol.67, pp. 201-224
Keywords
conquestforeign conquestforeign policyroyal authorityforeign relationship
Abstract
조선초기는 활발한 대외정벌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시기와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대외정벌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역학관계, 대규모 병력과 군수의 확보방안, 작전의 효율성 등 제반 사항을 모두 고려해서 계획을 세워야만 한다. 더욱이 정벌이라는 방식의 공격적 대외정책은 주변국과 대립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정치 · 사회적 위험성이 크므로 쉽사리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정벌 당시의 상황, 정벌을 둘러싼 논의, 정벌 이면의 의도 등을 분석해 본다면,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었던 역량과 대외의식의 실제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5세기 조선의 대외정책은 ‘정벌’로 대표된다. 조선에서 가장 공격적인 대외정책이었던 정벌을 자주 선택했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외부 세력의 행동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으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의 대외정책에 다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기 때문에 정벌이 자주 시행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특히 조선의 대외정벌은 명과의 의견대립을 부를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고, 실제로 명은 조선의 여진 정책들을 견제했다. 이 점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바로 조선의 대명의식이다. 조선의 여진 정책과 명의 견제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자신만의 여진 정책을 고수한다는 것은 사대명분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15세기의 조선은 사대보다는 여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더욱 자주 보였다. 세종의 집권기에는 조선의 대외정벌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시기는 조선의 대외정벌 정책이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되었던 만큼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세종의 집권기 동안 조선이 본격적으로 외부 세력에 대해 정벌을 진행하면서 영향력을 확대시켰던 원인과 의도 등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세종이 정벌을 추진하면서 보였던 국정운영 방식과 이를 통해 나타났던 대명의식의 실제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세종대 파저강 정벌을 처음으로 다뤘던 연구자는 강성문이었다. 그는 파저강의 야인들이 다른 여진 세력과는 달리 조선에 위협적인 세력이 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의 대야인정책의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대마도 정벌 이후 외부 세력에 대한 회유에 집중했지만, 야인들의 빈번한 침입이 조선의 보복적 대응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조선의 파저강 재정벌 역시 야인의 대규모 침입에 대한 대응으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파저야인에 대한 1차 정벌의 결과 압록강 유역 야인에 대한 조선의 우위가 입증되었고, 이에 명이 불만을 품고 李滿住 세력을 비호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조선과 명의 양속관계에 있었던 이만주 역시 조선보다는 중극 측으로 편향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Joseon’s foreign policy in the 15th century can be summarized by conquests. The nation’s frequent conquests were not made in a prompt response to actions by external powers. Such frequent conquests were made possible by Joseon’s careful plans based on its foreign policy. Particularly, Joseon’s foreign conquests could not avoid a confrontation of opinions with Ming, and Ming actually checked Joseon’s policy toward Jurchen. This is what draws our attention to Joseon’s attitude toward Ming, Joseon betrayed its principle of diplomatic policy when it stuck to its own consistent policy toward Jurchen in a situation where Ming checked Joseon’s Jurchen policy. However, Joseon in the 15th century strived to maintain consistency of its Jurchen policy more often than sticking to its diplomatic policy. In this regard, a look at the cause and effect of early Joseon’s foreign conquests and attitudes of Joseon, Ming and Jurchen toward this can more specifically tell us about the true foreign relations in East Aisa in the 14th and 15th centuries. In addition, and examination of overseas and domestic situations centering around Joseon’s conquests and of the Kings and their servants’ attitude toward them can explain what early Joseon’s attitude toward foreign nations and powers meant and how it had changed.
ISSN
1226-8356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9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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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규장각한국학연구원)Korean Culture (한국문화) Korean Culture (한국문화) vol.65/6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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