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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울 공업지역 영등포의 도시 성격 변화와 공간 구성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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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하나

Advisor
전봉희
Major
공과대학 건축학과
Issue Date
2013-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건축학과, 2013. 2. 전봉희.
Abstract
본 연구는 근대 한국 도시가 끊임없이 주변의 미개발지를 포섭하면서 성장해 왔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대하여 실제 도시 변화 과정에서 포함하는 영역, 즉 모도시(母都市)와, 포함되는 영역, 즉 도시의 주변부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의 다양성을 고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고찰하기 위한 대상으로는 수도 서울의 공업지역인 영등포를 선택하였다.
근대기 이전 영등포는 수해가 잦은 저지대라는 특성상 벼농사에 부적합하여 사람이 그다지 살지 않는 한촌(寒村)이었으며 서울 주변부에 자리하지만 한강 이남 지역이라는 입지 관계상 소위 서울의 전통적인 교(郊) 지역에 비하여 서울과의 관계가 희박한 곳이었다.
1900년을 전후하여 경인선ㆍ경부선의 분기점이 되자 영등포는 교통의 요지로 부상하였고, 역전에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후 일본인 비중이 높다는 이유로 군청소재지 지정(1910년), 지정면(指定面) 지정(1917년) 등의 행정적 혜택이 주어지고, 여러 도시시설들이 입지하면서 영등포는 도시적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지정면 지정으로 제한적인 자치가 허용되자 1920년대에는 면(面) 유지(有志)들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도시계획을 수립하는 등의 주도적인 활동이 전개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영등포가 비교적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도시지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비슷한 발전과정을 지니는 대전(大田)이 크게 성장한데 비하여 영등포의 성장은 그에 크게 못 미쳤는데, 이러한 원인은 영등포가 강한 구심력을 지니는 대도시 서울의 주변부에 자리한다는 입지적 한계에 의한 것이다.
한편으로 공장입지에 유리한 여러 제반 조건을 갖춘 영등포 지역을 장래 서울의 공업지역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관료를 중심으로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존재해 왔다. 총독의 추천으로 실현된 1911년 조선피혁주식회사의 입지와 1920년대 경성의 사업가들의 영등포 공장 건설로 영등포는 서울의 공업지역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20년대에 진행된 서울 행정구역 확장 논의에서는 공업지역으로서의 영등포 편입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영등포 편입을 동감하는 의견이 다수였으나, 시기상조론자의 의견이 최종적으로 반영되어 영등포 편입은 유보되었는데, 이는 1920년대 당시 식량 및 원료 공급기지라는 대조선 산업정책 상 공업지역에 대한 필요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취해진 조선공업화정책의 영향으로 소비도시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던 서울도 공업도시화를 적극적으로 의식하게 되었고, 마침 1933년경 일본 독점자본 계열의 대공장 설립이 이어지면서 영등포가 공업도시로 인식되자 때마침 행정구역 확장을 입안 중이던 경성부에서는 처음 계획에서 빠져 있던 영등포 지역의 편입을 급히 결정하였다. 이는 영등포의 편입이야말로 서울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공업도시화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1920년대는 서울 편입을 희망하기도 했던 영등포는 1930년대 대재벌 공장의 진출로 도시 발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경성부 편입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끝내 당국의 방침에 거스르지는 못하고 편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새로 서울의 공업지역이라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 영등포에는 효율적인 공업지역 조성을 위한 도시계획이 서둘러 실행되었다. 그러나 기존에 들어서 있었던 시가지 구조와 기타 시설들의 존재로 공업지역으로서 최대한 효율적인 구성을 취하지는 못하고, 여러 용도지역들이 층(層)을 이루며 뒤섞이는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조성된 영등포 공업지역에는 지가 상승 등의 이유로 토지구획정리사업 이전에 주로 들어섰던 대규모의 공장은 입지하지 않고 공업지역 기본블록을 1~2개 정도 차지하는 중규모의 공장들이 주로 입지하였다. 업종으로는 기존에 우세했던 방적ㆍ식품업 대신 전시체제기(戰時體制期) 영향으로 금속ㆍ기계 등 군수(軍需) 관련 업종들이 주로 입지하게 되었으나, 차지하는 면적, 생산액 비중 등에서는 여전히 경공업이 주도적 업종이었다. 이는 군수 관련 대규모 공장이 입지한 인천(仁川), 부평(富平) 등지와는 차별되는 점인데, 이는 또한 영등포의 성격이 도시계획 이전에 입지한 시설들의 영향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이기도 하다. 도시계획 이전에 영등포 지역의 시가지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상업ㆍ행정 중심인 역전 신시가지와 조선인 중심의 기존 마을들로 구성되는 민족별 거주지 분리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도시계획 시행으로 지역의 대부분이 공업지역화되어 거주 환경이 악화되자,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지역 유지들은 새로운 거주 터전을 경인ㆍ경부선 너머 신길리 방면 구릉지에 찾으면서 새로운 거주지 분리 구성을 지향하였다. 영등포에 시행된 도시계획은 공업지역 조성이라는 목표의 달성 여부에 있어서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이는 일제 혹은 조선총독부의 국책적 의제 실현을 위한 것이었기에 거주 환경에 대한 배려는 희박하였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공업지역으로서의 회복이 비교적 빨랐던 영등포 지역은 남한 최고의 공업지역으로 부상하면서 주변으로 주거지가 확산, 상업기능도 발달하면서 서울 남서부 지역의 중심핵(中心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서울 구시가지의 베드타운으로서 발전한 다른 서울 주변부 지역과 달리 영등포 지역이 비교적 자족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18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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