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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도첩제도(度牒制度) 연구
A Study on the National Approval System for the Buddhist Monk(도첩, 度牒, Do-cheop, Buddhist Monk's Certificate System) in Former Half Period of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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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민순의
Advisor
Vermeersch, Sem
Major
인문대학 종교학과
Issue Date
2016-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도첩(度牒)정전(丁錢)시취(試取)도승(度僧)공도승(公度僧)사도승(私度僧)위람승(僞濫僧)승적(僧籍)승인호패(僧人號牌)승역(僧役)승역급첩(僧役給牒)사장(社長)거사(居士)승군(僧軍)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종교학과, 2016. 2. Vermeersch, Sem.
Abstract
한국불교사상 고려 말(충숙왕 12년, 1325) 처음으로 그 시행이 기록되어 전하는 도첩제도는 기록상의 첫 등장 당시 향리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국가권력의 말단 행정력 관리 차원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공민왕 대에 이르러 도첩발급이 일반인으로 확대되고 정전(丁錢) 징수의 원칙이 추가되면서, 도첩은 국가가 피지배 인민을 대상으로 소유한 노동력 수취권에 대한 합리적 대가로 변형되었다. 고려의 도첩제도를 계승한 조선은 태조 당시 그 적용 대상을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의 인민으로 확대하였지만, 태조 6년(1397)의 『경제육전』 제작과 함께 그 대상은 다시금 양반층으로 축소된다. 이는 조선의 불교정책 기조가 공인교단 소속의 공도승(公度僧)을 중심으로 영위되기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다.
『경제육전』 체제의 도첩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태종 대에는 제도적 원칙을 엄수하기보다 오히려 기존 승려들의 무도첩 현황을 구제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기성 교단에 대한 관리와 우대에 보다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태종의 불교정책이 교단의 경제적 정비 및 공인교단 통제 관리에 중점을 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소수의 핵심 공인승을 중심으로 국가와 교단 간의 유착을 한층 공고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세종 대는 『경제육전』 체제의 도첩제도가 조정 내의 숱한 논의를 거쳐 완비되어 간 과정이자 그 최종적 법조문이 완성 도출된 시기로서, 선왕에 비해 한결 선택과 집중이 강화된 방식으로 공인교단을 관리함과 동시에, 양반을 대상으로 오승포 100필의 정전을 징수한 뒤 도첩을 발급하는 것으로 그 법제를 최종 정리하였다. 그러나 공인 외의 사찰에 대해서는 배제 방치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향후 경제적 악조건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사찰들이 시속에 기층하는 민간유착적 종교세력으로 활동할 것임을 예견케 했다. 한편 고려시대의 국가주도적 승적(僧籍) 관리제도는 조선에 계승되지 않았다. 이에 승려의 이동을 통제하고 제한하려는 목적 하에 세종 대에 잠시 각 지역의 사찰을 중심으로 소속승려들의 승적을 제작‧관리‧보관하도록 하기도 하였으나, 이내 이 정책은 폐기되어 세조 대 승인호패(僧人號牌) 제도를 통한 승적관리의 재개를 기다리게 된다.
세조 대는 『경국대전』 체제로 도첩제도가 급격하게 변화되던 시기였다. 이 당시의 도첩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도첩발급 대상의 전 계층으로의 확대와, 도첩발급의 시점을 출가 후 3개월~1년 이내로 상정함으로써 도첩취득 이전의 승려 즉 사도승(私度僧)의 존재를 국가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인정하게 한 점이다. 예종 대에는 세조 대에 완화되었던 도첩발급의 조건이 일시 강화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대에 들어 다시 세조 대의 제도를 회복하였다. 한편 세조 대 도첩제도의 큰 특징으로 거론되는 승인호패는 승적제도의 변용이라는 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승인호패는 전국의 승려 전수에 대한 국가권력의 집권적인 파악과 통제에 주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대에는 일련의 『경국대전』 개정 반포를 통하여 도첩제도가 차차 법제적으로 완비되어 갔다. 결국 성종 16년(1485) 『경국대전』의 최종 확정에 따라, 「예전」 도승 조항의 도첩제도 역시 송경(誦經)의 시취(試取, 『심경』 『금강경』 『살달타』)와 정전 징수(정포 20필)라는 『경제육전』 체제의 오랜 관행을 계승하는 한편,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전 인민에 대한 도첩발급의 확대와 출가 후 도첩취득(승려 자원자나 그 보호자가 출가 후 3개월 이내에 선종이나 교종에 신고함으로써 도첩취득)을 통한 국가의 사도승 인정이라는 세조 대 도첩제도의 신경향을 고스란히 반영하여 정착되었다.
그러나 도첩제도는 이내 폐지의 과정을 밟게 된다. 사림 출신의 신진사대부에 의해 강력히 주장되었던 도첩제도의 폐지는 성종 23년(1492) 도첩발급을 잠정 중단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하지만 이는 도첩제도의 영구 폐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군액의 충분한 확보 때까지를 전제로 한 도첩발급의 한시적 중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도첩제도의 실질적인 폐지는 중종 11년(1516) 『경국대전』 인출 시 도승 조항의 삭제로써 최종 확정되었다. 그런데 이는 왕실의 각종 불교관련 의례 폐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왕실의 불교형식 상제례(喪祭禮) 폐지와 함께 더 이상 그것을 집전할 고급 승려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필요하지 않게 되자, 도첩제도 역시 큰 고민 없이 최종 폐지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명종 대에 문정대비의 강력한 의지로 불교중흥의 정책이 시작되자, 도첩제도도 다시금 복설되었다. 신료들의 전면적인 반대와 태업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으로 진행되었던 명종 대의 도첩제도는, 전국 도처에 존재하는 내원당(內願堂)의 관리 인력 확보라는 점에서 왕실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사망과 함께 도첩제도를 비롯한 일체의 불교부흥 정책은 다시금 폐지되었으며,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두 번 다시 도첩제도는 부활하지 않았다.
한편, 세종 대는 세조 대와 더불어 도첩제도의 정비를 위한 논의와 노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그 결과 세종 대에는 『경제육전』 체제의 도첩제도가 완비되었고, 세조 대에는 『경국대전』 체제의 도첩제도에 대한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도출되었다. 그리고 국가가 주도하여 정비한 도첩제도는 어느 것이나 국가공인 교단에 소속된 공도승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서, 그 모두가 국가의 교단통제와 활용이익을 목표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의도의 착종과 새로운 종교적 분위기의 단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누출되었으니, 도첩발급을 전제로 한 승역(僧役)의 국가 활용 이른바 승역급첩(僧役給牒)이 그것이다.
세종 11년(1429)에 흥천사 수리공사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승역급첩은 당초 교단 자체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이를 승인한 세종의 초기 의도는 교단에서 필요로 하는 도첩승의 양산과 그로 인한 원활한 교단의 국가관리 및 통제에 있었다. 그러나 기타 공관의 영선공사에도 승역을 이용하고 도첩을 발급하면서 도첩승의 숫자는 통제가 불가하게 늘어났고, 도첩발급을 전제로 한 국가의 승역 징발은 일반적인 관례인 양 인식되기까지 했다. 승역급첩의 변용은 세조 대에 이르러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민간의 사도승 또는 위람승(僞濫僧)에게까지 도첩이 유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결과 사장(社長)이라는 새로운 민간의 종교세력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 세력은 예종과 성종 대를 거치며 더욱 성장하여, 결국 국가권력에 의해 민간의 신흥 종교세력으로 인정되기에 이른다. 후에는 거사(居士)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리기도 하였다. 이들의 번성에 영향을 받아 성종~중종 대의 불교는 이전과는 달리 통속적 민중친화적인 모습을 띄기 시작했으며, 조정에서는 승려의 취처(娶妻) 문제가 전에 없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사장을 중심으로 한 민간의 신흥 종교카리스마가 기존의 불교승단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한편 도첩제도의 공식 폐지 이후로도 중종 대에는 대규모의 국가공사에 승역이 투입되고 그 대가로 이미 폐지된 도첩 대신 승인호패가 발급된 바 있으며, 명종 대에는 을묘왜변(1555, 명종 10년)에의 승군(僧軍) 투입을 계기로 마침내 승역이 군사적 용도로써 상설화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When the monk's certificate(do-cheop) system, the national approval system for the Buddhist monk, was first recorded to be enforced in the end of Goryeo dynasty(in the 12th year of the reign of king Chung-suk), the purpose of the system was to manage the terminal officials of the nation. As the monk's certificate became to be expandedly issued to the common people and the cost for it(정전, 丁錢, jeong-jeon) was formulated in the reign of king Gong-min, the function and the character of the monk's certificate was changed as the reasonable requirement of the nation for giving up the right of collecting taxes from the people that would be a monk because the monks were exempted from taxation in the period. Joseon dynasty, succeeding Goryeo in many fields of system and institution, issued the monk's certificate to all the people from yang-ban(양반, 兩班, the upper classes of Joseon) to the lowly at the time of the foundation of the country, but immediately the issue was restricted only to yang-ban again when Gyeong-je-yuk-jeon(『경제육전(經濟六典)』), the first code of laws of Joseon, was published in the 6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Tae-jo(1397), who was the founder and the 1st king of Joseon. The change was related to the fact that Joseon had decided to control Buddhist saṅgha with the official monks approved by the national power(공도승, 公度僧, gong-do-seung) as the central figure.
In the reign of king Tae-jong(the 3rd king of Joseon and the son of the king Tae-jo), when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under the control of Gyeong-je-yuk-jeon was run in full-scale, the national power concentrated on the management and the favorable treatment of the existing Buddhist Order through the relief for the monks without the monk's certificate. It was related with the policy for Tae-jong to concentrate on the control of Buddhist economy and the management of the legitimate Buddhist Order, which was for the strong alliance of the nation and the Buddhist Order with a small number of official monks as the central figure. In the reign of king Se-jong(the 4th king of Joseon and the son of Tae-jong),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under the control of Gyeong-je-yuk-jeon was being put in good order through abundant discussions in the Court and the last provisions of the code were finally completed. Se-jong controlled the legitimate Buddhist Order according to the more stronger way of selecting and focusing the monks and the temples proper to the national usage than his father, while he decided for only yang-ban class to become the official monks(gong-do-seung) by charging 100 rolls of cloth as the cost for the monk's certificate(jeong-jeon). But he neglected nonofficial temples, so those temples surviving economic difficulties would act as centers of illegitimate folk religious powers in existing among the lower people afterward. Meanwhile Se-jong tried to make, manage and deposit the register of Buddhist monks(승적, 僧籍, seung-jeok) in the local temples and the government agencies for the purpose of the control and the restriction of monks' movements, although the monastic register system carried out by the nation-leading activity in Goryeo dynasty had not been succeeded to Joseon dynasty. But sooner or later the decision of Se-jong was canceled and another monastic register system was retried in the reign of king Se-jo(the 7th king of Joseon and the son of Se-jong) under the cloak of the census registration or the identity tag system for monks(승인호패, 僧人號牌, seung-in-ho-pae).
In th reign of Se-jo,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was changed from under the control of Gyeong-je-yuk-jeon to under that of Gyeong-guk-dae-jeon(『경국대전(經國大典)』), the second code of laws of Joseon. The most important points of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in those days were the next two. One was the expansion of the target class in the issue of the certificate from yang-ban to all the classes. The other was the inevitable recognition of nonofficial monks not having been approved by the national power(사도승, 私度僧, sa-do-seung), which was occurred because monks wanting the certificates became to have to apply within 3 months~1 year after entering the priesthood. King Ye-jong(the 8th king of Joseon and the son of Se-jo) made the condition and process of issuing the monk's certificate more difficult, but king Seong-jong(the 9th king of Joseon and the grandson of Se-jo) made that easier again like in the reign of Se-jo. On the other hand, the census registration or the identity tag system for monks(seung-in-ho-pae), which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peculiarities in the reign of Se-jo, should be considered as the transfiguration of the register system for buddhist monks(seung-jeok) carried out in the reign of Se-jong. The monastic identity tag system seemed to be tried for grasping the whole number of monks in the country and controling all the monks by the national power. During the reign of Seong-jong,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was gradually being perfected through three times of revision of Gyeong-guk-dae-jeon. In the end, as Gyeong-guk-dae-jeon was finally confirmed in the 16th year of the reign of Seong-jong(1485),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was also settled on the clause becoming Buddhist priest in Gyeong-guk-dae-jeon like the next. One, the applicant for the official monk had to pass the test(시취, 試取, shi-chui) of 3 kinds of Buddhist canon(Vajracchedika Prajñāpāramitā Sūtra 『금강경(金剛經)』, Prajñāpāramitā hridaya-Sūtra 『반야심경(般若心經)』, spells of Shūrangama-Sūtra 『살달타(薩怛陀)』). Two, the one who had passed the test had to pay 20 rolls of cloth as the cost for the monk's certificate(jeong-jeon). Three, all the classes were open to the issue of the monk's certificate from yang-ban to the servants(노비, 奴婢, no-bi). Four, the one wanting the monk's certificate had to apply for the issue(obtaining the certificate) within 3 months after entering the priesthood, which made the national power inevitably recognize the existance of the nonofficial, precisely pre-official, monks. The former two articles succeeded the customs under the control of Gyeong-je-yuk-jeon, while the latter two reflected the new trends and policies during the reign of Se-jo.
However, no sooner was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settled than it underwent the process of abolishment. As a party of young new-come officials of Sa-rim origins(사림, 士林, gentry class that appeared from provinces in the middle period of Joseon) insisted severely the abolishment of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Seong-jong agreed partially with them and decided the temporary interruption of issuing the monk's certificate in the 23rd year of his reign(1492). But the decision was just a temporary interruption to any extent, not the eventual abolishment, and it was because of the shortage of military soldiers in the frontier provoked by the invasion of northern race called Yeo-jin. The actual abolishment of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in Joseon dynasty was in the 11th year of the reign of king Jung-jong(the 11th king of Joseon and the son of Seong-jong)(1516), in which year Jung-jong decided to delete the clause becoming Buddhist priest from Gyeong-guk-dae-jeon. The decision seemed to be related to the tendency of abolishment of several Buddhist-moded ceremonies in the royal family. Especially the serial abolishments of some royal funeral ceremonies of Buddhist style in the reign of Yeon-san-gun(the 10th king of Joseon and the 1st son of Seong-jong) and Jung-jong made the technical monks for the ceremonies unnecessary, and then the situation seemed to lead to the easy decision of the abolishment of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In the reign of king Myeong-jong(the 13th king of Joseon and the son of Jung-jong),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was revived by queen regent Mun-jeong who was the mother of Myeong-jong and a faithful buddhist laywoman. In spite of the strong opposition of officials the revived monk's certificate system was forcefully promoted by the king and his mother queen, for that was the necessary project to manage many temples around the country which was related to royal family. When the queen died, however,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was again abolished with other policies related to Buddhist, which would never be revived once again by the time of the fall of Joseon.
The debates and the efforts for setting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in good condition and fixing it were generally the most active in the reign of king Se-jong and king Se-jo. As a result of that,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under the control of Gyeong-je-yuk-jeon was completed during the reign of Se-jong, while the system under the control of Gyeong-guk-dae-jeon was proposed in basic ideas during the reign of Se-jo. Anything of the two was planned for the official monks formally approved by the national power, and was intended to control and make use of Buddhist Order. Nevertheless, new religious atmosphere appeared unexpectedly, which is through issuing the monk's certificate instead of the national requisition for the monks' labor(승역급첩, 僧役給牒, seung-yeok-geup-cheop).
The first example of issuing the monk's certificate at the cost of his labor was applied to the repair of a Buddhist temple Heung-cheon-sa in the 11th year of the reign of Se-jong(1429), which was requested by the Buddhist Order itself, not the national power. Se-jong accepted the request, for he intended to guarantee the enough monks necessary to the Buddhist Order and to manage and control the Order smoothly by that. But as the nation used the labor of monks for other repair of official buildings with issuing the monk's certificate, monks gaining the certificates increased, and it caused the common awareness that the recruit of monks for the labor by national power was rather customary. The tendency like that became so more general in the reign of Se-jo that the monk's certificate got to spread to nonofficial monks and even pseudo monks(위람승, 僞濫僧, wi-ram-seung). As a result of that, a new religious crowd called Sa-jang(사장, 社長), which was also called Geo-sa(거사, 居士) later, showed up in the lower class of people. They grew larger and more powerful through the reign of Ye-jong and Seong-jong, so the national power became to recognize them obviously as a newly-rising religious power in the folk. Under the influence of the growth of Sa-jang, the Buddhism and Buddhist monks began to have more popular and familiar character and image in the reign of Seong-jong to Jung-jong, and the matter of monks having their own wives became an important agenda in the Court. It was the result of influence that the new religious charisma in the common people had caused to existing Buddhist Order. On the other hand, in spite of the official abolishment of the monk's certificate system, the labors of monks were put into the national work with large scale in the reign of Jung-jong at the cost of issuing the monastic identity tag(seung-in-ho-pae), not the monk's certificate. In the 10th year of the reign of Myeong-jong(1555), the troops of buddhist monks had a rather military roles in the battles with Japanese pirates(을묘왜변, 乙卯倭變, eul-myo-oe-byeon), and this experience made the opportunity that the labors of monks finally began to be organized and constantly established for military function, which was named the military monks(승군, 僧軍, seung-gun).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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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Religious Studies (종교학과)Theses (Ph.D. / Sc.D._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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