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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人民共和國 도시주민 조직 방식의 형성 : 일본 점령기에서 건국 초기(1937-1954)의 北京을 중심으로
中华人民共和国城市居民组织方式的形成 : 以从日本占领时期到建国初期(1937-1954)的北京为中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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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윤형진
Advisor
金衡鍾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4-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建國 初期街道居民委員會工會住民組織積極分子黨治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4. 8. 金衡鍾.
Abstract
本稿는 中華人民共和國 건국 초기 도시주민의 조직 방식이 성립되는 과정에 대한 탐색이다.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국가 구성원을 조직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독특한 방식을 中國共産黨이 가진 조직에 대한 경험과 전망이 이전 정권들이 남겨놓은 유산 및 도시의 현실과 부딪치면서 만들어 낸 역사적 형성물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표준화된 주민조직인 街道居民委員會, 그리고 건국 초기에 單位 조직에 선행하여 직업을 기반으로 한 주민조직의 기능을 수행했던 工會를 분석한다. 양자의 통합적인 파악을 통해 中共이 도시주민을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선택과 타협의 결과 조직 방식의 이원적 구조가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밝힐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전후로 한 도시의 기층 통치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연속성은 바로 경찰의 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찰의 말단 기구인 派出所가 도시의 기층 통치를 담당하고, 특히 戶政의 담당기관으로서 인구관리를 주관하는 구조가 근대적인 경찰 제도가 도입된 淸末부터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의 점령과 국민당이 다시 北京을 접수하는 과정에서도 경찰 기구의 인적 구성이나 조직구성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1947년에 국민당 정권이 市政府 산하에 民政局을 설치하고 경찰국의 戶政 부문을 이관했던 것은 새로운 변화였으나, 中共이 接管 시기에 戶政을 公安局에 이관시킴으로써 짧은 예외상태로 끝나게 되었다. 또한 接管 이후 인력과 경험의 부족으로 기존 경찰 인원을 留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공안 기구의 하층에서 기존 경찰들이 업무 능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黨治의 원칙 역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전후로 도시 기층 통치에서 나타나는 연속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건국 초기에 나타났던 지도문제를 둘러싼 당조직 계통과 공회 계통의 혼란은 단지 운영상의 혼란이 아니라 조직원리 자체의 문제였다. 또한 업종별 단체협약의 추진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市總工會를 중심으로 한 공회 계통이 추구하던 목표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본 점령기의 공백을 전후로 北京의 工會 조직은 대부분 國民黨이 조직한 것이었다. 업종별 공회의 조직, 업종별 전국조직, 업종별 전국조직의 연합으로서의 전국총공회 조직 등을 노동조직에 관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던 국민당의 방침은 이후에 中國共産黨이 추구했던 노동조직의 원칙과 유사한 것이었다. 국민당이 추구하는 노동운동의 방향 역시 黨團 조직을 바탕으로 주로 파업의 금지나 勞資紛糾의 방지를 지향했다. 적어도 당-국가와 공회의 관계에 있어서는 1949년 전후에 뚜렷한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점령 당시에 北京의 城區에는 郊區의 保甲과 같은 기층 주민조직이 없었다. 1939년이 되면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城區에서도 街巷公益會라는 명칭의 주민조직이 편성되었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일본의 町內會에 해당하는 조직을 만들라는 일본군 사령관의 지시가 있었다. 1940년 하반기에는 좀더 체계적인 자치조직의 계통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고, 이때 街巷公益會는 坊으로 재편되었고 하급조직인 里도 편성되었다. 점령 후기에는 新民會가 체제를 개편하면서 지역별 기층 주민조직의 운영에 개입하기도 했다. 국민당은 復員 이후 北京에서 자치조직의 개편을 실행했지만, 坊里에서 保甲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주민조직의 구조는 대체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 保甲長의 선발이나 書記의 임명을 보면 保甲 조직이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이후 中共이 北京을 接管한 이후에 기층 주민조직을 관리하는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中共의 接管 이후 기층의 행정 기구는 街政府의 건립과 취소를 거친 이후 몇 년 동안 현상을 유지하였고, 주민조직은 保甲 조직이 철폐된 이후 통일된 형식이 확립되지 않은 채 다양한 조직이 병존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脫産幹部로 이루어진 국가기구와 공장, 학교, 기관 등 각종 單位에 포함되지 않고 일상을 영위하는 北京의 주민들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로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積極分子들이었다. 中共은 이전의 정권들이 주민조직을 통해 도시주민을 관리했던 방식과 달리 坊里長이나 保甲長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적극분자층 전체에 대해서 세밀하게 파악하고 관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3년 여의 시간이 지나면서 1949년의 接管 시기에 만들어진 기층 행정 기구와 주민조직의 운영 방식은 民政 사무 처리의 취약성이라든지 소수 적극분자들에 대한 과도한 부담 등의 문제점을 노출하기 시작하였고, 1952년 하반기부터 이러한 문제점에 대응하여 街道居民委員會와 街道辦事處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장기간 지속되는 국가기구와 주민조직의 연계방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街道居民委員會의 설립은 中共의 도시주민 조직 방식이 직업단체를 통한 통일적 조직이라는 틀에서 직업별 조직과 지역별 조직이라는 양대 축의 병존으로 선회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일본의 점령과 함께 국민당이 주도하여 결성한 공회 조직은 와해되었다. 일본 점령기 北京에서는 자발적인 노동조직의 결성이라든가 노동자들의 활동은 최대한 억제되었으며, 新民會의 職業分會나 勞工協會, 그리고 華北勞工協會와 같은 노동조직은 주로 노동력의 파악과 징발을 위한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점령기에 상층에서 노동통제를 담당하는 기구와 방식에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난 것과는 대조적으로, 기층에서의 노동자 관리와 확보에 있어서 주로 전통적인 노동청부 방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국민당은 戰後에 北京에서 北平市總工會를 중심으로 각 업종별 공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北平市總工會는 시 전체의 노동조직을 포괄하는 조직이 아니었으며, 市黨部에서는 포괄적인 조직을 만들려는 의도도 없었다. 국민당은 기층 조직의 정비에 소극적이었으며, 공회가 있는 기업에서도 기층에는 노동자와 경영자 사이에 매개층의 존재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中共은 北京에서 接管 이후 市總工會를 정점으로 하는 공회 조직의 건설을 추진하면서 처음부터 업종별 조직을 만든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도시주민의 조직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공회는 도시주민의 주요한 조직 형식으로 상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공회의 조직에는 한계가 있었고 공회로 조직된 도시주민의 다수도 분산되어 있었다. 五反運動은 사영 기업에서 공회 조직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영 기업 및 공회에 대한 중공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분산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태에서 당과 市總工會의 사영 기업 공회에 대한 개입이 강화되면서, 공회 계통의 조직구조 문제가 제기되었고 결국 공회의 조직 원리의 적용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즉 區 이하의 공회 조직이 업종별 조직에서 지역별 조직으로 바뀌었다. 지역을 단위로 하는 직업조직의 건설은 중공의 통치 하에 등장한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는 공회라는 형식을 통해서 도시주민을 조직한다는 중공의 방침이 현실적 조건과 타협하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공회라는 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지역에 따른 조직이라는 원리를 끌어들인 것은, 街道居民委員會 및 街道辦事處의 설립과 궤를 같이 하는 변화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기층 통치에서 경찰의 위상, 당이 공회를 비롯한 대중조직을 지도한다는 원리, 도시주민 조직의 이원적 구조 등은 모두 현재에도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도시주민 조직 방식은 건국 초기에 중공의 조직 구상과 도시의 현실이 부딪치면서 이루어진 타협과 조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형성과정에서 중공은 직업별 조직과 지역별 조직 양쪽 모두에서 이전 정권들에 비해 더 체계적이고 당과 국가의 의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건국 초기에 만들어진 이러한 조직구조는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시기의 대중운동과 정치적 혼란,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체제의 전면적 재편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됨으로써, 흩어진 모래에 비유되곤 했던 중국사회에 조직적인 안정성을 부여하였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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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Ph.D. / Sc.D.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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