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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 고구려 국가제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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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강진원

Advisor
송기호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5-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제천대회시조묘친사/친제묘제종묘제종묘 개편무덤 중시 풍조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5. 2. 송기호.
Abstract
國家祭祀는 국가권력의 주도 아래 치러짐에 따라, 그 격이 높아진 제사를 말한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국가제사로는 祭天大會와 始祖廟 제사, 墓祭와 宗廟祭 등이 있다.
祭天大會는 國都 동쪽에서 거국적인 會合이 이루어짐에 따라 東盟으로 불리었는데, 이때는 시조전승이 재연되었다. 고구려에서는 祖上神을 天神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시조에 대한 치제는 제천의례로 여겨졌다. 애초 이 의례는 桂婁部의 族祖祭였다. 그러나 2세기 후반 國相이 설치되는 등 왕권이 강화되고, 시조묘 親祀로 朱蒙이 국가적 시조로 거듭남에 따라, 전 지배층이 주몽의 神威에서 기인하는 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국가제사로 치러지게 되었다. 단 이때만 해도 아직 집권력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여타 지배집단들은 회합 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4세기 중․후반 이후 점차 왕권이 강해지고 중앙집권체제가 성립함에 따라 이러한 측면은 약화된다. 대규모 집회(大會)가 이루어졌음에도 東盟이라는 명칭이 사라진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제천대회는 시조의 탄생을 재연하는 순연한 의례로서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때도 고구려는 조상신과 천신을 구분하지 않았으므로, 南郊祭天과 같은 중국식 제사는 수용되지 않았다.
7세기에 이후에는 여러 신격을 合祀하게 된다. 이는 통일제국과의 긴장관계와 피폐된 여건 등으로 인하여 가중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왕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신들을 치제한 것이다. 당시 왕의 권한은 제한적이었으나 종교적 권위는 유지되었기에, 합사가 가능하였다. 귀족세력 입장에서도 국왕의 권위에서 나오는 구심력을 통하여 어려움을 무마시키고 기득권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에, 여기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始祖廟는 始祖王陵과 상통하는 개념으로, 그 치제는 墓祭의 일환이었다. 시조묘가 遷都에도 불구하고 줄곧 卒本에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애초 시조묘는 계루부의 族祖 주몽을 제사지내는 곳이었으며, 국가제사로 치제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대략 2세기 후반이었다. 이로 인하여 종래 계루부의 전설적 시조였던 주몽은 고구려 국가의 시조로 거듭났다.
시조묘 친사는 2세기 후반~4세기까지의 前期 親祀와 6세기 전반 이후의 後期 親祀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친사는 대개 즉위의례로서 기능하였다. 왕위계승자(太子)의 위치가 확고하지 못하였던 상황 속에서 잠재적 불만세력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원활한 통치를 도모하는 데 일조하였다. 치제는 9월과 2월에 행해졌다. 9월은 주몽이 죽었다고 전해지는 달로, 시조의 죽음이 풍요를 초래하였다는 믿음에서 이 달에 치제된 것이었다. 2월 치제도 주몽의 神威에 기대어 풍작을 기원하고자 하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당시 시조에게 農耕神으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하교나 임명 등의 여러 정치행위들도 이루어졌는데, 제사에서 드러나는 신성한 권위의 힘을 빌려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시조묘 친사 기사는 5세기를 전후하여 나타나지 않고 있고 있다. 이는 조상제사의 중심이 무덤에서 종묘로 옮겨진 결과, 즉위의례 또한 종묘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이후 나타나는 후기 친사는 정국 쇄신을 도모하던 왕들에 의해 特禮로서 행해졌다. 시조묘 친사는 시조의 神性을 왕이 직접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고, 행행으로서의 성격도 강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하는 국왕들은 이를 중시하였다. 치제는 4월에 행해졌는데, 신성성이 보다 많이 개입된 시조의 탄생을 죽음보다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4~5세기를 거치며 주몽의 위상이 농경신을 뛰어넘어 天帝之子로 확고히 자리한 결과이다.
墓祭와 宗廟祭의 양상은 4세기 말 종묘 개편을 전후로 시기를 나눌 수 있다. 종묘 개편 이전에는 종묘의 위상이 왕릉에 비해 높지 않았고, 왕릉에서의 묘제가 보다 중시되었다. 따라서 이때는 조상제사의 중심이 무덤에 있었다. 즉위의례가 시조묘에서 행해지고, 제의 공간이 정비되어간 배경도 거기에 있다. 당시는 肉體魂 관념과 繼世思想의 영향이 강하여 죽은 이의 영혼이 주로 기거하는 곳을 무덤이라 여겼기에, 그 치제도 중시되었다. 종묘는 고구려 국가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계루부 왕실의 제장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종묘는 왕실만의 배타적인 건축물이 아니었기에, 沸流那部 등에서도 그것을 둘 수 있었다.
그런데 4세기 후반 이후 점차 변화가 일어났다. 불교 전파로 轉生思想이 확산되고 自由魂 관념이 퍼졌으며, 유교 문화에 대한 이해가 증진됨에 따라 무덤 중시 풍조는 약화 일로를 걷게 된다. 또 대외적인 위기의 지속 등으로 인해 무덤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반대로 혈연적 계보관념의 강화에 의해 그 계승관계를 명확히 드러내기 좋은 종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결과 묘제가 침체되고 종묘제가 부상하였으며, 이를 반영한 조치가 종묘 개편(修宗廟)이다.
이후 묘제는 위상이 약화된 반면, 종묘는 비중이 커졌고 다른 세력이 그것을 건립하는 것이 불허되었다. 이때의 종묘는 世室, 즉 不毁之廟를 갖추고 位次論에 근거하여 신주가 안치되는 등 유교적 방식에 한층 근접한 형태였다. 그러나 禮制에 부합하지 않는 朱蒙祠(朱蒙廟)가 말기까지 유지되기도 하는 등 유교적 예법에 크게 구애받지는 않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고구려 국가제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다만 그러한 변화는 외래 문물의 무비판적인 수용 결과는 아니었고, 고구려 내부에서 싹튼 여러 요인들에 기인하였다. 제천대회에서 회합적 측면이 약화된 것이나, 무덤 중시 풍조가 변화한 것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또 재래의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기보다는 지속해나가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종묘 개편 이후 묘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기존의 天 관념을 유지해나간 것이 그 일례이다.
요컨대 고구려 국가제사의 특징은 주체성과 연속성이라 하겠다. 따라서 4세기 후반 이후 중국 문물이 대거 유입됨에 따라 국가가 일변했다고 보는 입장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 고구려는 지배층의 교체라든가 큰 변란 없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역사가 전개되었다. 또 중국 왕조와의 교류가 이른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 결과 외부로부터의 충격 못지않게 내재적인 요구에 따른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며, 아울러 기존 토대가 일정 정도 지속되었다고 여겨진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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