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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私田 혁파와 토지제도 개혁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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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민우

Advisor
김인걸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5-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私田公田私田 혁파科田法所耕田佃客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5. 8. 김인걸.
Abstract
私田을 혁파하는 고려 말의 개혁은 私田主의 收租權을 부인하고 경작 농민을 기반으로 토지제도를 재건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私田을 혁파하고 科田法을 제정하는 토지제도 개혁 과정은 곧 새로운 국가인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고려 말 토지제도 개혁을 주도한 鄭道傳·趙浚 등은 조선 건국의 주체로 활약하였으며, 새로운 토지제도에는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들의 理想이 구현되었다. 고려 말에 새로 제정된 토지제도는 조선 건국 이후로 계승되었고, 조선 초기 경제적 현실은 고려와는 전혀 다른 제도적 조건 아래에서 전개되었다.
고려시대 토지제도는 토지를 일정한 단위로 묶은 田丁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 私田은 국가가 職役에 따라 田丁을 개인에게 분급한 것이었다. 국가로부터 田丁을 받아 이를 기반으로 국가가 부과한 職役을 수행하는 사람이 私田의 主人이었다. 국가와 私田主의 관계에서 田丁은 토지와 직역의 결합이었다. 한편 田丁을 구성하는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은 私田主와 함께 직역 수행 단위인 丁戶를 이루었다. 私田主와 경작 농민의 관계에서 田丁은 토지와 인구의 결합이기도 하였다.
고려 私田은 역사적으로 新羅의 국가 권력이 붕괴된 이후 등장한 지방 호족들의 토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에서 기원하였다. 고려 토지제도는 국가가 지방 호족들의 토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를 국가의 법적 형식으로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성립하였다. 국가는 지방 호족들을 국가의 관직자로 전환시키는 한편, 관직 수행을 대가로 이들의 영역적 지배를 토지에 대한 收租權으로 제도화하였다. 직역을 매개로 하여 토지와 농민을 결합한 田丁에 대해 收租權을 부여하는 私田의 제도적 형태는 국가기관과 농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 私田에 대한 私田主의 收租權은 고려시대 토지에 대한 유일한 법적 권리였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지배층의 정치적 혼란과 몽골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고려 토지제도의 기반인 田丁이 점차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사회적 권력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농민들이 몰락하면서 가장 취약한 私田인 軍人田으로부터 토지와 인구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전쟁 직후 開墾의 필요성으로 확대 지급한 賜牌田은 職役과 무관한 토지로써 私田主들이 田丁으로부터 이탈한 농민들을 사적으로 은닉하고, 토지와 인구가 분리되어 亡丁으로 전락한 토지를 겸병하는 기반이 되었다. 국가와 농민에 대한 私田主의 권한은 점차 강화되어 이들은 국가와 무관하게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田丁을 복구하고자 하는 고려 정부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여러 차례에 걸친 田民辨整은 私田主들 사이의 권리 다툼을 낳았고, 이는 농민에 대한 사전주들의 중복 수취로 이어졌다. 고려 말 私田 문제는 국가가 토지와 농민에 대한 私田主의 현실적 지배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국가는 토지와 인구의 분리를 인정하고 현재 상태의 토지와 인구를 가능한 정확하게 파악하여 부세 수취의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私田主를 가리는 원칙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私田主들 사이의 다툼과 농민에 대한 과잉 수취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를 중심으로 정도전·조준 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고려 말 私田 문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私田이야말로 당시 토지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목하면서 私田을 혁파하는 토지제도 개혁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私田을 혁파하자는 주장은 私田을 祖宗 法制로 여기는 고려사회에서 매우 낯선 것이었다.
고려 후기 이래로 중국으로부터 古文의 문제의식이 수용되고 있었고, 고려 지배층 사이에서 古代의 제도와 문물에 대한 관심이 성숙하고 있었다. 사전 혁파론자들은 그 가운데에서도 古代의 이상적인 제도를 고려 사회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사전을 혁파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당시 고려의 토지 문제에 대한 현실적 비판인 동시에 古代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실현하려는 목표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公田으로 인식하였는데, 이들이 재인식한 公田 이념은 토지제도는 본래 사람을 기르는 것이며, 仁政의 기초가 된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이들의 고려 私田에 대한 비판은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을 포괄하였다.
고려 말 사전 혁파론자들이 제시하는 私田에 대한 비판은 公田 이념에 대한 재인식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私田을 혁파하자는 주장은 모든 토지를 국가에 속한 公田으로 인식하면서 고려 말 私田主가 갖고 있는 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부인하고, 국가가 私田 내부의 경작 농민을 직접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고려 말 토지제도 개혁 과정은 사전을 혁파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국가가 각종 재정의 소요처에 토지를 재분배하는 제도를 정비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되었다.
고려 말 토지제도 개혁이 科田法의 제정으로 귀결되었다는 이해는 私田을 혁파하는 것이 개혁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사전을 혁파하는 조치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국가가 기존 私田 내부에서 토지를 경작하는 農家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여 이들에게 佃客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는 점이었다. 국가는 전국의 모든 토지를 佃客이 경작하는 所耕田으로 규정하여 所耕田을 토지 파악의 기본 단위로 삼는 한편, 개별 전객 농가를 戶로 파악하여 國役 편성과 賦稅 수취의 대상으로 편성하고자 하였다.
所耕田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경작하는 토지라는 의미이지만, 私田을 혁파하는 조치 이후로는 토지와 관계된 유일한 제도적 관계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所耕田에 대한 전객의 권리는 당연히 토지를 경작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차지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전객은 경작을 전제로 하는 한에서 국가로부터 확고하게 소경전에 대한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았다. 국가는 토지와 관계된 모든 행정을 전객의 소경전을 중심으로 제도화하였다.
사전을 혁파한 고려 말 이래로 국가는 단기간에 걸쳐 민간의 토지를 거두어들여 다시 지급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경작하지 않고 토지를 차지하는 행위와 자기 가족의 노동력 규모를 넘는 토지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에게 병작을 주는 행위를 금지하는 한편, 토지가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들에게 직접 경작할 토지를 지급하는 조치를 수시로 실시하였다. 또한 토지가 부족한 下三道의 인구를 인구가 부족한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직접 마련해 주었다. 전객을 파악하는 기본 형태는 시기에 따라 달라졌음에도 토지와 인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은 지속되었다.
모든 토지가 전객이 경작하는 所耕田으로 규정되는 한편, 관직자층을 우대하는 조치로 京畿에 한하여 科田이 지급되었다. 과전은 고려 말 私田 혁파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보충하는 동시에 관직자층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과전은 소경전에 대한 전객의 권리를 기본으로 하여 단지 국가로부터 收租權을 위임받은 토지였다. 모든 토지가 所耕田으로 규정되면서 국가로부터 받은 과전은 所受田으로 불렸고, 과전을 받은 관직자는 受田者라고 하였다.
국가가 정상적으로 토지를 지급하지 못했던 고려 말의 상황을 고려할 때, 科田을 새로 지급하는 조치는 경제적으로 매우 큰 특혜였다. 그러나 전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私田을 京畿로 집중시켰다는 사실은 단순히 수조권 지급 지역의 변경이라기보다는 수조권이 가지는 사회적 성격 자체가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과전을 경기에 한해 지급한 조치는 기존 사전에서 토지와 농민에 대한 기득권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새로운 지역에서 국가가 佃客의 所耕田으로 이미 파악한 토지에 대한 收租權을 위임하는 것이었다. 과전을 받은 受田者를 과전의 田主라고 규정하였지만, 이는 국가가 모든 토지의 田主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과전법 조문 대부분은 오히려 과전의 受田者가 이전 시기 私田主와 같이 토지를 세습하고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 마련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의 상황이 사전 혁파론자들이 목표했던 바와 같이 전개되지는 않았다. 私田主들의 토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는 私田을 혁파하는 조치에도 불구하고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국가가 경작 농민들을 佃客으로 파악하는 과정 역시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게 나타났다. 과전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제도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受田者들은 과전을 사실상 세습하는 한편 佃客의 所耕田을 심각하게 침탈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토지제도 변화는 고려 말 이래 토지제도 개혁의 이상을 현실에 맞추어 변용해가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조선 초기에는 전국 각지에 관직자층의 農莊이 고려 말 私田을 혁파하는 조치와 무관하게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전주들은 私田이 혁파되었다고 해도 대부분 私田主의 사적 예속인이었던 경작 농민들은 자신의 戶 내부에 포함함으로써 기존 私田을 자신이 佃客으로서 自耕하는 所耕田으로 계승할 수 있었다. 경작 농민들이 별개의 전객으로서 戶를 이루는 경우에도 私田主로부터 신분적 예속 관계에 의해 지배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토지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라는 외양은 사라졌지만, 所耕田을 경작하는 佃客戶의 내부 혹은 所耕田을 경작하는 전객 상호간의 신분적 예속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통해 私田에 대한 私田主의 지배는 조선 건국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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