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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유수부 재정연구-강화, 광주, 화성유수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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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조낙영
Advisor
김인걸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5-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유수부강화광주화성군사재정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5. 8. 김인걸.
Abstract
留守制는 중국 唐나라에서부터 유래한 행정체제로 수도 인근의 요충지에 陪都를 설치하여 수도를 보위하려는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조선도 건국 초부터 유수제를 받아들였으나 17세기 전반에 청과의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유수부의 규모와 역할이 이전보다 증대되었다. 인조대 강화부는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수도를 지원하는 배후지가 아니라 비상시 국왕이 몸을 피할 수 있는 보장처로 승격된 것이었다. 강화유수부와 대응되는 지역으로는 경기 廣州府의 南漢山城을 들 수 있다. 광주부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경기 남동부의 방어를 담당했다. 광주부는 남한산성의 완공을 계기로 강화 유수부와 ?角之勢를 이루는 국방요충지였다. 그러나 인조 초반에 승격된 강화유수부와 달리 숙종대와 영조대 두 차례 유수부로 정해졌다가 다시 廣州府로 전환되었고 정조 19년(1795)에 이르러서야 유수부로 확정될 수 있었다.
각 유수부는 행정 및 군사적 업무를 함께 담당하였다. 각 처에 설립된 감영과 병영, 鎭堡 등은 중앙과는 분리되어 독자적인 지방군영으로 운영된 것과는 달리 유수부는 중앙군영과 연계되어 운영되었다. 수도 근교지인 京畿의 군사방어거점지인 이상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지역이기도 했다.
또한 유수부는 군사기구이자 군사재정기구이기도 했다. 강화 유수부와 광주부 소재의 남한산성은 비상시 왕실과 중앙관료들이 머물면서 전쟁을 지휘할 보장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량의 군량을 확보하여 유수부에 보존하는 일은 중요한 사안이었다. 중앙은 납부되어야 할 재원의 일부를 강화 유수부와 남한산성(광주부)에 유치하여 안정적으로 군량이 유지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강화 유수부와 남한산성에는 군량이라는 명목으로 대량의 군사재정이 구비되었다.
장용영 외영이었던 화성 유수부 역시 유수부에 속한 군병들을 위한 재정이 요구되었다. 일반적으로 지방에 설립된 監營, 兵營, 鎭堡 등의 행정 및 군사기구들은 自辦支供의 원칙아래 개별적으로 운영재원을 확보하고 경비를 조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비해 유수부의 경우, 군사재원의 확보에 중앙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었다.
강화유수부와 광주부는 17세기 전반부터 18세기까지 중앙군영 및 수도방어체제의 운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운영되었다. 반면 華城留守府는 정조 17년(1793), 수원부에 국왕의 친위대인 壯勇營 外營이 설치되는 것을 계기로 승격되었다. 명분상 사도세자의 陵邑조성을 위한 정책이었지만 왕권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정조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강화, 광주, 화성 유수부 등 3개의 유수부는 수도 인근을 관할하는 행정기구이자 군사기구였으며 운영기반인 재원도 군사적인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유수부 재원의 특수성을 기준으로 삼아 군사재정인 유수부의 재원이 중앙의 방어정책의 변화 및 재원집중화 경향에 따라 어떻게 운영되고 전용되었는지를 고찰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유수부로 승격된 강화, 광주, 수원(=화성)지역은 전 왕조의 舊都와는 관련이 없는 곳이지만 선초부터 인근 지역의 군병을 통솔하여 수도 한양을 지키는 군사요충지였다. 그러나 3개 유수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유수부로 승격된 시기 및 이유가 다르며 행정? 군사기구로써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기도 차이를 보인다. 18세기 후반, 수도를 방어하는 외곽의 방어체제로써 4도 유수부체제가 구성되었지만 이를 구성하는 각 유수부는 상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시기가 지나면서 중앙의 방어정책 및 재정운영면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각 유수부가 중앙과 맺는 관계의 양상도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강화유수부, 광주유수부, 화성유수부를 서로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국왕과 왕실, 조정재신들의 피난처로 삼기 위해 유수부로 승격된 강화유수부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군병과 군량이었다. 17세기 전반동안 강화도 해안의 방어체제가 대대적으로 정비되었으며 대량의 군량이 집적되었다. 강화도는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되는 지역이었지만 섬 자체의 곡물생산만으로는 군량을 마련할 수 없었다. 왕실과 신료, 군병들의 피난 생활을 유지시킬 수 있는 규모의 군량을 집적하는 일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17세기 동안 호조나 선혜청으로 납부되어야할 전세와 대동미들이 添餉이라는 명목으로 이전되었다. 특히 효종 이후부터 점차 경기 이외 지역에서 시행되기 시작한 대동법은 대량의 곡물을 수합하는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숙종대 강화유수부가 보유한 군향의 액수는 16만여석이었다. 청나라와 군사적 충돌로부터 야기된 위기감이 수도 외곽 지역에 10만석이 넘는 곡물을 보존하게 한 것이었다.
강화유수부의 군향은 막대한 규모의 군사재정이자 중앙이 마련한 예비재정이기도 했다. 17세기 당시 호조의 평균예산이 10만석인 것을 감안하면 중앙의 정규예산을 넘는 곡물이 군량의 명목으로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군향은 군사재정이었지만 중앙예산규모를 넘는 지출이 발생할 경우 예비재정으로 동원되었다. 17세기 동안 경기의 진휼곡 상당부분을 책임진 것은 강화유수부의 군향이었다. 강화유수부는 삼남지역의 수로와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곡물의 이송에도 편리했다. 수로망을 기반으로 경기 이외의 지역인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황해도까지 진휼곡으로써 이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 후반대 청나라와의 긴장감이 완화되고 비상시 수도를 버리지 않고 사수하는 도성방어체제가 힘을 얻어가면서 강화유수부의 군향은 감축되기 시작했다. 보장처를 마련하고 막대한 군량을 축적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청나라 침공에 대한 불안이었다. 18세기 초반, 청과의 긴장감이 감소되면서 대규모 군량을 외곽지역에 보관할 이유 또한 사라져갔다. 숙종 후반에 시원적으로 등장했던 도성수비론은 영조대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18세기 새로운 국가방어기조로 확립되어가면서 강화유수부는 수도 외곽의 방어기지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중앙의 국가방어정책이 변화되면서 강화 유수부의 군향은 감소할 수 밖에 없었다. 18세기 초반부터, 중앙재정기구인 호조는 재정부족을 이유로 보장처의 군향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영조는 강화의 군량이 줄어드는 것은 막기 위해 삼남의 대동미와 지방에서 얻은 여유 곡물을 첨향해주었지만 감축의 추세는 막을 수 없었다.
단순히 수도방어체제와 그 기본 방침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숙종을 거쳐 영조, 정조 대에 중앙 군영 및 지방의 군병들을 정리하고 통제하려는 정책이 꾸준히 시행되었다. 쓸모없는 병사들을 감축시켜 군사재정의 부담을 줄이려는 노력이었다. 점차 중앙재정의 규모가 확장되는 추세 속에서 재정정책 역시 중앙으로 재원이 집중시키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8세기에 들어와 국가방어체제의 방침이 바뀌었고 이에 따라 강화유수부는 鎭無營을 중심으로 서해안의 방어에 전담하게 되었다. 영 ? 정조대부터 지속적으로 중앙재정기구 중심의 재정운영방식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호조는 명분을 잃은 강화유수부의 군사재원 대부분을 전용하였다. 강화유수부의 군향은 중앙정부가 가장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예비재정이었다. 17세기~19세기에 걸친 강화유수부의 재정운영변화에는 5군영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 방어체제의 확립 및 점차 심화되는 중앙재정기구 일변도의 재원확보 정책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광주부 또한 17세기 초반부터 강화유수부와 함께 청의 침공이 발발할 경우, 陸路의 군사들을 지휘하는 군사거점지역으로 간주되었다. 17세기 이후, 광주부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는 남한산성이었고 병자호란의 패배 이후에도 남한산성의 운영은 광주부와 수어청이 함께 관할하여 운영하였다. 광주부는 숙종대와 영조대에 걸쳐 한시적으로 유수부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부로 돌아오는 상황을 반복하였다. 중앙군영으로써 경기 남부의 방어를 담당한 수어청과 광주부가 이원적인 체제로 남한산성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일원적인 지휘체제를 확립하고 군사재정을 줄이기 위해 숙종과 영조는 수어청 경청을 폐지하고 광주부를 유수로 승격시켜 남한산성을 운영하게 하였다. 그러나 별도로 신설된 유수부와 그 관원들을 유지하는 비용이 더 크게 든다하여 다시 광주부로 환원시키고 수어영에게 다시 산성운영을 책임지게 했다.
실질적으로 광주가 유수부로써 운영된 것은 18세기 말부터이지만 역사적인 맥락으로 살펴본다면 17세기 남한산성과 관련된 군사제도의 정비 및 군향의 마련까지도 모두 광주유수부와 관련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내내 중앙정부에서는 남한산성의 군병과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숙종대 남한산성의 군향도 10만여석에 달하게 되었다. 10만여석의 산성곡은 당연히 중앙재정기구의 지원 속에서 채워질 수 있는 액수였으며 거대한 규모의 예비재정이었다. 남한산성의 산성곡 역시 강화유수부와 더불어 17세기 동안 경기지역의 진휼곡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험한 산길로 인해 곡물의 입출에 한계가 있어 경기 이외의 진휼곡으로는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18세기 도성중심의 수도방어체제가 확립되면서부터 남한산성 역시 수도 외곽의 방어기지로 전환되었고 산성이 보유한 산성곡의 액수는 점차 감소되어 갔다. 유감스럽게도 남한산성과 관련된 18세기 자료가 미진한 까닭에 그 과정을 정확히 드러낼수는 없으나 강화유수부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긴장감이 감소되고 중앙재정기구 중심으로 재원이 운영되면서 일어난 결과로 추정된다.
정조 19년, 광주부는 다시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광주부는 17세기부터 경기지역의 군사방어거점으로 운영되었지만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유수부로 승격될 수 있었다. 중앙군영 중 세력이 약한 수어청은 한양에 있던 京廳을 폐지하고 남한산성으로 出鎭하여 산성과 관련된 업무를 직접 관할하게 되었다.
광주부가 유수부로 승격되기 2년 전 수원부는 이미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고 수어청이 관할하는 광주부 소속 군병과 광주부의 2개面이 화성유수부로 이속되었다. 정조는 4유수부 중심의 방어체제를 구성하면서도 경기 남부의 중심지를 화성으로 집중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국왕의 의도에 의해 광주 유수부는 유수부로 승격되기 이전보다 토지와 인구의 규모가 축소되었으며 정조 사후, 장용영 외영이 혁파된 이후에도 일부의 재원은 그대로 화성유수부에서 관할하기도 하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수어청과 총융청을 하나의 군영으로 재편하여 불필요한 다수의 군병들을 정리하고 일원적인 수도 외곽방어체제를 확립하려고 했다. 그럼으로써 실질적으로 정병만 확보하고 수어청과 총융청이 들어가는 군사비용을 줄여 국가재정의 확보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경기지역의 여러 군영들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개혁책은 뒤로 연기 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그 대신 새로운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창설하여 점차 그 규모를 확대해 나갔고 이를 바탕으로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화성)으로 천봉할 수 있었다.
수원부는 세도세자의 능읍이라는 명목으로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으며 정조는 화성유수부를 통해 왕권강화를 위한 지지기반을 만들고자 했다. 정조대 장용영은 기존의 중앙 군영에 속해있던 군병들을 이속시켜 군영의 규모를 증대시켰으며 재정적으로도 중앙재정아문들과 지방 감영들의 재원을 흡수하며 성장해 나갔다. 선혜청의 대동미유치분 및 균역청이 급대재원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군작미, 진휼청과 상평청이 진휼재원을 구비하기 위해 운영 중이었던 재원이 장용영으로 이송되었다. 각 지역의 감영들이 마련한 재정여유분도 장용영으로 상납되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 후반은 중앙의 재정이 부족해지면서 지방의 재원이 중앙재정의 일부로 활용되는 추세가 강해져 가던 시기였다. 장용영은 정조의 후원을 배경으로 중앙재정기관의 재원을 이전시켜 막대한 재원을 운영할 수 있었다. 화성유수부도 장용영 외영을 통해 그 규모를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는 강화유수부와 광주부가 경기의 군사 ? 재정의 중심지였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화성유수부가 다른 지역을 압도하는 위세를 자랑할 수 있었다.
장용영 외영의 창설은 본래 한 군영이 경기의 방어를 담당하여 잡다한 군병과 군사재정을 줄이겠다는 정조의 개혁안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정조는 장용영 외영과 화성유수부를 창설하여 왕권의 강화를 위한 지지기반으로 활용하였다. 정조는 장용영을 창설해 기존의 중앙재정 및 군영의 재원과 경기지역의 군병 및 부세 수세권을 집중시켰다. 장용영 외영은 당시 가장 큰 규모의 중앙군영이기도 했다. 장용영 외영과 화성유수부는 정조의 치세기간 내내 왕권의 핵심적인 기반으로 기능했다. 당대에 개성, 강화, 광주, 화성 유수부를 중심으로 한양의 북서부, 서부 해안지역, 남부 지역으로 이어지는 외곽에 수도방어권이 형성되었지만 실제 각 유수부들의 규모는 균질하지 않았다.
정조 사후,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화성유수부는 이전에 다른 중앙재정기관 및 군사기관들로부터 이속받은 군병과 재원들을 대부분 돌려주어야 했다. 그러나 본래 유수부에 속해 있는 재원들은 보장받을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화성유수부는 19세기 말까지 그 운영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는 강화, 광주, 화성 유수부 재정규모는 일정이상 증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3都 유수부는 재정의 일정한 여유분을 가지고 중앙재정의 부족분을 보충하던 이전과는 달리 오히려 중앙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지원을 받아야 운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18세기를 거쳐 군사적 ? 재정적인 흐름이 확고히 수도를 중시믕로 고착화된 결과였다.
본 논문은 강화유수부, 광주유수부, 화성유수부의 설립과 재원의 확보과정 및 운영방식을 시대별로 고찰하고 중앙의 군사 및 재정기구들과 어떻게 연계되는 지를 살펴보았다. 유수부의 군사 및 재정은 중앙 수도방어체제와 재정정책의 경향과 그대로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18세기 중앙재정기관들의 중심으로 재원이 집중되면서 가장 먼저 강화유수부의 군향과 광주부 남한산성의 산성곡이 사라져갔다. 화성유수부는 정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군사력과 재정을 집중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창설되었다. 각 유수부의 창설과정과 운영에는 17~18세기 중앙의 방어체제 및 재정정책의 변화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으며 이를 연구하는 것을 통해 조선후기의 핵심적인 운영원리를 고찰할 수 있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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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Korean History (국사학과)Theses (Ph.D. / Sc.D._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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