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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王都 硏究 : Study of Goguryeos Royal Ca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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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기경량

Advisor
송기호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王都都城平壤城長安城高句麗尺刻字城石격자형 구획移都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7. 2. 송기호.
Abstract
王都는 왕이 거주하며 국무를 주관하는 지역이다. 이와 유사한 용어로 都城이 있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도성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고대 삼국에서 도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예는 매우 드물다. 고대 삼국에서 國都를 의미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왕도였다고 판단된다.
고구려의 첫 왕도는 卒本이다. 졸본 시기 고구려인들은 산성인 흘승골성(오녀산성)을 시조 주몽의 건국지이자 왕궁이 소재한 왕성으로 인식하였고, 국가 의례의 중심 장소로 활용하였다. 또 유리왕대 기록에 따르면 평지에는 여러 곳에 離宮이 설치되어 있었다. 졸본 시기 고구려인들에게 왕도의 중심 장소로 인식되었던 것은 오히려 산성이었으며, 평지에 조성된 이궁들은 산성에 비해 정치적 중요성과 상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고구려 왕도가 졸본에서 국내 지역으로 옮겨간 시기 신대왕 시기로 짐작된다. 국내 지역에서 처음 왕성의 역할을 하였던 곳은 산성이었던 丸都城이었다. 환도성은 국가의례 장소와 왕의 거소가 결합된 공간이었다. 환도성은 38년간 고구려의 왕성으로 기능하였으나 동천왕대인 247년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파괴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동천왕은 새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이 시기는 낙랑군이 건재한 시기이므로 동천왕이 쌓은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 지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동천왕이 쌓은 평양성이란 集安의 평지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왕성이 산성에서 평지로 내려간 것이다. 집안 평지성은 한동안 평양성이라고 불리다가 고국원왕대부터 국내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구려는 장수왕대에 한반도 북부의 평양 지역으로 왕도를 옮긴다. 장수왕이 평양 지역으로 왕도를 옮긴 427년부터 다시 장안성으로 이도한 586년까지의 기간을 전기 평양성 시기로 명명할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 왕도의 중심지는 대성산성 일대였다. 그간 학계에서는 평지성-산성 통설에 따라 비상시 활용되는 산성의 역할을 한 것이 대성산성이라고 보는 한편 이와 짝을 이루는 평지성이 어디인지 찾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주목받은 평지성의 후보지로는 안학궁터와 청암동 토성이 있다.
그러나 안학궁터에서 출토되는 와당의 편년을 보면 그 시기가 상당히 늦다. 또한 고구려 중기의 석실분을 파괴하고 그 위에 궁을 세운 흔적도 확인되었다. 때문에 안학궁이 조영된 시기에 대해서는 고구려 후기, 혹은 고려 시대까지 내려 보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후보지인 청암동 토성에서는 그간 몇 차례 발굴 조사가 있었지만 왕궁이 아닌 사찰의 유적만 확인되었을 뿐이다. 왕궁이 소재한 왕성으로 볼 수 있을만한 결정적인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周書》의 기록을 보면 전기 평양 시기에 평지성이 존재하였다는 언급은 없다. 治所인 평양성을 산성으로 묘사하는 한편 왕은 그 옆에 따로 집[宅]을 지어 놓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는 이 시기 고구려의 왕성이 산성이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왕은 치소인 평양성(대성산성)에 머물되 대성산 남쪽 평지에 마련된 별궁을 오가며 거주하였다고 여겨진다.
長安城은 552년(양원왕 8)에 축조를 시작하여 586년(평원왕 28)에 이도가 이루어진 후기 평양성이다. 장안성 축조에 대한 문헌 기록은 매우 소략하지만 축성 당시 새긴 刻字城石이 여러 개 출토되어 이를 보완해 준다. 그간 장안성 연구를 주도하였던 것은 현장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가 가능한 북한 학자들이었다. 타국 학자들은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북한 학계에서 제출한 연구 결과물에 대해 충분한 검증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구글 어스와 같은 지리 정보 소프트웨어를 통해 남한 학자들도 해당 지역에 대한 관찰과 분석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본 연구에서는 구글 어스의 이미지 오버레이(image overlay) 기능을 이용하여 장안성 성벽이 많이 남아 있었던 근대 초의 지도를 프로그램 상으로 불러와 현재의 위성사진과 중첩하였다. 이를 통해 장안성 성벽의 정확한 형태를 복원하고, 성의 둘레와 거리 등을 컴퓨터 상에서 자유롭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각자성석에 새겨진 축성 거리에 대해서도 검증이 가능해졌다.
장안성 축성에는 35.6cm인 고구려척이 사용되었고, 1리=1,000척의 尺里法이 이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과거 북한 학자 최희림에 의해 이미 주장된 바 있으나, 동북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던 1리=1,800척의 척리법과는 다른 형태였기 때문에 의구심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글 어스를 통해 검증하여 보니 23cm의 漢尺과 35.6cm의 高句麗尺을 기준으로 1리=1,800척의 척리법을 적용할 경우 각자성석에 새겨져 있는 장안성 성벽의 축성 거리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1리=1,000척의 척리법을 적용할 경우에만 실제 성벽의 길이와 부합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논란이 분분하였던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1석의 발견 위치에 대해서도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다. 《해동금석원》에 전하는 김정희의 글과 《삼한금석록》의 오경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탄에서 각자성석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석과 제3석은 外城 남쪽의 한사정에서 출토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오탄에서 출토되었다는 각자성석은 제1석으로 볼 수 있다. 제1석이 발견된 곳이 오탄 부근이 틀림없다면, 제1석에 새겨진 내용은 中城 남쪽 성벽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성 남쪽 성벽의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그간 고구려 당대 축성설과 고려 시대 축성설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성과 외성에는 격자형 구획이 조성되어 있는데, 중성 남벽을 경계로 양자 간에 5도 가량의 각도 차이가 존재한다. 이는 중성 남벽이 만들어진 이후에 격자형 구획이 이루어진 증거로 볼 수 있다. 중성과 외성 내부의 격자형 구획이 고구려 때의 것이 분명하다면 중성 남쪽 성벽 역시 고구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외성 내 격자형 구획은 장안성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특성이다. 구획의 기본 형태에 대해서는 그간 직사각형으로 보는 견해, 정사각형으로 보는 견해, 정양문과 함구문 사이만 직사각형이고 나머지는 정사각형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절충적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이중 가장 나중에 제시된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이 섞여 있다는 견해가 최근까지 수용되고 있었으나, 본 연구에서의 검증을 통해 이 연구에 오류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외성 격자형 구획을 직사각형으로 본 연구들은 잘못된 가정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거나, 정양문과 함구문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현재의 도로 형태를 기반으로 실측을 수행하였던 것이었다.
외성의 격자형 구획은 전 영역이 일관되게 정사각형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1929년 작성된 지도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한 변의 길이는 177.08m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고구려척으로 환산하면 약 497.38척이다. 오차 범위를 감안하면 한 변 500척 길이를 기본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田자형 구획들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 내부는 다시 한 변 88.54m(250척 추정) 길이를 가진 정사각형의 소구역 4개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장안성에서 격자형 구획이 확인되는 것은 중성의 일부 구역과 외성 구역뿐이다. 왕궁의 소재지로서 장안성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내성에서는 정작 격자형 구획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장안성 내성과 중성․외성의 축조 시기와 목적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각자성석 분석에 따르면 내성이 축조된 시기는 566년(평원왕 8)이고 중성과 외성이 축조된 시기는 589년(평원왕 31)이다. 양자 사이에 23년의 시간적 간극이 확인된다.
기존에는 장안성 축조가 내성과 중성․외성을 모두 포함한 거대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 보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내성은 왕실의 별궁 개념으로 축조되었던 것이고, 중성․외성의 축조는 589년 隋의 중국 대륙 통일이라는 미증유의 사건과 맞물려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새롭게 기획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성과 중성․외성의 축성 목적이 달랐던 것이다. 이때 대성산성 아래 살고 있던 평양 주민들을 대거 장안성으로 이주시키며 왕도의 중심 공간을 옮기게 되었으므로 평양 권역 내에서의 가까운 이동이었음에도 移都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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