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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병풍 연구 : The Golden Age of Folding Screens: A Study on Folding Screens in the Second Half of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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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수진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병풍계병장병계병채왜장병풍각장병풍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2017. 2. 장진성.
Abstract
본 논문은 조선 후기에 유독 병풍 형식의 서화가 증가한 현상에 주목하
여 그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논구하고자 한다. 조선 사회를 견인하였던 유
교의 이념은 의례를 통해 실천되었다. 이 과정에서 병풍은 왕실의 오례(五
禮)와 민간의 사례(四禮)에 적극 활용되었다. 아울러 왕실의 행사를 기념
하기 위해 제작된 서화도 18세기 후반부터는 대개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
었다. 이 밖에 일상적인 실내 장식과 방한 용도로도 병풍은 꾸준하게 사용
되었다. 조선 후기 병풍은 단순한 서화의 형식을 넘어 의구(儀具)이자 일
상용구(日常用具)로서 조선 사회 곳곳에서 사용된 것이다.
병풍이란 목재로 병풍틀을 만들고 그 위에 서화를 붙인 것이다. 이는 동
아시아의 전통적인 서화 장황 가운데 하나였다. 병풍은 필요에 따라 펼치
고 접을 수 있다. 따라서 임시로 공간을 구획하거나 의례의 장엄(莊嚴)을
위해 활용되었다. 아울러 일상적인 방한(防寒)과 장식 용도로도 사용되었
다. 병풍은 용도에 따라 병풍차(屛風次)의 주제, 재료, 높이, 폭의 수가 결
정되었다. 한국 서화사에 있어서도 병풍은 걸개〔軸〕, 책첩〔帖〕, 두루마리
〔卷〕의 장황 형식과 함께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병풍은
신라시대부터 장식과 교역, 조공품으로 사용된 것이 확인된다. 고려시대에
는 십장생도, 사군자도, 산수도 등의 병풍이 만들어졌다. 조선 시대의 병
풍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물의 수도 상당하다. 특히 조선 후기가 되면
병풍의 용도가 세분되고 사용 계층도 확대되었다. 이는 영조(英祖) 대에
왕실 오례에 병풍을 사용하는 것이 국정예서(國定禮書)로 명문화된 것과
관련이 깊다. 이를 바탕으로 왕실의 행사를 장엄하는 장병(裝屛)과 행사를
기념하는 계병(禊屛)의 제작과 사용이 정례화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19
세기가 되면 유교 예속(禮俗)을 따르며 양반 의식을 갖춘 인구가 증가하였
다. 이로 인해 민간사례(民間四禮)에 사용되는 병풍의 제작은 대폭 증가하
였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경제·문화·인구학적 변화가 병
풍의 제작과 사용을 견인한 양상을 구명(究明)하는 동시에 이것이 미술사
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병풍이라는 형식이 조선 후기에 증가하는 현상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그러나 왕실 병풍의 경우 주로 궁중기록화와 궁중장식화
를 논구하는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이 때문에 이들 대부분이 왜 병풍 형식
이었는가와 그것이 어떻게 배설(排設)되고 어디에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질
문으로는 이어지지는 못한 측면이 있다. 또한 민간에서 제작한 병풍에 대
해서는 대부분 민화의 범주로 논의되어왔다. 이로 인해 길상(吉祥)과 벽사
(辟邪)의 화제가 강조되었을 뿐 정작 이것이 왜 제작되었고 어떻게 사용되
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간과된 측면이 크다. 병풍의 사용은 500년 간 조선
사회를 움직인 가장 근본적인 이념인 유교와 그것의 실천 지침인 『주자가
례(朱子家禮)』를 조선화 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왕실은 왕실의 사
치를 통제하는 한편 의례를 정례화하기 위한 국정예서를 간행하였다. 영조
대에는 『국혼정례(國婚定例)』(1749년)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1758년)을 간행하여 각각의 의례에 요구되는 병풍의 종류와 수량을 명시
하였다. 병풍의 종류와 화제(畵題), 채색 여부와 재료, 병풍 배설의 시점과
장소에 대한 명기는 왕실 의례용 병풍을 통제하는 방편이 되었다. 아울러
정조 대에는 사대부 계층에서 제작되던 계병(契屛)의 전통을 왕실이 차용
함으로써 궁중 행사를 기념하는 계병(禊屛·稧屛)의 전범을 정례화 하였다.
이는 차비대령화원제도(差備待令畵員制度)를 통해 제도적으로 지원되었다.
정조(正祖, 1776~1880년 재위)의 정책은 궁중 미술을 진작함으로써 김홍
도(金弘道, 1745~1803년 이후)를 위시한 걸출한 화원화가들을 배출하였
다. 화가들은 전대로부터 전해진 다양한 화제를 병풍으로 재구성하는 한편
새로운 병풍화의 주제를 창안해 냈다. 아울러 이러한 왕실의 병풍은 제용
감(濟用監)과 도감(都監)의 병풍 대여를 통해 사가(私家)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간 사례에서도 병풍의 사용이 필수화되었다. 사대부 계층은
『주자가례』를 주해하는 과정에서 원전에는 보이지 않던 병풍의 사용을 명
기한 절차를 포함시켰다. 또한 마을 공동체의 향약안(鄕約案)에 의례용 병
풍의 공동 소유를 포함시켰다. 결국 이러한 과정은 병풍 사용의 관행이 왕
실을 넘어 민간에까지 확산되는 동기로 작용했다.
19세기에는 전대에 완성된 제도와 병풍 사용의 전통이 순조롭게 계승되
었다. 이로 인해 병풍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양한 병풍이
여러 계층에 의해 소비되었다. 중앙 정부에서는 왕실의 계병 수급의 안정
화를 위하여 지방관에게 계병채(禊屛債)를 부과하였다. 이를 통해 계병은
행사도 형식 뿐 아니라 일반 주제의 병풍화로도 다수 주문되었다. 아울러
병풍이 각폭(各幅)이 아닌 연폭(連幅)으로 꾸며지는 형식이 유행하면서 왜
장병풍(倭粧屛風)이라는 명칭이 일반화 되었다. 용어의 연원은 일본 막부
에서 조선 왕실로 보낸 수 백점의 왜병(倭屛)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일본
병풍의 유입은 문인 계층이 가졌던 병풍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바꾸어 놓
았다. 고종(高宗, 1863~1907년 재위) 대가 되면 일반 병풍보다 제작비용
이 최대 8배 높은 자수병풍과 12폭으로 증가된 대형병풍이 유행하였다.
이는 병풍 형식이 가진 전시의 효과를 고종이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
이다. 이로 인해 병풍이 가진 상징적 의미는 더욱 강화되었다. 아울러 흥
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과 왕실 여인들이 병풍 제작의 주체가
된 경우가 증가했다. 또한 병풍은 서양인들에게 하사되는 외교 예물로도
활용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결국 왕실이 병풍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
함으로써 병풍을 다양하게 활용한 역사를 보여준다.
19세기 민간에서의 병풍은 서화시장에서 병풍차(屛風次)가 유통됨으로써
크게 확산될 수 있었다. 사적 주문이 아니라 고정 점포를 통해 거래되었기
때문에 병풍의 소비 계층이 크게 확대된 것이다. 전대보다 많은 인구가 양
반 의식(意識)을 가지게 되면서 의례 병풍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아울러
한양을 넘어 평양, 안주, 전주, 군산, 삼척, 강릉 등 지방의 거점 도시에
화단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서화 시장을 중심으로 병풍 전문화가가 활동하
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특정 화가가 특정 화제를 독점하거나 특정 가문이
특정 기법을 세전(世傳)시키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이들은 초본(草本)과 견
본(見本)을 활용하여 동일한 도안의 병풍을 다량 제작할 수 있었다. 이 같
은 전략은 화가로 하여금 전문성과 생산성을 동시에 확보하게 하는 방편
이 되었다. 병풍 사용 인구의 확산은 점차 병풍 시장을 분화시켰다. 이를
통해 고급 병풍과 저급 병풍의 시장이 모두 활성화 되었다. 전자의 경우
이금(泥金), 호분(胡粉), 자수 등 제작 시간과 비용이 높은 기법으로 유행
하였다. 반면 후자는 석화(席畫)로 제작 가능한 속필(速筆)과 혁필(革筆)의
방식이 선호되었다. 민간 병풍은 기존에 있던 도상을 결합하여 여러 화제
를 한 화면에 합쳤다. 이를 통해 하나의 병풍으로 복수의 효과를 낼 수 있
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급기야 제례용과 축연용(祝宴用) 주제를 양면에 그
린 양면 병풍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20세기에는 육필(肉筆) 서화 뿐 아니
라 인쇄 화면도 병풍차로 제작되었다. 특히 식민시기 이후에는 병풍이 상
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어 매매, 전시, 절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현
대에도 유교 의례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병풍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거
시적 관점으로 보자면 조선 후기 병풍 문화는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는 셈
이다.
지난 50여 년 간 한국회화사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축적해왔다. 조선
화단에서 활약한 대가(大家)들의 작가론과 주요 화제를 분석한 주제론 연
구가 조선 시대 회화사 연구의 근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축
(軸)·첩(帖)·권(卷)·병(屛)이라는 형식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성과가 없었
다는 것이 본 논문의 출발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 후기 화단에서 가장
부각되었던 병풍의 형식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병풍차로서의 서화
를 분석하는 차원을 넘어 병풍의 제작과 사용 전반으로 논의를 확장하고
자 하였다. 따라서 병풍이 배설된 공간, 병풍이 사용된 의례, 병풍을 주문
한 계층, 병풍차의 제작 환경, 병풍차의 유통 경로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
으로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간 회화사를 주도해 온 문인화론과
직업·화원화가론, 궁화론(宮畵論)과 민화론 같은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 병
풍이라는 틀로써 조선시대 회화사를 다시 보고자 하였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해 본 논문은 조선 후기 병풍이 지닌 미술사적 의의를 조명하고자 하였
다. 아울러 고전문학, 문헌사학, 민속학, 인류학, 문화재 보존학과 같은 인
접 분야의 학문과도 연구 성과를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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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rchaeology and Art History (고고미술사학과)Theses (Ph.D. / Sc.D._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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