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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城 硏究
고구려 성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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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양시은
Advisor
이선복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고고학전공)
Issue Date
2013-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고구려도성산성방어 체계지방 지배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고고학전공, 2013. 8. 이선복.
Abstract
본 연구는 고구려 성의 기원, 유형, 구조와 분포상의 특징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방어 체계와 변천 양상을 파악하여, 고구려 성 전반에 대한 고고학적인 실체를 규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고구려는 산이 많고 계곡이 깊은 지형적인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官司가 설치된 중대형 포곡식산성을 기반으로 지방을 통치하는 독특한 체제를 운용하였다. 이는 秦·漢代 이후 판축공법을 이용한 평지 토성을 중심으로 국가중앙집권적인 郡縣제도를 운용했던 중국의 고대 왕조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방식이었다.
고구려는 초기 도읍지인 桓仁지역 외곽의 新賓과 通化지역 등에서 일찍부터 漢의 평지 토성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과는 달리 험준한 산 정상부에 석성을 축조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고구려 성을 遼西나 吉林지역의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취락 방어 유적과 연결시켜보려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시간적인 괴리가 크고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볼 근거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계통론적인 접근으로는 고구려 성의 등장 배경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고구려가 발원한 渾江 및 鴨綠江 중류 지역이 대부분 산악지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국가성립 당시 세력이 약한 고구려가 漢과의 전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채택한 것이 평지성에 비해 방어가 용이한 산성이었고, 산성이 입지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 정상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축성 재료가 석재였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석축 산성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중원 왕조 및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도 오랜 기간 국가를 유지·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산성을 이용한 방어 전략과 이를 뒷받침하는 뛰어난 축성술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는 목책성, 토성, 석성 등이 모두 확인되는데, 하나의 성에서 구간별로 토축, 토석혼축, 석축의 방법이 모두 발견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에서는 한 가지 축성 재료를 고집하지 않고 지형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적절히 혼용하여 성벽 축조의 효율성을 높이고 성벽이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책은 현재까지 남한지역에서만 확인되었는데, 석축 성벽의 전환이전에 사용한 임시적인 방어시설로 판단된다. 1~2m 간격의 나무기둥에 판재를 끼워 만든, 2열 구조가 대부분이며, 목책 치를 설치한 예도 있다.
고구려 전기에 축조된 토성으로는 桓仁의 下古城子城이 대표적이다. 토축 벽에서는 횡장목과 판재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판축이 아닌 교호성토 공법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중기 이후에 축조된 撫順 高爾山城, 吉林 龍潭山城, 蓋州 高麗城山城의 경우에는 노출된 성벽 단면을 직접 관찰한 결과, 모두 판축 공법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판축 공법은 성토법에 비해 많은 공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성문이나 계곡 입구처럼 방어력을 보강해야 하는 지점에 주로 이용하였다. 이 밖에도 평양 안학궁, 高爾山城 東城의 북벽, 연천 은대리성에서는 토축 성벽의 외면을 석축으로 보강한 방식도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기저부 내지는 외면 석축 부가 방식은 통일신라 혹은 고려 토성에서도 일부 확인된 사례가 있어, 고구려에서도 비교적 늦은 시기에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석성은 매우 특징적이고, 석성 축조 기술은 한반도에 전래되어 통일기 신라 및 고려, 조선까지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석성의 가장 큰 특징은 성돌의 가공 형태와 축조 방식에 있다. 보루를 제외한 일반적인 고구려 성은 쐐기꼴 돌과 북꼴 돌을 정교한 규칙에 따라 서로 맞물리게 쌓아서 만들었는데, 이렇게 축조한 성벽은 겉면의 쐐기꼴 돌 일부가 빠지더라도 안쪽의 북꼴 돌이 그대로 남아있어 성벽의 형태와 방어력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성돌의 가공과 치석의 정도를 축조 집단이나 시간적인 속성과 연관짓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추정은 타당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평양 대성산성, 서울 홍련봉 1보루, 연천 당포성과 호로고루 등 평양 천도 이후에 축조된 석성에서는 겹성벽과 함께 수직기둥홈이 발견되기도 한다. 당포성과 호로고루의 수직기둥홈 아래에서는 돌확이, 홍련봉 1보루에서는 수혈이 확인되었는데,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수직기둥홈에는 성벽을 지지할 수 있는 나무기둥이 세워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남한에서는 고려 이후에 축조된 석축 산성에서도 수직기둥홈이 발견되는 사례가 있어, 고구려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고구려 성에는 여장과 함께 방형의 돌구멍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중국에서 확인된 여장은 크기가 다양하지만, 그 폭은 0.8~1.2m로 일정한 편이다. 돌구멍은 바깥 성벽으로부터 약 1m 들어온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여장 안쪽에 설치한 시설물로 판단된다. 五女山城에서 확인된 돌구멍은 대체로 0.3×0.2×0.5~0.8m이며, 입구를 판석으로 덮은 것도 있다. 그런데 접근이 어려운 급경사에 축조된 성벽에서도 돌구멍이 확인된 예가 있으므로,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설물 설치용 구조라는 기존의 견해는 수용하기 어렵다.
고구려 성벽에는 효과적인 방어를 위한 방형의 치가 설치되기도 한다. 다만 아차산 보루군에서 발견된 2중 또는 3중으로 방어를 강화한 특이한 구조의 치는 여러 정황으로 판단하건데, 보루의 출입시설로도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도 고구려 성에서는 성문,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 적대 등이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문지가 후대에 추가 또는 개축되면서 옹성이 설치된 사례(예를 들어 西豊 城子山山城의 서문, 鳳城 鳳凰山山城의 북문이나 燈塔 燕州城의 서문)가 보고된 바 있어 옹성의 축조 시기와 구조에 대한 판단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겠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 성의 분포를 검토한 결과, 고구려 성은 수도, 수도 외곽, 수도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 국경에 분포하고 있어, 다중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성을 이용한 고구려의 다중 방어 체계가 隋‧唐과의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이었음은 역사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고구려에서 성은 군사방어 시설일 뿐만 아니라 지방 지배를 위한 기초 행정 거점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치소성은 영토가 확장되고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고구려 중기 이후에 효율적인 지방 지배를 위해 도입된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5部 176城 69만7천戶였다는 『舊唐書』의 기록이나 遼東이나 玄菟 등 수십 城에 모두 官司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는 『北史』의 기록은 치소성의 존재를 말해준다. 고구려 중기 이후에 축조된 중대형의 평지성이나 하곡평지형 포곡식산성에서는 기와가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고구려 관청에 기와가 사용되었다는 『舊唐書』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군사방어 및 지방 지배를 목적으로 한 분포와 변천 양상 그리고 방어체계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고구려 성을 크게 3기로 구분하였다. 우선 도읍의 위치와 활용 기간을 고려하여 桓仁·集安 도읍기와 평양 도읍기로 나누었고, 고구려 정치사의 기존 연구 성과에 따라 桓仁·集安 도읍기를 중앙집권화 이전과 이후로 세분하였다.
Ⅰ기는 고구려의 국가성립기부터 3세기까지로, 고구려가 건국하여 桓仁과 集安 일대에 성을 축조하고 활용하던 시기이다. 성은 수도 주변에 국한하여 분포하며, 군사방어를 위한 산정식 석축산성이 주로 축조되었다.
桓仁 도읍기의 평지성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구려 전기 문화층과 함께 대형의 초석 건물지가 발견된 五女山城이 국가형성기부터 주요하게 활용되었음은 학계 전반이 공감하고 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集安지역에서는 國內城과 丸都山城이 확인되었다. 國內城에서는 성벽 내 토층에서 회전대로 제작한 니질 태토의 토기가 발견되었고, 성 내부의 최하 문화층에서는 권운문와당과 東晋代 청자 등이 출토된 바, 이를 종합하면 國內城은 4세기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Ⅰ기에는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의 조합이라는 고구려의 도성제는 확립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Ⅱ기는 4세기부터 평양 천도 이전까지로, 고구려가 遼東과 평양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며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이다. 4세기 초 고구려는 西安平, 樂浪郡, 帶方郡과 玄菟城을 차례로 점령하여 遼東과 평양지역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4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서북 방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新城(현 撫順 高爾山城)을 축조하였다. 이 시기에는 영토 확장에 따라 고구려 성의 수가 증가하여, 중앙집권체제 내에서의 효율적인 지방 지배를 위해 치소성이 등장한다. 치소성은 행정관청을 갖춘 성인데, 기존의 산정식산성이 아닌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운 포곡식산성이나 강안평지성 등 새로운 형태의 성을 활용하였다. 포곡식산성은 성 내에 계곡을 포함하고 있어 수원이 풍부하고 공간이 넓어 많은 병사가 장기간 주둔할 수 있어 군사방어적인 목적에도 부합한다.
Ⅲ기는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부터 멸망기까지로,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지고 고구려 성의 분포 양상 및 방어 체계가 전면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평양의 대성산성은 둘레가 7km로, 산성 내부에서는 기와를 포함한 다량의 고구려 유물과 중요 건물지가 다수 발견된 바, 평양으로 천도할 당시 방어용 산성으로 주요하게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평지성으로 청암동토성과 안학궁의 두 후보지가 거론되고 있으며, 여전히 논의가 진행 중이다. 청암동토성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와당이 출토되었지만, 궁전지로 추정되던 지점에서 절터가 확인되었다. 안학궁은 고구려 중기의 석실분을 파괴하고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후기와 그 이후 시기의 유물이 출토 유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5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6세기 중후반에는 장안성을 새롭게 축조하여 도읍을 옮겼는데,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으로 이루어진 고구려의 도성제가 하나의 대형 성곽으로 일원화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장안성은 전체 둘레가 23km에 달하여, 왕성인 내성과 거주지역인 외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외성에는 대형 구획과 소형 방형 구획으로 이루어진 里坊制가 실시되었다.
한편, 고구려 성의 분포는 각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의 성은 遼東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 지방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에서 對중국 방어가 최우선시 되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遼河와 遼東半島의 서쪽 해안가를 따라 1차 국경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향하는 遼東 지역의 모든 교통로에도 성을 축조하였는데, 주요 교통로와 요충지에는 중대형의 하곡평지형 포곡식산성을, 이어지는 간선 교통로에는 중소형의 산상형 포곡식산성과 보루를 포함한 산정식산성을 축조함으로써 다중의 방어 체계를 갖추었다.
고구려의 서북쪽에 對중국 방어를 위한 다수의 성이 집중 분포한 것에 비해, 다른 지역은 성의 밀집도가 낮다.
백제‧신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남부 전선에는 고구려 성이 일부 분포한다. 황해도에는 평양으로 향하는 교통로를 따라 주요 요충지에 대형 포곡식산성이 축조되었으며, 남한지역에는 임진·한탄강 유역, 양주 일대, 한강 유역, 금강 유역에 소규모 산성 및 보루가 다수 분포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임진강 유역의 호로고루와 아차산의 홍련봉 1보루에서는 연화문와당과 함께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어 교통로를 통제하는 군사적 목적 외에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을 갖추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17개의 보루로 이루어진 아차산 보루군은 각 봉우리마다 위치한 보루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중대형 성곽과 유사한 방식으로 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도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은 475년부터 551년이라는 고정된 시간 폭을 가지고 있어 전체 고구려 성 편년 연구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출토된 유물 역시 아차산 보루군이 6세기 전반기에 활용되었음을 말해준다.
금강 유역의 고구려 산성에서는 목책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출토 토기의 제작기법을 고려하면,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목책은 임진강 유역, 양주 일대와 한강 유역의 석축성벽 하단부에서도 발견된 사례가 있어, 남한 내 고구려 성은 목책을 먼저 설치하여 방어하고, 이후 석축 성벽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북쪽 지역인 吉林 일대에서도 고구려 성이 확인된다. 이 지역은 부여의 중심지였으나 5세기 경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 일대는 吉林 龍潭山城, 遼源 龍首山城과 같은 거점성과 주변으로 소수의 위성이 분포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다중의 방어선을 구축한 對중국 방어 체계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분포는 고구려 중기 이후에 부여, 말갈 등 북방의 정치체가 고구려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동북지역인 延邊 일대에서는 10개의 성이 확인되었는데, 고구려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10개 중 8개가 평지성이고 대부분 기와가 출토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延邊지역은 고구려 멸망기에도 唐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만큼 고구려의 동북단에 위치하나, 일찍부터 柵城이 설치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고구려가 東沃沮를 병합하고 그 지역에 大人을 두어 使者로 삼고, 大加에게 조세를 통괄 수납케 하여 거리가 천리나 되는 곳으로부터 貊, 布, 魚, 鹽, 海草類 등의 자원을 확보했다는 『三國志』의 기록으로 볼 때, 延邊 지역은 고구려의 자원 보급처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This research aims to clarify overall archaeological characteristics of Koguryo fortresses. To achieve this goal, origins, types, structures, and spatial distributions of Koguryo fortresses are first analyzed. The result of this analysis is then used to specify what form Koguryo defense systems took, what role the fortresses played in the defense systems, and how they changed with the progress of time.
Koguryo developed unique defense systems. Above all, Koguryo was a country of deep valleys and highly mountainous landscapes. Accordingly, mountain fortresses constructed by making the best use of such topographical features played a central role in Koguryo defense systems. In addition, mid- to large-sized mountain fortresses encircling a valley were built for administrative purposes in local areas. These defense systems are clearly distinguished from the Gun-hyeon(郡縣) commandery systems in the ancient China. Under the Gun-hyeon systems earthen-walled fortresses built by piling up clay on the plain ground were used as an administrative center since the Jin(秦) and Han(漢) dynasties.
Koguryo people were aware that earthen-walled fortresses were built on the plain ground in the Han dynasty, through their exposure to earthen-walled fortresses in such regions as Xinjin(新賓) and Tonghua(通化) near Hengren(桓仁) County or the first capital of Koguryo. Differently from them, however, Koguryo people built stone fortresses on the top of a steep mountain. In previous studies, Koguryo fortresses were often thought to have originated from prehistoric fortified settlements in Liaoxi(遼西) or Jilin(吉林). This view has a problem in that it is not supported by any concrete evidence, and that there is a great temporal gap between Koguryo fortresses and those prehistoric fortified settlements. To explain the emergence of Koguryo fortresses, instead, we need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middle reaches of the Hun(渾江) and Amnok(鴨綠江) Rivers are mountainous areas. When Koguryo first emerged as a state, Koguryo was not strong enough to defend itself from the Han dynasty. It would be to overcome this weakness that Koguryo people built mountain fortresses which were more effective for defense than earthen-walled fortresses on the plain ground. By extension, mountain fortresses built with stones seem to have emerged early in time because stones were the most common raw materials that could be used for the construction of a fortress on the top of a steep mountain.
Together with the defense strategy of Koguryo based on mountain fortresses, their advanced technique for constructing fortresses helped Koguryo people to defend their country against numerous attacks of their neighboring countries. To build a fortress in the most effective way, Koguryo people used diverse kinds of materials in consideration of topographical features. This is evidenced by the fact that wooden-palisaded, earthen-walled, and stone fortresses are found in the Koguryo territory. There are even cases in which earthen walls, stone walls, and earthen and stone walls are all found together in one fortress.
Until now, wooden palisades have only been identified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y seem to have been used as temporary defensive facilities before they were transformed into stone walls. Most wooden palisades have the structure of two lines of wooden posts placed 1-2m apart with wooden boards inserted between them. In some cases wooden palisades were used as Chi.
Early phase Koguryo earthen fortresses are represented by the Xiaguchengzi earthen wall(下古城子土城) in Hengren County. The observation of sections of exposed walls reveals that fortresses dated later than the middle phase, such as the Gaoer mountain fortress(高爾山城), Longtan mountain fortress(龍潭山城), and Gaolicheng mountain fortress(高麗城山城), were all constructed by piling up clays. Since this construction method requires a large amount of labor, it was usually used for parts which needed to be especially well defended like a fortress gate or an entrance to a valley. In addition, there are cases in which exterior walls of an earthen fortress were reinforced with stones, as in the Anhak palace, Gaoer mountain fortress, and Eundae-ri fortress. This method was also used for the construction of some earthen fortresses dated to the Unified Silla or Koryo period. It suggests that Koguryo fortresses built with this method appeared relatively late in time.
Koguryo stone fortresses show very unique features. Techniques used for their construction appear to have been used even in the Unified Silla, Koryo and Choson period. The most distinctive feature of Koguryo stone fortresses can be found in their construction method and the shape of trimmed stones. Except for hill forts, Koguryo fortresses were generally built by assembling wedge-shaped stones and long stones carefully. This method enables the shape of walls and their defensive power to be maintained for a long time. It is because long stones constituting the interior of a war remain where they are even after some wedge-shaped stones constituting the exterior of a war are destroyed. In previous studies, differences in the way in and the degree to which stones were trimmed were taken as reflecting ethnic or temporal differences. However, it is not supported by any substantial evidence.
Double walls and vertical post holes were identified in some stone fortresses constructed after Koguryo moved its capital to Pyongyang, as in the Daesung Mountain fortress in Pyongyang, Hongreonbong fort No. 1 in Seoul, and Dangpo and Horogoru fortresses in Yeoncheon. A hollowed-out stone was found under a vertical post hole in the Dangpo and Horogoru fortresses, and a pit in Hongreonbong fort No. 1. Various lines of evidence suggest that wooden posts were set up in the vertical post holes to reinforce fortress walls. These vertical post holes were identified in some mountain fortresses built with stones which are dated later than the Koryo dynasty. They seem to have been made under the influence of Koguryo fortresses.
Machicolations and square-shaped stone pits are found in some Koguryo fortresses. Machicolations found in China vary in size, but their width falls within the range of 0.8-1.2m. The square-shaped stone pits are located about 1m inward from an outer wall. It suggests that they were used as facilities inside of a machicolation. Square-shaped stone pits identified in the Wunu Mountain fortress(五女山城) are approximately 0.3×0.2×0.5-0.8m in size. In some cases their entrance is covered with stone slabs. There are some cases in which square-shaped stone pits are found in fortress walls built on a steep slope. It makes previous views of them as facilities used to reinforce the defensive power implausible.
Some Koguryo fortress walls have square-shaped Chi(雉), which was made for effective defense. On the other hand, Chi found in Acha mountain fortresses(峨嵯山堡壘群) has double or triple reinforcements for defensive purposes. Diverse lines of evidence suggest that it was also used as entrance facilities to a hill fort.
In Koguryo fortresses, fortress gates, protruding fortress walls used to protect a fortress gate, and watchtowers are found, too. Recently, cases have been reported in which protruding fortress walls were built as gates were added or repaired later in time (e.g., the west gate of the Chengzi mountain fortress(城子山山城) in Sili(西豊), the north gate of the Fenghuang mountain fortress(鳳凰山山城) in Fengcheng(鳳城), and the west gate of the Yanzhou fortress(燕州城) in Dengta(燈塔)). With these cases in mind, we need to be careful in interpreting when and how they were constructed.
The spatial distribution of existing Koguryo fortresses evidences that Koguryo fortresses were built in a capital, adjacent areas to a capital, main traffic routes leading to a capital, and border areas. This indicates that multiple defensive systems were established in Koguryo. Written evidence also witnesses that these multiple defensive systems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wars against Sui(隋) and Tang(唐) dynasties.
Koguryo fortresses were used not only as military defense facilities but also as administrative bases for the governance of local areas. Administrative fortresses were built to govern local areas efficiently after the territorial expansion and centralization of power occurred in the middle phase of Koguryo. There are written records of Koguryo administrative fortresses. For instance, the Old Book of Tang(舊唐書) says that there were 5 districts, 176 fortresses, and 697,000 households in Koguryo when it fell. In a similar vein, the History of the Northern Dynasties(北史) says that Koguryo governed its territory by establishing administrative offices in fortresses. Roof tiles are often found in mid- to large-sized fortresses on the plain ground or mountain fortresses encircling a valley which are dated later than the middle phase of Koguryo. This coincides with the record in the Old Book of Tang that roof tiles were used in Koguryo administrative offices.
In order to understand how the spatial distribution of Koguryo fortresses and the defense systems based upon the fortresses changed over time for military and administrative purposes, Koguryo fortresses can be divided into three temporal phases. Firstly, they can be divided into the Hengren and Jian(集安) periods as to the location and duration of the capital. These phases can be further divided into the phases before and after the centralization of power occurred based on previous research of the political history of Koguryo.
The first phase refers to the period from when Koguryo emerged as a state to the 3rd century. During this phase, Koguryo fortresses were built and used in and around Hengren and Jian. In this phase fortresses were clustered around the capital, most of which were mountain fortresses encircling a mountain summit used for military defensive purposes. The existence of a fortress on the plain ground in the Hengren phase is still unclear. Nonetheless,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the Wunu Mountain fortress was used for important purposes since Koguryo first emerged as a state. It is supported by the fact that in this fortress not only stratigraphical evidence of the early phase of Koguryo but also a large building foundation including foundation stones for a pillar were identified.
In Jian, the second capital of Koguryo, the Guonei stone-walled fortress(國內城) and the Wandu Mountain fortress(丸都山城) are located. In the Guonei stone-walled fortress fine-clay pottery made on a turn table was found in one of the layers inside of the fortress wall. A cirrus design roof-end tile and celadon porcelain vessels from the East Jin period were found in the lowest layer. Based on this, the Guonei stone-walled fortress appears to have been built later than the 4th century. Thus, the capital fortress system based on the combination of an earthen-walled fortress on the plain ground and a mountain fortress was unlikely to have been established in the first phase.
The second phase refers to the period from the 4th century to when Koguryo moved its capital to Pyongyang. In this phase Koguryo expanded its territory and attempted to extend its power to the Liaodong peninsula(遼東半島) and Pyongyang. In the early 4th century, Koguryo prepared for the expansion into the Liaodong peninsula and Pyongyang by conquering Xianping(西安平), the Lelang commandery(樂浪郡), the Daifang commandery(帶方郡), and the Xuantu fortress(玄菟城). In the mid 4th century, the Gaoer Mountain fortress was built in Fushun(撫順) to be used as a center in defending the northwest area of Koguryo. In this phase, Koguryo fortresses increased in number with the expansion of the Koguryo territory, and administrative fortresses were built to effectively govern local areas under the centralized governing system. Administrative fortresses, or those having administrative offices in them, took the form of a mountain fortress encircling a valley or a fortress built on the plain ground along a riverside for easy access. They were different from previous mountain fortresses encircling a mountain summit. Since a mountain fortress encircling a valley included a valley within it, it could provide a plenty of water resources and a spacious space for a large number of soldiers to stay in it for a long time.
The third phase refers to the period from when Koguryo moved its capital to Pyongyang to when it fell. With the relocation of the capital, the spatial distribution pattern of Koguryo fortresses and its defense systems came to change fundamentally. The Daesung Mountain fortress is 7 km in length, in which foundations for main buildings and a large amount of Koguryo artifacts including roof tiles were found. It indicates that this fortress was used for important defensive purposes when Koguryo moved its capital to Pyongyang. As for an earthen-walled fortress on the plain ground, either the Cheongamni earthen-walled fortress or the Anhak palace is thought of as having been used for that purpose in previous studies. Nonetheless, both views have their own problems. In the Cheongamni earthen-walled fortress, roof-end tiles from an earlier phase were discovered, but a temple foundation was found in a place which has previously been thought of as a palace foundation. The Anhak palace was constructed, destroying a stone chamber tomb from the middle phase of Koguryo. In the palace artifacts dated to the late phase of Koguryo or even later than that were found in large numbers, too. Based on this, the palace was unlikely to be constructed in the early 5th century.
In the mid to late 6th century Pyongyang Castle was built and Koguryo relocated its capital there.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one large castle was singly used in this phase. This is different from the previous capital fortress system of Koguryo based on the combination of an earthen-walled fortress built on the plain ground and a mountain fortress used for defensive purposes. Pyongyang Castle is 23km round. It was composed of an inner fortress used as a royal palace and an outer fortress used as a residential area. The outer fortress was constructed according to the Lifang system(里坊制).
There is a great regional difference in the spatial distribution of Koguryo fortresses. They are clustered around the Liaodong peninsula in the northwestern area. This shows that defense against China was considered most important in Koguryo. Koguryo established primary border defense systems along the Liao River(遼河) and the western coast of the Liaodong peninsula. In doing so, they constructed fortresses along traffic routes from the Amnok River to Pyongyang in the Liaodong peninsula. Koguryo operated multiple defense systems. In other words, mid- to large-sized mountain fortresses encircling a valley were constructed along main traffic routes and at strategically important places, while mid-sized mountain fortresses encircling a valley and small- to mid-sized mountain fortresses encircling a mountain summit were constructed along secondary traffic routes. Compared with the northwestern area of Koguryo where fortresses were clustered in large numbers for the defense against China, fortresses are sparsely distributed in other regions. A few Koguryo fortresses are distributed in the southern front of Koguryo which was bordered with the Baekje and Silla territory. In the Hwanghae province large-sized mountain fortresses encircling a valley were constructed along traffic routes leading to Pyongyang.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on the other hand, small-sized mountain fortresses and hill forts are distributed in large numbers in and around the Imjin-Hantan River basin, Yangju, the Han River basin, and the Geum River basin.
In the Horogoru fortress in the Imjin River basin and the Hongreonbong fort No. 1 in the Acha Mountain a foundation for a roof-tiled building and roof-end tiles with a lotus flower design on them were found. It indicates that these fortresses were used not only for military purposes of controlling traffic routes but also as administrative bases for governing local areas. In the Acha Mountain, in particular, seventeen hill forts on the hilltops are connected to each other. This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these fortresses as a whole played a similar role to a mid- to large-sized fortress. In addition, the dates of Koguryo sites in the Han River basin fall within the narrow time span between 475 and 551. As such, they provide important criteria for the chronology of Koguryo fortresses in general.
A wooden palisade was discovered in a Koguryo mountain fortress in the Geum River basin. Based on the way a pot from the palisade was made, the palisade seems to have been built in the late 5th century. Wooden palisades were also found in a bottom part of a stone fortress wall in and around the Imjin River basin, Yangju, and the Han River basin. This reveals that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a wooden palisade originally constructed for defensive purposes was later transformed into part of a stone wall.
Koguryo fortresses are even found around Jilin, the northern part of Koguryo. Originally, this area was the center of Buyeo(夫餘), but it was included into the Koguryo territory in the 5th century. Around this area, main administrative fortresses such as the Longtan Mountain fortress in Jilin and the Longshou Mountain fortress(龍首山城) in Liaoyuan(遼源) are distributed together with a few secondary fortresses. This is clearly distinguished from multiple defense systems of Koguryo against China. It further suggests that polities such as Buyeo and Mohe(靺鞨) to the north of Koguryo were not considered to threaten Koguryo in any substantial way.
Around Yanbian(延邊) in the northeast of Koguryo ten fortresses were found. Significantly enough, eight of them were earthen-walled fortresses on the plain ground and roof tiles were reported in most of the fortresses. Yanbian was located on the northeast edge of Koguryo, relatively safe from the attack of China. However, it was considered so important that Chaekseong(柵城) was constructed there in an earlier phase of Koguryo. Sanguozhi(三國志) says that Koguryo conquered Eastern Okjeo(東沃沮) and established administrative offices there to exploit their local resources. It strongly argues for the possibility that Yanbian was utilized as an important region for the acquisition of resources by Koguryo.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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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rchaeology and Art History (고고미술사학과)Theses (Ph.D. / Sc.D._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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