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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世晃 硏究
강세황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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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경화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강세황자화상초상화문인화가문인화실경산수화김홍도풍속화문인문화절필안산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학전공, 2016. 8. 장진성.
Abstract
이 연구는 조선의 회화사에 독창적인 자화상을 남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작가론으로서 자화상에 보이는 강세황의 독특한 자기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파악하고 이를 작품 활동으로 표출하는 방식과 화가로서의 면모를 고찰하고자 한다. 강세황의 일생과 작품 전반을 18세기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비추어 포괄적으로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문인화가의 논의에 가려진 강세황의 실재를 조명하고자 한다.
강세황의 생애는 사회적 위상의 변화에 따라 크게 안산의 야인 시기(1744-1773)와 서울의 사환 시기(1773-1791)로 대별된다. 강세황의 작품 활동 또한 두 시기에 각기 다른 양상을 보였다. 시기별 활동 양상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과 자기인식의 변화를 파악해 나가며, 결론으로 강세황이 어떻게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공적인 명성과 문화적 권위를 확대해 나갔는지를 논의하였다.
강세황은 강주, 강백년, 강현으로 이어지는 소북계 명문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가문과 선조의 업적에 자부심을 지니고 성장한 강세황은 젊은 시절 그들처럼 출사하여 조정에서 포부를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형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이 1728년 무신란에 가담한 혐의를 받아 유배된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강세황은 무신란으로 받은 심리적 타격을 회화에 전념하여 극복하고자 했으며 이것은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가문의 복권이 지연되면서 장기적인 금고의 상태에 처한 강세황은 1744년 처가인 진주 유씨가 세거한 안산으로 이주하며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안산 시기는 강세황이 화가로서 문인 사회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복권을 이뤄낸 단계에 해당한다. 강세황이 낙향하며 안산을 선택한 이유는 처가인 진주유씨가 세거한 곳으로 서울에서 멀지 않은 장소란 이점 때문이었다. 안산 시절 강세황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출사를 포기한 은일자를 자처하였다. 한편으론 가문의 복권과 자신의 출사를 희망했지만 불가피한 상황에서 비롯한 상실감과 이름 없는 문인으로 사라질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 금고 상태에서 사회 활동에 한계를 지녔던 강세황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사회적 관계망 형성을 위해 활발한 회화 활동을 펼쳤다. 안산 초기의 회화는 처남인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을 비롯한 진주 유씨 일가 및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을 중심으로 한 여주이씨 일가 등 안산권의 문인들을 위해 제작됐다. 그러나 후기에는 점차 원거리의 남인 문인 및 소론 관료에 이르기까지 그의 그림을 요구하는 문인의 범위가 확대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강세황은 적극적으로 회화 요구에 대응하며 시서화 삼절로서 명성을 얻고 인적관계를 넓혀 갔다. 강세황의 활발한 작품 활동과 화가로서 명성의 구축은 결국 절필의 원인이 되었다.
가문이 복권된 1763년에서 1781년까지는 강세황에게 절필기에 해당한다. 강세황의 집안이 화가로서의 명성으로 인해 논란에 휘말릴 일을 염려했던 영조의 교시에 의해 강세황은 절필을 단행했으며 문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되었다. 1766년 54년간의 인생을 정리한 「표옹자지」에서 강세황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식인으로 위치시켜 자신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1770년 경 부안 유람에서 제작한 실경산수화에서 확인되듯이 절필의 기간에도 개인적인 회화 활동만은 지속하며 작화를 향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다.
강세황은 1773년 최초의 출사부터 몰년 무렵까지 관직을 유지하였다. 영조에 의한 강세황의 발탁은 그가 추진한 탕평정책에 따른 것이며 무신란의 피해에 대한 보상의 차원에서 성사된 일이었다. 강세황은 정조가 시행한 1776년 기구과(耆耈科)에 급제하며 관료로서 자신의 입지를 닦아갔다. 영조는 강세황이 화가로 행세하여 사족의 명예를 실추할 것을 우려했지만, 정조는 강세황이 문학과 함께 회화적 능력을 겸비했음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의 능력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정조의 조정에서 강세황은 정조의 30세 어진 제작을 성공적으로 감동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으며 1784년에는 건륭제의 천수연을 축하하는 북경 사행에 선발되었다. 정치사회적으로 서화의 효용성이 부각됐던 18세기 후반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강세황은 일련의 활동을 통해 관료로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였다.
1781년 어진 제작의 감동을 계기로 절필을 마치며 강세황은 공적이거나 사적인 측면에서 적극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관료인 동시에 시서화의 능력과 지식을 겸비한 문인의 정체성을 양립시키고자 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자화상과 초상화를 제작해 온 강세황은 1782년 70세를 맞아 자신의 인생과 내면을 돌아보며 기념비적인 자화상을 제작하였다. 70세 자화상에서 강세황은 자신을 야복에 관모(官帽)를 착용한 독특한 모습을 그렸다. 관모는 현재의 관직 생활을 의미하며 야복은 과거의 야인 생활을 의미하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의상은 뛰어난 능력으로 재야의 문인에서 발탁되어 고위 관료에 이른 인물이란 강세황의 자기인식의 형상화이며, 그의 관직과 야인 시절 모두에 대한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강세황은 화면에 자신의 내면을 담은 자찬문을 적어 놓음으로써 본래 자신을 위한 그림이었던 자화상을 사회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한 공적인 초상화로 변모시켰다.
자화상을 제작한 이듬해인 1783년 강세황은 정조의 배려로 기로소에 입소함으로써 강백년, 강현을 이은 삼세기영(三世耆英)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기로소 입소를 계기로 강세황은 정식 관복을 착용한 공신도상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명기라는 당대의 초상화가가 그린 71세 초상화는 정교한 쌍학흉배, 입체적으로 표현된 삽금대를 감상자의 시야에 드러내 정2품 고위 관료의 위상을 현시적으로 표현하였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자신의 생애와 내면을 향한 자부심을 그려낸 70세 자화상과, 전형적인 공신도상의 형식으로 관료로서 위상을 표현한 71세 초상화는 강세황의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구성해 공적으로 표출하였다. 70세 자화상과 71세 초상화는 강세황 자신이 후세에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를 고민했던 인물임을 보여준다. 강세황이 초상화 제작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자신의 이미지를 사회적으로 구축하며 자신의 존재를 후세에 영속화할 수 있는 매체로서 초상화가 지닌 기능을 뚜렷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벼슬을 하던 시기 강세황은 화가로서도 활발한 작품 제작을 전개하였다. 강세황은 일상생활에서 청공(淸供)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지식인의 문화적 소양을 드러냈다. 남종화 양식으로 실경을 포착해 화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입증한 를 남겼다. 문인화의 대표적 장르인 묵죽화를 목판으로 인쇄하여 널리 유통하게 함으로써 서화에 대한 다양한 계층의 요구에 수응하고 화가로서 명성과 입지를 더욱 확대하였다. 아울러 그 자신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당시 김홍도에 의해 새롭게 부상한 풍속화에 관한 글쓰기를 통해 회화 평론가로서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만년의 다채로운 회화 활동은 서화를 겸비한 문인으로서 사회적 명성과 평판을 획득하는 데 초점이 맞춰 있었다.
이상의 논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강세황의 생애와 작품 활동은 탈속한 삶을 추구하며 예술에 정진하는 문인화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야인 시절 강세황은 불우한 시절을 만나 숨어사는 은일자를 자처하였다. 출사 이후 그는 재야에서 선발된 관료로서 사회적 명망을 얻었으며 이를 자화상으로 표출하였다. 강세황은 작품 활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했으며 자전적인 작품으로 자신의 공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화가로서 사회적 명성을 얻었으나 가문과 자신의 복권을 위해 절필을 단행하여 사회의 질서와 가치에 충실한 사대부의 면모를 입증하기도 하였다. 그는 화가이기 이전에 가문의 위상과 자신의 출사를 도모해야 하는 사대부였으며 그의 초상화에는 관료로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다. 이와 같은 강세황의 자기인식과 작품 활동을 통해 볼 때, 인생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문인의 높은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문인화가의 신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강세황은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와 무관한 문인화가란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함을 보여주며 문인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향한 다각적인 재조명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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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rchaeology and Art History (고고미술사학과)Theses (Ph.D. / Sc.D._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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