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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日本窒素肥料株式會社의 赴戰江ㆍ長津江 개발과 노동자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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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박상필

Advisor
金泰雄
Major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日本窒素肥料株式會社赴戰江長津江유역 변경식 발전소노동자 동원노동자 통제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교육과, 2017. 2. 김태웅.
Abstract
이 논문은 일제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의 부전강과 장진강 유역 개발 당시 노동 현실과 노동자 통제에 대한 것이다. 日本窒素肥料株式會社는 1908년 소기(曾木) 전기주식회사와 일본 카바이드 상사의 합병으로 탄생하였다. 일본질소는 저렴한 화학비료를 대량으로 생산해 내기 위해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이미 일본에서는 5대 전력회사가 전원 지대를 선점하고 있었기에, 일본질소는 식민지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조선에서는 유역 변경식 발전소가 성공적으로 건설되었으며, 수력 발전력 조사에도 착수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질소는 赴戰江의 유역 변경식 발전소 건설 가능성에 주목하고, 조선총독부에 개발권을 신청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사업권을 신청하였던 미쓰비시에게 장진강 개발권을, 일본질소에게는 부전강 개발권을 허가하였다.
일본질소가 저렴한 비료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발전소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을 낮추어야 했다. 그래서 일본질소는 부전강 발전소 건설 당시, 군과 경찰의 힘을 빌어 주민들이 토지를 팔도록 강요하였다. 이렇게 얻은 토지 위에 건설된 부전강 발전소는 1㎾당 건설비가 일본에 비해 매우 낮았다. 그리고 1931년 부임한 우가키 가즈시케(宇垣一成) 총독은 朝鮮電氣事業令을 공포하고 본격적으로 전력을 통제하였다. 이어 長津江 개발권을 미쓰비시(三菱)로부터 회수하여, 발전량의 1/2을 공공용으로 내놓는다는 조건 하에 일본질소에게 넘겼다. 조선총독부는 토지 買收에 끝까지 반대하는 지주들의 토지에 토지 수용령을 적용하였고, 일본질소는 이를 헐값에 매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건설된 장진강 발전소 역시 1㎾당 건설비가 매우 낮았다.
부전강 개발 공사에는 매일 8,000~15,000여 명의 노동자가 종사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공업의 발전이 전개되지 않은 조선에서 노동자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당시 사회문제화하고 있었던 일본으로 도항하려는 노동자를 부산에서 저지하여 발전소 공사장으로 보냈다. 응모자가 별로 없자 조선총독부는 여비 지급 등의 혜택을 제공하였으며, 언론을 활용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사를 담당한 청부업자들은 저렴한 임금과 조직성 때문에 중국인 노동자들을 선호하였으며 이들을 상당수 고용하였다. 우가키 총독 부임 이후 조선인 노동자의 취업 斡旋 정책은 더욱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직업 소개소, 행정력과 언론 기관 등을 총동원하여 노동자 알선에 나섰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1934년 2월 「南朝鮮勞動者團體移民案」을 마련하여 노동자를 모집하였다. 이 안은 20명을 단위로 집단 이주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탈주를 막고 단결력을 강화하여 정주성을 높이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임금, 숙사, 여비 등에서 각종 혜택을 주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현실과 임금 때문에 돌아가 버렸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노동자들을 알선할 때 근무 조건과 임금 등에 대해서 회사나 청부업자들과 협약을 제대로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전강 및 장진강 발전소는 유역 변경식으로 건설되었고 매우 험난한 공사였다. 안전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도 끊이질 않았다. 특히 사고가 많이 발생했던 곳은 斜坑과 竪坑이었다. 유역 변경식 발전소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공사 중의 하나는 水路 공사이다. 그런데 부전강 및 장진강 발전소 건설에서 수로는 23~27㎞에 달할 정도로 매우 길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로 공사는 마츠모토구미(宋本組), 나가토구미(長門組), 니시마츠구미(西松組), 하자마구미(間組) 등의 청부업자가 나누어 시공을 하였다. 이들은 수로 공사 현장으로 사람이나 자재를 반출입하기 위해 굴을 뚫었는데, 가로로 뚫은 것을 橫坑, 비스듬하게 뚫은 것을 斜坑, 수직으로 뚫은 것을 竪坑이라 불렀다. 斜坑과 竪坑에서 사고가 많이 발생했던 이유는 37~162m에 달하는 좁은 굴을 따라 수로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로, 사갱, 수갱, 횡갱 등 굴착 공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곳 공사장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많이 사용되었고, 그에 따라 다이너마이트 관련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회사나 청부업자 측에서는 이를 대부분 노동자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들은 노동자의 실수에서 발생했다기 보다는 회사측의 관리 소홀이나 안전 시설 미비로 인한 사고가 대부분이었다. 사고에 대한 구제책도 마련되긴 했으나, 실제로 적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부전강 및 장진강 발전소 건설 현장에는 일일 수천여 명의 노동자가 종사하였기 때문에, 회사나 청부업자들은 중간 관리자들을 두어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관리하였다. 이러한 중간 관리자들은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감독하였으며, 심지어는 노동자들을 구타하여 사망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기 위해 노동자들의 생계비가 저렴함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실제 공사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생계비를 조사한 다음, 모집한 노동자들 임금의 하한선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들은 이 임금으로 최소한의 생계 마저도 보장받지 못했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임금을 현금이 아니라 전표로 지급받았다. 당장 현금이 급했던 노동자들은 전표를 할인받아 현금으로 교환하였다. 독신 노동자의 경우 대부분 함바(飯場)에서 생활했으며, 크기나 위생 등이 매우 열악하였다.
발전소 건설에 종사했던 노동자들은 자부심을 갖고 일에 임했으며, 열악한 노동 조건 하에서도 적극적으로 주어진 일을 완수하려 노력하였다. 부당한 노동조건이나 임금 등에 대해서는 도망, 항의, 청원서 제출 등 소극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파업이라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저항하기도 하였다. 조선인 노동자들과 중국인 노동자들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지만, 동조 파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노동자들도 조선인 노동자들의 파업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발전소 건설 노동자들은 회사 및 청부업자의 관리 및 통제에 대항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해 나갔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7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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