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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진사시 성립 과정 연구 : The study of a process of formation of Jinsasi in the early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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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우영

Advisor
우용제
Major
사범대학 교육학과
Issue Date
2015-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소과진사시국자감시생원시문예적 능력시부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교육학과, 2015. 2. 우용제.
Abstract
이 연구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진사시 시행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에서 진사시가 시행된 이유를 알아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본고에서는 진사시의 시행이 당시 학교제도를 활성화시키고 더불어 학교와 과거의 연계성을 강화하려 한 조선 교육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을 드러낸다는 점에 주목해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 말기 국자감시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다. 둘째, 조선 초기 진사시 시행에 관한 논의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고려 국자감시(國子監試)는 덕종 즉위년(1016)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목적은 입격자들에게 국자감에 입학할 자격을 주는 것이었다. 고시과목은 시부(詩賦)와 10운시(十韻詩)가 중심이었다. 국자감시는 고려 말기에 들어오면서 폐지와 복설을 거듭한다. 이는 단순히 국자감시에만 국한되는 변화가 아니었고 국자감의 위상 및 교육과정의 변화, 그리고 과거제도와 학교제도의 연계 강화와 관련되어 있다. 국자감은 성균관으로 변하면서 좀 더 유학교육에 치중된 성격을 가진 학교로 변화했고 이는 국자감시의 고시과목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승보시(陞補試)의 위상 변화도 국자감시에 영향을 주었다. 승보시는 본래 국자감시를 통해 선발한 국자감의 학생 수에 결원이 있을 때, 보충해서 선발하는 시험의 성격이 강했다. 고시과목은 경서의 의(義)가 중심이었는데, 공민왕 대부터 의의(疑義)를 시험했고, 입격자 수를 크게 늘리게 된다. 이때부터 승보시는 기존 국자감시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험으로 위상이 올라가게 되었다. 우왕 대 국자감시가 다시 부활했지만 국자감시는 최고학부의 입학자격시험으로서의 그 위상이 점점 약화되었다.
국자감시는 조선이 건국하면서 폐지되었는데, 다시 시행하자는 논의가 제기된 때는 세종 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세종 10년에(1428) 성균사성 정곤과 13년(1431) 중부교수관 정종본은 생원시 입격자 수가 응시자에 비해 너무 적은 것을 문제로 제기하면서, 진사시를 다시 시행하자고 건의한다. 세종 17년(1435), 집현전 대제학 이맹균은 당시까지 진행된 논의를 반영하여 「시학흥학조건(詩學興學條件)」을 올린다. 이맹균은 진사시의 시행과 동시에 문과 중장의 고시과목에 논(論) 대신 시(詩)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진사시의 응시 연령을 25세까지로 한정하였다. 이는 진사시가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이라기보다는 장학에 목적을 둔 시험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진사시의 시행은 향교 교관을 보충하기 위한 성격도 가지고 있다. 향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향교교관의 수급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소과 입격자에게 교도(敎導)의 자격을 주어 향교 교관을 충원하려 했다. 따라서 소과 입격자 수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진사시를 시행하는 안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사시는 세종 26년에 다시 폐지된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폐지사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세종 25년에 제정된 「문과강경정식(文科講經程式)」이다. 「문과강경정식」을 통해 문과 초장이 강경(講經)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문과의 시험기간이 길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따라서 한 해에 진사시, 생원시, 문과를 모두 치르면 시험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점이 지적되어 응시자들에게 큰 불편을 주게 된다고 지적되었다. 다음으로는 세종 26년에 생원시 고사장에서 대리응시사건이 발각되었다. 당시 논의를 보면, 진사시 고사장에서도 25세를 넘긴 사람이 진사시 시험장에 나이를 속이고 응시하는 경우를 제대로 적발해 내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폐단이 지적되었다.
진사시는 단종 대 다시 시행되었다. 그러나 진사시 시행규정은 이전 문종 대「진사시취조건(進士試取條件)」으로 확립되었는데, 「진사시취조건」은 이전 세종 대 「시학흥학조건」과 비교하면 몇 가지 변화한 점이 보인다. 먼저, 응시자들이 옛 작품들을 베껴 쓰는 것을 막기 위해 10운시(十韻詩) 대신 고부 한 편, 고시와 율시 중에서 한 편씩 짓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진사시의 난이도를 종전보다 어렵게 해서 시험의 위상을 높이려 한 조치로 보인다. 또한, 25세 이하만이 응시할 수 있게 한 연한법을 없애고, 모든 응시자들에게 생원시와 마찬가지로 「학례강(學禮講)」을 치르도록 하였다. 이는 진사시의 지위를 생원시와 동등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진사시 응시자라 할지라도 가장 기본적인 경서의 이해도를 필수적으로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진사시취조건」은 진사시를 세종 대와는 달리 생원시와 같은 지위를 가진 시험으로 규정하였으며, 이는 소과가 생원시와 진사시로 정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진사시 성립 과정의 의의를 정리하면, 진사시의 시행은 당시 조선의 학교교육을 활성화시키려는 의도가 강했다는 점이다. 진사시는 문과의 예비고사보다는 오히려 향교와 성균관 사이에서 학교제도를 활성화시키려는 학교진흥책에 더 가까운 시험이었다. 그리고 진사시의 고시과목이 시와 부라고 해서 응시자들에게 문예(文藝)적 능력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진사시에서 시험한 고부와 고시는 엄격한 격식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였지만, 경서의 이해에 기초한 용사(用事)의 적절한 구사가 더 중요하였다. 즉, 조선의 진사시는 응시자의 문예적 능력과 경서에 대한 이해와 활용 능력을 동시에 알아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7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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