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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정치학: 대한제국기 혁명개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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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헌미

Advisor
하영선
Major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
Issue Date
2012-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대한제국혁명개념사박영효유길준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외교학과, 2012. 8. 하영선.
Abstract
이 연구의 주제는 1895년에서 1910년 사이 한국에서 국문으로 번역된 서양 정치사 단행본과 신문 기사, 잡지 논설 등을 비교 분석하여 근대 혁명의 한국적 개념화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연구자의 관심은 혁명이 실패하였거나, 미완성되었거나, 유산되었거나, 부족한 곳에서 혁명에 관한 언어가 넘쳐나는 부조화적인 현상에 있다. 연구자는 혁명의 실재를 반영하는 도구로써 혁명의 언어를 취급하기보다는, 혁명에 관한 언어가 그 자체로 혁명적인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라고 주장한다. 연구의 초점은 대중매체와 인쇄물을 통해 이 시기에 유포되고 공유된 혁명에 관한 언설 그 자체의 지형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해 외래의 근대가 언어를 통해 먼저 학습되고, 그 언어에 정합적인 혹은 부정합적인 현실 경험을 통해 언어가 토착적으로 전유되는 개념사 사례연구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대한제국기 혁명개념은 서로 다른 역사해석과 정치적 전망의 교차점이자 전선으로 작용하였다. 혁명이라는 어휘의 채택 여부와 혁명서사의 논조는 이 시기 체제 개혁의 정도와 방법에 대한 저자의 지향과 밀접하게 맞물린다. 1895년에 발행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는 혁명(革命)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다. 1896년 『만국약사(萬國略史)』에서는 프랑스혁명(佛蘭西革命)이라는 말이 최초로 도입되었다. 갑오내각이 붕괴한 뒤 1898년 발행된 『아국약사(俄國略史)』에서는 혁명이라는 말이 삭제되고 민란(民亂)으로 대치되었다. 갑오개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본인 고문관이 쓴 『만국약사』를 통해 프랑스혁명이라는 말이 들어왔지만, 『만국약사』에서도 프랑스혁명의 폭력적 과정과 합중정치는 부정적으로 서술되고, 강력한 황제 중심의 입헌정체가 혁명의 최종적 형태로서 옹호된다. 또, 학부를 통해 발행된 관찬(官撰) 외국사 교과서들은 1900년까지 정치체제 변경을 목적으로 한 인민 폭동을 민란으로 개념화하였다.

『만국약사』 이후 외국사 단행본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 것은, 1899년 6월 황성신문사에서 번역, 간행된 『미국독립사』에서다. 1900년 6월 황성신문사에서 발행된 『법국혁신전사(法國革新戰史)』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전 과정이 상세히 기술된다. 독립협회 해산 직후 황성신문사에서 연달아 출판된 『미국독립사』와 『법국혁신전사』는 정부에 의해 좌절된 독립협회의 개혁 구상안을 계몽하고 선동하기 위한 정치 팸플릿이었다. 건양과 광무 초기 대한제국의 개혁 세력은 우리 정치사회에 적합한 군주, 귀족, 평민간의 권력균형을 구현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모색하고 있었다. 독립협회와 박영효로 대표되는 급진적 개혁론자들은 1787년 미국 헌법과 1795년 프랑스 헌법으로부터 군주, 양반, 계몽된 평민의 일부가 권력을 분점하는 혼합정을 구상하였다. 그에 비해 유길준 등의 온건 개혁론자들은 근대 이행기에 국가 근대화에 드는 비용을 확보하고 국가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권력의 통일성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프러시아의 계몽전제군주정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왕실과 권문세도로 이루어진 기득권 보수 세력은 개량의 수준을 넘어서는 제도 차원의 개혁을 스스로 수행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개혁 세력의 대중 운동과 민권 신장에 위협을 느끼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개혁의 요구를 억압하였다.

1899년을 기점으로 대한제국의 서양사 단행본과 황성신문 지면에서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세계 곳곳에서 혁명이 임박했거나 혁명이 일어났다는 기사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이것은 1898년 말 독립협회 해체를 계기로 개혁세력이 왕조 정부를 통한 체제 전환의 희망을 버리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 급진개혁파의 핵심인물이었던 박영효는 1899년 이래 망명지 일본에서 중국 및 필리핀의 혁명파와 밀접하게 교류하였다. 1900년에서 1903년까지 진행된 박영효의 활빈당 운동은 쑨원의 중국 혁명 프로그램을 모방한 것이었다. 인민 선동용 정치 팸플릿인 1900년의 인권론(人權論)에서 박영효는 민본(民維邦本)과 탕무혁명이라는 전통적 혁명 레토릭을 통해 인민의 자유와 권리 및 저항권이라는 근대 혁명의 이념을 개진한다.

박영효가 이 시기 혁명파의 중심이었다면, 개량파의 중심에는 유길준이 있다. 유길준은 미간행 원고 『정치학(政治學)』에서 프랑스혁명 이후 설립된 민주 의회가 통일성 있는 권력을 창출하지 못함으로써 인민의 뜻에 의해 전제군주정으로 회귀하는 양상이 반복되는 것을 비판한다. 박영효가 젊은 의친왕을 옹립하는 혁명을 통해 체제 변혁을 이루고자 한 반면, 유길준이 대한제국에 적용 가능하며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정치체제는 프러시아식 계몽절대군주제였다. 이러한 입장은 1900년 유길준이 연루된 혁명혈약서 사건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애국계몽기 혁명담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루소가 부각되면서 인민의 일반의지와 천부적 자연권에 기반한 혁명의 정당성이 인정되지만, 혁명의 선취요건으로 민지(民智)를 강조, 실력양성론으로 귀결된다. 둘째, 혁명유신(革命雜新)이라는 일본발 어휘가 출현하면서 혁명의 급진성이 부인되고, 한국의 현 상황에서 혁명의 불가능성이 강조된다. 의병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신문지법에 의한 통감부의 언론 검열 속에서 혁명을 직접적으로 찬성하고 선동하는 언설을 지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가운데 세 종류의 글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 1907년 발행된 『비율빈전사』와 그 속에 전문이 기재되어 있는 민주공화헌법이다. 둘째, 러시아와 중국 혁명당의 혁명 프로그램을 보여주는 일련의 외국 단신들이다. 셋째, 이러한 프로그램의 한국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는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관련 논설이다.

1895년 이래 대한제국의 혁명개념은 모두 혼합정의 형태를 취한 입헌군주정을 지향했다. 가장 급진적 개혁세력이었던 박영효의 혁명 구상도 젊은 의친왕을 옹립하는 것이었지, 왕정 자체의 폐기가 니었다. 그러나 1907년 고종이 강제 양위함으로써, 전통의 부담 없이 민주공화주의가 본격적으로 개진된다. 1907년 발행된 『비율빈전사』에는 혁명이라는 어휘가 수도 없이 사용될 뿐 아니라, 필리핀 제 1공화국 헌법의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같은 시기 청국에서 입헌이 반혁명 개량주의의 구호였던 데 반해, 준 식민지 상황의 대한제국 말기에 민주공화를 천명하는 헌법을 논하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행위였다.

정치적 자유와 독립을 위한 폭력 투쟁이 역사 진보의 불가피한 방향임을 보여주는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 동향 기사가 연일 보도되는 가운데, 1909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그리고 해외 무장독립투쟁 단체들이 스스로를 한국혁명군과 조선혁명당으로 개념화하기 시작한다. 이제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의 이념은 러시아, 중국, 필리핀의 혁명 현실과 결합하여 한국적 혁명의 프로그램을 낳기에 이르렀다. 1910년대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들은 거의 예외없이 민주공화정체를 지향한다. 1920년대 한성, 상해, 러시아령의 임시정부들 헌법에서도 일제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천명한다. 이것은 1948년 제헌헌법으로까지 이어진다. 대한제국에는 혁명이 없었다. 그러나 혁명의 언어는 면면히 살아남아 역사적 의미의 층위를 더해가며 그 자체로 또 다른 혁명적 현실을 추동하였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9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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