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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애치슨과 미국의 한반도 정책-한국전쟁 시기를 중심으로
The Role of Dean Acheson in the Korean War: An Analysis by Actor-Specific Meth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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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남시욱
Advisor
신욱희
Major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
Issue Date
2015-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애치슨한국전쟁냉전트루먼맥아더NSC 68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외교학과, 2015. 2. 신욱희.
Abstract
이 연구는 1990년대 중반 경에 등장한 탈냉전시대의 외교정책분석(FPA) 이론인 행위자특정접근법(actor-specific approach)으로 애치슨이 미국의 한반도정책, 특히 한국전쟁 기간 중에 수행한 역할을 분석하는데 목적이 있다. 행위자특정 접근법은 전통적인 국제관계론의 행위자 일반분석(actor-general approach) 방법과는 달리 국제정치라는 체스게임을 하는 개별적 인간 행위자에 분석의 초점을 둔다. 발레리 허드슨이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만약 국제관계이론이 인간을 국제정치의 주행위자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그 국제이론은 변화, 창조, 설득, 책임의 세계를 묘사할 수 없다. 현대의 FPA 접근법은 추상적 존재인 국가나 정부 대신 인간정책결정자를 이론적 교차점에 자리 잡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몇 가지 이득을 제공한다. 그 이득 중 하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알렉산더 웬트와 월터 칼스네스가 주창한 구성주의이론의 핵심개념인 주체-구조의 문제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는 점이다.
이 연구의 결과로 얻어진 중요한 발견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 즉 트루먼행정부의 한국전쟁 수행과정에서의 애치슨의 역할, 즉 그가 발휘했거나 성취했거나 책임 져야 할 창조성 설득 변화 공헌 그리고 책임은 과연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애치슨은 창조성을 가지면 국가나 국제사회의 현존하는 제도와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닌 시민운동가 출신의 정책결정자이자 실천가, 즉 정책집행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미국의 전통인 고립주의 타파와 유럽문제개입을 주창한 그는 브레튼우즈체제와 덤버튼옥스체제로 상징되는 전후질서 수립에 적극 참여했으나 미소냉전이 시작되자 소련봉쇄정책을 주도적으로 입안했다. 그러나 트루먼독트린과 마셜계획 등 초기의 봉쇄정책으로는 소련의 팽창을 막는데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애치슨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힘을 통한 새로운 봉쇄정책’ 지침인 NSC 68을 채택하는데 앞장섰다(어떤 학자는 이 같은 애치슨의 창조적 발상을 '구성주의적 순간'이었다고 묘사했다). NSC 68은 기존 국제구조의 변화를 추구한 애치슨에게는 최대의 성공이었다. 그는 미국의 세계적 냉전전략의 틀 안에서 한국정책을 입안한 트루먼행정부의 핵심인물이었다. 애치슨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이 입안한 새로운 냉전전략 범위 안에서 이에 대응했다. 그는 한국전쟁 수행에 관련된 기본방침을 수립하고 군사전략뿐 아니라 구제적인 작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그의 정책은 극수소의 예외를 제하고는 일반적으로 트루먼이 받아들였다. 트루먼행정부는 애치슨의 주도로 일본의 안전까지 위협할 수 있는 소련의 남한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김일성의 남침을 군사력으로 저지했다. 따라서 한국은 냉전의 피해자이면서 수혜자이기도 하다.
둘째, 애치슨의 최대 성취는 북한의 남침을 즉시 유엔안보이사회에 회부하는 신속성을 발휘한 점이다. 안보리는 최초에는 북한군의 자진 철수를 권고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김일성이 이에 불응하자 군사적 제재를 가하는 결의문을 채택해 스탈린과의 냉전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애치슨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유엔군의 롤백작전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총회 결의로 채택함으로써 소련이 유엔안보리에서 거부권 행사를 통해 저지하는 것을 막는데 성공했다. 그는 미국이 지배하는 총회에서 한국통일결의안을 통과시킨 다음 ‘평화를 단결’이라 불리는 유엔역사 상 전례 없는 결의안을 채택토록 했다. 유엔군의 북진통일은 비록 중국의 개입과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 실패로 좌절되고 말았지만, 유엔회원국들의 공개적인 축복 속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려는 애치슨의 노력은 스탈린이 김일성과 함께 남한을 무력으로 정복하기 위해 무대 뒤에서 비밀음모를 꾸민 것에 비하면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애치슨의 최대 실책은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경우 한국전쟁에 개입하겠다는 중국의 거듭된 경고를 단순한 엄포라고 오판한 점이다. 마오쩌둥은 참전단계에서 스탈린의 공군지원 약속 파기로 병력파견을 망설이는 등 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했다. 애치슨은 중국이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김일성에게 외국세력이 한국사태에 개입하는 경우 참전하겠다고 사전에 약속한 사실을 몰랐다. 여기에는 미국정보 당국의 정보실패도 있었지만 애치슨의 개인적 판단착오도 있었다. 애치슨은 그의 한반도 통일 노력이 좌절되자 방어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중국에 참전의 구실도 안 줄 가능성이 있는 평양-원산 선에서 유엔군의 진군을 멈추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애치슨의 정책이 실패한 다른 대표적인 예는 한국을 경제적으로 회복시켜 정치적 안정을 기함으로써 내부전복을 막아 한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1947년에는 트루먼독트린 방식으로, 1949년에는 마셜플랜 성격의 과감한 경제지원을 제공하려다가 의회의 반대로 두 번 다 실패한 점이다. 그는 1950년의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하는 듯한 현명하지 못한 언급을 한 점과 김일성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계속적인 정보보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예방조치는 물론이고 경고조차 하지 않고 방치한 트루먼행정부의 정책적 과오에 일단의 책임을 분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종합적으로 살펴 볼 때, 애치슨은 NSC 68 등 ‘힘을 통한 봉쇄’ 전략의 수립을 통해 미소냉전체제라는 2차 대전 이후의 국제질서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신속한 한국전쟁 참전을 주도해 한국 방어에 성공하는 동시에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함으로써 소련과의 대결에서 미국의 최종 승리를 위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29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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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Social Sciences (사회과학대학)Dept. of Political of Political Sciences and International Relations (정치외교학부)International Relations (외교학전공)Theses (Ph.D. / Sc.D._외교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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