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차이의 현상학

Abstract

성적 차이는 하나의 의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성적 차이를 지각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성 혹은 여성으로 규정되며, 그러한 최초의 규정은 그 개별 주체의 삶 전체를 관통하여 항구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남성 혹은 여성은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 하나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행위에서부터 의식에 드러나지 않는 심층에 이르기까지 최종 심급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차를 진술하고자 할 때 우리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남성과 여성은 단지 생식기의 외양을 기준으로 한 생물학적 차이로 환원될 수 없으며, 후천적인 사회문화적 요인들에 의한 심리적 차이로도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적 차이는 우리의 지각적 경험에 매우 익숙하고 명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의문으로 남아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성적 차이에 대해서 묻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야만 한다. 본 연구는 메를로-퐁티 현상학의 논의에 기초하여 성적 차이의 현상을 해명하고자 한다. 본고의 주요 논지는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현상학이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주체는 익명적이고 성별 중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성적 주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적 차이는 사실성의 차원에서는 실재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발생적 분석으로 드러나는 본질의 차원에서는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성적 차이는 발생의 과정에서 습성의 효과로서 발현된 지향적 삶의 양식이 된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적 이행에 따른 발생적 정초의 구조를 탐구하는 발생적 현상학의 방법론적 태도를 취한다. 발생적 현상학의 분석항은 자신의 고유한 신체를 통해 세계에 거주하며 동시에 세계로 향해 나아가는 세계-에로-존재와, 역사성과 상호주관성을 지니며 주관-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생활세계이다. 신체적 주체와 세계 간의 상호작용은 우리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고, 이러한 주체와 세계의 관계 맺음의 특정한 양태가 반복적으로 수행되면서 개인의 존재방식은 물론 지각적 경험과 대상구성의 지평을 틀 지우는 습성적 통각체계가 형성된다. 본고에서 현상학의 주체로서 새롭게 제시하는 성적 주체는 메를로-퐁티 현상학의 재해석 및 재구성을 동기 짓는 근본 토대에 해당한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신체/정신의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 신체를 통해 세계 속에 닻 내린 채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신체적 주체와 그 주체의 실천적 가능성의 지평으로서 세계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메를로-퐁티는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객관적 사유들을 거부하고 세계-에로-존재를 통한 우리의 직접적 경험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신체적 주체를 신체도식을 통해 중점적으로 해명할 것이다. 자신의 신체를 암묵적인 양상에서 파악하는 신체도식에 의해 고유한 신체적 공간성은 연속적이고 전체적인 통일성의 체계로서 드러나며 주체는 세계에 거주하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경험한다. 또한 신체적 주체의 운동성은 세계를 지향하고 그에 스스로를 온전히 기투할 수 있는 나는 할 수 있다로서 실천적 가능성의 능력과 연관이 되는데, 이 때 세계는 이러한 근원적인 지향성의 상관자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여성적인 신체적 주체가 자신의 고유한 신체를 경험하는 방식이나 세계와의 관계 맺음의 양태는 메를로-퐁티의 기술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여성적 주체의 신체는 전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신체라기보다, 나와 나-아님의 기준이 작동하면서 일부의 주체화와 일부의 자기-대상화를 동시에 수반하는 양의적인 신체이다. 이로써 여성적인 신체적 주체는 신체적 공간성을 불연속적이며 단절된 것으로 경험하게 되고, 나아가 자신의 신체를 파편화시켜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통제, 조작을 요하는 대상으로서 간주하게 된다. 또한 신체적 운동성은 근원적인 지향성이 반복적으로 제한됨에 따라 자기-부과적인 나는 할 수 없다의 금지된 지향성에 연관된다. 이 때 세계는 다양한 의미 연관에 개방되어 있는 가능성의 지평이 아닌 금지된 지향성의 상관자로서 획일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생활세계로 드러난다. 이는 신체도식의 왜곡을 초래하며 나아가 의식적인 차원의 신체이미지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여성적인 신체적 주체는 주관-상관적으로 드러나는 상황으로서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특정한 행위 양식, 존재 방식을 체화하게 되며, 이는 여성적 체현으로서 여성성의 구체적 내용을 이룬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상학의 주체가 성적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현상학의 근본이념과 관련이 있다. 현상학은 근본적으로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며 규정하는 본질학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현상학은 본질학임과 동시에 그러한 본질을 다시 실존의 자리에 되돌려 놓는 학이기도 하다. 이 때 실존의 자리는 신체적 주체와 세계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형성하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상황, 곧 신체적 주체가 실존적으로 처해있는 사실성의 자리이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의 서문에서 그 스스로 본질학이면서 사실학으로서의 현상학을 천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차의 요소를 현상학적 분석에서 간과함으로써 절반의 유효성만을 지니는 현상학에 머무르게 되었다. 다시 말해 메를로-퐁티는 인간을 신체적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그와 관계 맺는 생활세계의 발생적 층위를 분석하면서 보편적인 인간 일반의 경험의 본질구조를 해명하는 데는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의 본질구조를 다시 사실성의 차원으로 되돌려 놓을 때 애초에 그가 상정한 보편적인 인간 일반이란 결코 보편이 아닌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경험의 본질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성적 차이의 요소를 판단중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실존적 사실학의 측면을 방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때 우리는 다시 현상학의 근본이념으로 되돌아가 문제를 재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본질학이면서 동시에 사실학인 현상학은 익명적이고 성별 중립적인 신체적 주체가 아니라 실존적 의미의 성적 주체를 다루어야 한다. 이와 연관하여 두 번째 주장이 제기된다. 현상학의 주체가 성적 주체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성적 차이는 가장 근원적인 경험의 발생지점에서부터 본질적인 것인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피해갈 수 없게 된다.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있고, 그것이 남성 혹은 여성을 불변하는 어떤 것으로서 결정한다고 한다면 주체와 세계의 상호작용은 무의미하게 되고, 우리는 다시 객관적 사유의 이분법적 논리에 빠지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성적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성적 차이가 사후적으로 신체에 각인되는 것인지의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다시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성적 차이가 언제부터 등장하게 되는지, 이른바 없음에서 있음으로 이행하는 절대적 간극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설명에서는 신체가 수동적인 기입의 표면으로 전락하면서 세계-에로-존재의 능동적인 주체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어 다시금 객관적 사유의 이분법적 도식에 귀착된다. 기존의 여성주의 연구는 표층적인 현실에서 드러나는 성적 차이의 현상에 국한하여, 생물학적인 토대를 상정함에 따른 본질주의로 접근하거나 후천적인 사회문화적 영향에서 원인을 찾는 구성주의적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들은 성적 차이의 양상을 기술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어떻게 실존적인 신체적 주체들에게 구현되는지와 관련된 메커니즘 자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성적 차이를 현상학적으로 접근하여 실체적인 차원에서 본질은 아니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실재적으로 작동하는 지각적 유형으로 파악한다. 이로써 기존의 섹스/젠더 담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적 차이를 지향적 삶의 양식들 간의 차이로서 새롭게 규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발생적 현상학의 관점에서 신체적 주체와 생활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층위들을 분석하고, 그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습성적 통각체계의 형성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생활세계는 경험의 토대로서의 지평이며, 이 속에서 잠재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사태들이 의미를 지닌 것으로 신체적 주체에게 경험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드러난 세계가 지각 주체와 완전히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주체가 살고 있고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총체이자, 그 지각에 대해 특정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양식들의 총체로서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생활세계는 이론적이고 문화적인 표층의 세계부터 직접적 경험세계인 심층의 세계까지를 아우르며 침전과 습성의 형태로 발생적인 역사성과 상호주관성을 지닌다. 이에 상관적으로 신체적 주체의 측면에서도 의식적이고 반성적인 층부터 무의식적이고 선반성적인 심층과 같은 다층적인 발생의 층위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때 경험의 가장 근원적인 발생의 지점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이분법적인 성적 차이가 아니라, 아직 구체적 자아로서의 나도 형성되기 이전의 자아극의 형태로서 자기보존본능과 세계성의 본능을 근원본능으로 담지하는 기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지점에 자아극은 텅 빈 공허한 극이 아니라 본능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에 조차 성적인 것 전체로서의 섹슈얼리티는 존재의 바탕을 이룬다. 이러한 섹슈얼리티가 이분법적인 성적 차이로 고착화되는 것은 습성적 통각체계의 형성과정을 통해 해명할 수 있다. 습성은 의미핵으로서의 신체가 세계와의 상호공조를 통해 고유한 신체도식 속에서 세계를 파악하고 통합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신체적 주체에 상관적인 세계가 특정한 유형적 의미로 경험되는 것에 따라 다르게 형성된다. 습성적 통각체계는 능동적 영역과 수동적 영역으로 구분되며, 이는 각각 의식적 차원에서의 태도취함의 습성과 비반성적 차원에서의 통각체계와 능력의 습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능동적 영역에서 근원설립과 침전,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태도취함의 습성이란 이성적인 동기에 의한 판단이나 가치평가와 연관된다. 수동적 영역에 이르러 모든 지향적 작용은 발생의 연관 속에서 계속해서 타당함과 연상적인 전이를 통해 타당성의 보존과 함축을 수행한다. 즉 수동적 영역의 통각체계와 능력의 습성을 통해 정립된 타당성 일체는 이후의 타당성 정립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고도의 의식적인 지향적 작용들을 토대 짓는 것이다. 이러한 습성적 통각체계의 형성 메커니즘은 초월론적 발생의 근원시작에서 성적인 것 전체로 존재하던 섹슈얼리티가 점차 이분법적인 성적 차이로 대체되는 발생의 과정을 나타냄으로써 여성적 체현의 문제를 해명해 준다. 최초로 근원설립된 지향적 작용의 타당성은 이후 반복적인 연상적 전이에 의해 수동적인 영역에서부터 타당한 것으로 고정되고, 이는 습성적 통각체계를 형성함으로써 더 이상 반성적으로 의식되지 않는 일종의 자연으로서 여겨지게 된다. 수동적 영역에 침전된 성적 차이의 타당성은 이후의 지각적 경험의 지평을 윤곽 지으며, 나아가 의식적인 판단과 가치평가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성적 차이는 신체적 주체가 그를 둘러싼 생활세계의 요청에 응답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습성적 통각체계의 작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성적 차이는 신체적 주체가 세계-에로-존재로서 세계와 관계 맺으며 실재적으로 경험하는 실존적 삶의 양태의 발현이며, 이는 신체적 주체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체화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메를로-퐁티 현상학이 선취한 신체적 주체와 세계에 대한 이해 위에서, 메를로-퐁티가 다루지 않았던 성적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넘어서는 성적 차이의 현상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새롭게 제시되는 성적 차이의 현상학적 테제들은 메를로-퐁티가 추구했던 현상학의 근본이념에 한층 더 부합하는 방식으로 그의 철학을 재해석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메를로-퐁티 현상학과의 단절이 아닌 연속적 확장으로 볼 수 있다. 메를로-퐁티 현상학이 성차적 요소를 간과함으로써 신체적 주체 일부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현상학에 국한되었다면, 성적 차이의 현상학은 기존의 이론이 다루는 신체적 주체의 범위를 확장하여 보다 사실성의 차원에서 직접적 경험에 가까운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즉 기존의 본질학으로서의 현상학적 측면에 실존적인 사실학으로서의 측면을 보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메를로-퐁티 현상학에 대한 비판적 독해는 이론으로서의 메를로-퐁티 현상학 자체의 내적 지평의 확장과 더불어 실천적 운동으로서 현실에 참여하는 외적 지평의 확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도약의 지점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