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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의 비물질주의적 입자론 -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대상의 문제 - : Berkeley's Immaterialistic Corpuscularianism - The Problem of Yet to Have Been Perceived Objec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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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오아론

Advisor
이석재
Major
인문대학 철학과
Issue Date
2015-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버클리비물질주의적 입자론지각되지 않는 대상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대상자연 법칙기계적 구조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철학과, 2015. 2. 이석재.
Abstract
본 논문의 목적은 버클리의 관념론이 입자론과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버클리가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실제로 입자론을 받아들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입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점을 보이는 것이다.
버클리의 관념론이 입자론과 양립하기 어렵다고 흔히 생각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입자는 현미경을 통해서도 관찰되지 않을 만큼 작아서 우리의 감각을 통해 한 번도 경험되지 않은 대상으로 상정되므로, 입자의 존재는 관념론의 핵심 원리인 esse est percipi 원리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원리에 따르면 모든 물리적 사물들의 존재는 정신에 의해 지각됨으로써 성립하므로, 정신에 의해 지각되지 않고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물질적 실체는 부정된다. 그런데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대상은 버클리가 그의 저작들 전반에 걸쳐 거부하고자 했던 지각 불가능한 물질적 실체와 같은 위상에 있는 것 아닌가? 둘째, 일반적인 입자론에서는 입자의 크기, 모양, 운동, 배열 등의 일차 성질들이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현상들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상정된다. 그런데 이는, 감각 관념들을 산출하는 유일한 원인은 신 뿐이며 그 외의 어떤 것도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버클리의 핵심 원리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버클리 체계 내에서 입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입자가 원인이 될 수 없다면 어떤 설명적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들 외에도 버클리가 반입자론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텍스트들은 버클리가 초기에 입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주장을 강화시키고 있다.
나는 먼저 몇몇 연구자들로 하여금 버클리가 입자론을 거부했다고 해석하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구절들을 재해석하고자 했다. 다우닝은 버클리가 초기 저작들에서 보인 태도가 입자론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원리론』 102절을 제시한다.

우리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해 무지하다고 스스로 선언하게 되는 큰 동기 하나는,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 내에 그 성질들의 원인을 포함하고 있다는, 또는 각각의 대상들에는 내적인 본질(inward essence)이 있으며, 이 내적인 본질은 그것의 식별 가능한 성질들이 흘러나오는 원인이고, 그 성질들이 이 내적인 본질에 의존하고 있다는 현행의 의견이다. [...] 최근 들어 현상들은 기계론적 원인들, 말하자면, 감각될 수 없는 입자들(insensible particles)의 모양, 운동, 무게와 같은 성질들로 환원되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영혼 외에 다른 동작주(agent)나 작용인은 없다. 다른 모든 관념들과 마찬가지로 운동도 완전히 무력(inert)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 따라서 색이나 소리의 산출(production)을 모양, 운동, 크기 등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은 헛된 수고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와 같은 시도들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는 한 관념이나 성질이 다른 것의 원인으로 돌려지는 경우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버클리는, 감각 가능한 성질들을 산출하는 원인이 감각 불가능한 사물들 그 자체 내에 들어있다고 간주함으로써 사물의 본성에 대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는 물질주의자들을 논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의 예시로, 현상들의 원인을 입자의 일차 성질에 돌리고 있는 입자론이 등장한다. 여기서 버클리는 분명히 정신에 독립적인 물체의 내적인 본질이 감각적 현상들의 원인이라는 물질주의적 원리와 결합된 입자론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적 입자론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이유로 버클리가 입자론 일반을 거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102절에서 버클리가 입자론 전체를 거부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아직 남아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다우닝은 102절의 본문에서 그와 같은 시도들에 대한 버클리의 언급에 주목한다. 다우닝은 색이나 소리의 산출을 모양, 크기, 운동 등으로 설명하려는 노력과 같은 시도들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는 대목으로부터 버클리가 입자를 통한 과학적 설명 전체를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후의 맥락을 고려하여, 그와 같은 시도들을 색이나 소리의 산출을 모양, 크기, 운동 등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읽는다면, 여전히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버클리가 입자론 전체를 거부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즉, 입자가 감각적 성질들을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입자가 감각적인 성질들을 비인과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버클리는 분명 인과적 설명을 대체할 다른 종류의 설명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모든 자연 현상의 원인은 오직 신 뿐이므로, 이러한 전제 하에서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은 물리적인 대상 사이의 인과 관계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버클리는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은 관념들 간의 규칙성을 밝히는 데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원리론』 50절), 그 현상이, 신이 관념을 산출할 때 따르는 자연법칙에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원리론』 62절). 따라서 입자가 원인이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입자의 성질들이 감각적 현상들과 일정한 규칙성 하에 관념으로 산출될 수 있다면, 입자가 현상들을 설명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적절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입자가 어떤 의미에서 관념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달리 말하면, 물리적 사물의 존재가 지각됨으로써 성립한다고 할 때,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대상이 존재자의 목록에 포함될 수 있는가? 버클리는 지각되지 않는 대상에 대한 현상론적 설명을 제공하는데,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대상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각되지 않는 대상에 대한 현상론적 접근은 누구에게도 지각되지 않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을 제공해 준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특정한 조건에 놓인다면, 우리는 그 사물을 지각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입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만일 우리가 이러저러한 상황, 예컨대, 지금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현미경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에게 입자가 지각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현상론적 해석을 따를 경우, 우리가 비록 입자를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더라도, 입자가 지각될 수 있는 조건을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입자가 존재한다고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현상론적 접근은 우리가 파악한 이 세계에 대한 정보들만 가지고 존재의 의미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입자의 존재가 다른 경험적 데이터와 잘 맞물리는 한에서, 입자의 존재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입자의 존재가 현상론적 해석으로 잘 설명된다면, 버클리가 현상론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버클리 체계가 입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버클리는 실제로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대상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 때 그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신이 확립한 자연 법칙이다. 버클리에 따르면 신이 자연 법칙에 따라 물리 세계를 운영하는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편의를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지혜로운 목적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이러한 지혜로운 목적 하에서 자연 법칙을 확립했다는 사실은 자연 법칙의 본성으로 항상성과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각 관념의 산출에 있어서 자연 법칙이 시공간적으로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신의 지혜로운 목적이 달성되지 못하리라는 점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신이 따르는 자연 법칙의 항상성은 지각되지 않는 물리적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반사실적 가정문의 참을 최소한으로 확보해주기 때문에 지각되고 있지 않은 영역에까지 존재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자연 법칙이 물리 세계의 일부에 한정되지 않고 만물에 보편적으로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존재자를 지각된 것들로부터 추론할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우리가 오직 지각되는 영역 내의 데이터만으로 자연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자연 법칙의 본성인 보편성과 항상성에 의해, 지각되는 영역 너머의 세계에까지 존재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또한 버클리는 신이 창조한 이 세계의 모습이 유한한 정신에게 미처 다 파악되지 못할 만큼 매우 풍요롭고 다양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감각도 상상력도, 눈부시게 빛나는 세간들로 온통 채워진 그 무한한 규모를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열심히 궁구하는 정신이 아무리 최대한 안간힘을 쓴다 하더라도 헤아릴 수 없는 여분이 늘 파악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세 대화』 211) 신이 감각 관념들을 무한히 복잡하게 산출하기 때문에 언젠가 지각될 것들이 항상 남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경험주의적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지각되는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한층 강화되었을 것이다. 버클리는 특히 현미경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간다는 점에 주목했다. (『신시각론』 85절) 이로부터, 더 정교한 현미경이 발견된다면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입자들이 지각되리라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뒤따라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정리하면, (1) 신이 창조한 물리 세계는 무한히 복잡하기 때문에 유한한 정신이 헤아릴 수 없는 여분이 항상 남아 있다. (2) 신은 항상적이고 보편적인 자연 법칙에 따라 관념들을 산출한다. (3) 버클리는 거시 세계에서 기계론적 법칙에 따라 관념들이 산출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원리론』 60-66절) 이러한 세 명제들을 받아들이면, 이로부터 버클리는 우리에게 미처 파악되지 않은 여분으로 남아있는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미시 세계가 실재하며, 우리에게 만일 미시 세계에 대한 관념이 산출된다면 미시 세계에 대한 관념도 거시 세계와 마찬가지로 기계론적 법칙에 따라 산출될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였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버클리가, 한 번도 지각되지 않은 입자들이 존재하며, 그 입자들의 크기, 모양, 운동, 배열 등이 우리에게 지각되고 있는 현상들과 규칙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그렇지 않다고 해석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버클리가 뉴턴 역학에 대해 도구주의적 태도를 취했던 것처럼 입자론도 도구주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에 대해 고려해보자. 도구주의란, 어떤 과학 이론에 포함되는 이론적 구성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과학 이론을 물리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버클리는 뉴턴 역학의 주요 개념인 힘이 지각 불가능하므로 실재하지는 않지만, 감각 가능한 결과들을 추론하거나 계산하는 데 유용하므로 무조건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이 때 힘은 수학적 가설로 취급된다. 포퍼와 워녹은 버클리가 입자를 힘과 같은 도구주의적 존재자로 다루고 있다고 본다. 이는 입자를 지각할 수 없는 이론적 존재자로 상정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입자에 대한 관념이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곧바로 입자가 힘을 지각할 수 없다고 말할 때와 동일한 의미에서 지각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지각 가능성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지각할 수 없다고 해서 원리상 지각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힘을 지각할 수 없다고 할 때에는 원리상 지각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만 입자를 지각할 수 없다고 할 때에는 원리상으로는 지각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지각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입자를 원리상으로 지각 가능한 대상으로 취급할 근거는 무엇인가? 버클리에게서 지각한다는 것은 관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을 통해 지각된 관념들은 감각적 성질들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물리적 사물들은 색, 모양, 연장, 냄새, 맛 등 수없이 많은 감각적 성질들 또는 감각적 성질들이 합성된 것에 불과하다. (『세 대화』 175) 지각한다는 것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고,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 색, 모양, 소리 등의 감각적 성질들을 갖는다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감각적 성질들이 마음 속에 떠오르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지각 가능하다면 그것은 감각적 성질들의 결합으로서 마음 속에 떠오를 수 있어야 한다. 즉, 원리상 지각 가능한 대상과 원리상 지각 불가능한 대상을 나누는 기준은 감각적 성질들로 이루어진 것인지의 여부에 있다. 힘은 그 본질에 따라 원리상 지각할 수 없는 대상이다. 힘은 어떤 감각적 성질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상상은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주석』 582) 반면에 입자는 감각적인 성질들로 이루어진 대상으로 상정된다. 기계론적 설명에서 입자의 크기, 모양, 운동 등의 성질들은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현상들과 일정한 상관 관계를 맺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거니와, 버클리 자신이 입자들은 감각적 성질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이리스』 162) 그러므로 입자는 도구주의적으로 다뤄질 이유가 없다. 버클리는 원리상 지각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재할 수 없는 존재자에 한해서 도구주의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지각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입자를 도구주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주장은 버클리의 도구주의적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버클리의 수학적 가설 개념과도 일관적이지 않다.
In this paper, I will argue that Berkeley saw no conflict between immaterialism and corpuscularianism, and, in fact, adopted an immaterialistic corpuscularian position. That is, mind-dependent corpuscles are something that Berkeley accepted and integrated into his natural philosophy. I hold this position because I believe that there is textual evidence in his early texts that shows that Berkeley realizes the possible advantages of corpuscles for immaterialistic explanations of natural phenomena. Before presenting my positive thesis, I first considered some commentators argument that Berkeley rejects any form of corpuscularianism in virtue of his immaterialism. I disagree with their position because I believe their assessment is based on a specific reading of corpuscularianism, which I call causal corpuscularianism. While Berkeley may have rejected causal corpuscularianism, I argue that he did not reject the system of corpuscularianism outright. My next task is to show that corpuscularianism is fully consistent with Berkeleys immaterialism. Specifically, I will argue that Berkeleys thought of internal mechanisms of the physical things and his esse est percipi principle do not conflict with the existence of yet to have been unperceived corpuscle. And then, I will argue that Berkeley must have adopted immaterialistic corpuscularianism given the problem posed by his commitment to the Laws of Nature which are universal and uniform. Thats why it opens up the possibility of minds inferring objects that have never been perceived. I will argue that immaterialistic corpuscularianism not only solves this problem but also provides an immaterialistic scientist with a greater domain of inquiry, which he would otherwise will not have. Lastly, I will try to answer two kinds of possible objections.
The upshot of this paper is that Berkeleys immaterialism can embrace anything insofar as it satisfies the following three conditions: 1) it does not exist independent of minds and possesses no causal power, 2) it can be reasonably inferred from observed phenomena and universal and uniform Laws of Nature, and 3) it can be perceived as long as a finite mind is in an appropriate circumstance, in which it will be able to perceive it. This conclusion is grounded in and is consistent with Berkeleys early texts, or so I have argued.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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