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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링 왕조 초기 왕국과 교회 관계 : The Relationship between Frankish Kingdom and Church in early Carolingia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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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박준규

Advisor
박흥식
Major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중세 초기프랑크 왕국카롤링 왕조피피누스 3세보니파티우스정치와 종교의 관계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서양사학과, 2017. 2. 박흥식.
Abstract
본고는 8세기 중반 피피누스 3세의 치세에 프랑크 왕국과 교회의 관계 진전에 주목하고 그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규명하려는 시도이다. 중세 초기 사가들은 프랑크 왕국에서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의 상관성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기존의 연구들은 왕국과 교회가 이미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양상이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왕국과 교회의 협력이 정점에 달했던 카롤루스 마그누스 시대에 대해서만 주된 관심을 쏟았을 뿐 변화의 계기가 마련된 피피누스의 시대를 소홀히 하는 한계를 갖는다. 전제가 성립될 수 있었던 원인과 배경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강제적·폭압적 방식으로 교회를 다루었던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와는 달리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교회를 존중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피피누스의 교회 포섭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변화였다. 메로빙 왕조를 몰아내고 카롤링 왕조를 수립했던 피피누스는 왕국의 안정과 새로운 왕조의 기틀 확립을 위해 기독교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려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이에 본고는 8세기 중반 당대의 기록을 담고 있는 연대기 사료들과 기독교 성인전을 검토하며 피피누스가 교회를 포섭하여 통치자로 자리매김해나가는 과정을 살핀다. 이 과정에서 앵글로색슨 선교사 보니파티우스의 행적을 연관지어본다. 피피누스가 그의 형 카를로마누스와 공동으로 궁재이던 시기에 보니파티우스는 프랑크 교회 개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프랑크 교회에 계서제가 부재하고 속인들이 교회의 행정과 운영에 개입하는 현실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아울러 그는 프랑크 교회에 교황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도록 힘썼다. 이러한 그의 개혁 노선은 게르마니아 종교회의의 칙령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하지만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카를로마누스가 모종의 이유로 왕국의 정치에서 물러난 후 프랑크 교회의 개혁은 피피누스가 주도하기에 이른다. 피피누스는 보니파티우스의 개혁 노선을 전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이용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치는 교회 재산의 전용을 재허용한 747년의 법령이었다. 또한 보니파티우스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풀다 수도원이 760년대 중반 왕국 수도원 체제에 편입된 사건을 통해 피피누스가 취했던 교회 정책의 독자성을 엿볼 수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카롤링 왕조 초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던 피피누스가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의 관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맺어갔는가에 대한 연구는 중세 초기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또한 그 동안 장막에 가려져 있던 피피누스라는 인물이 카롤링 왕조의 기틀 확립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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