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穆宗-武宗 시기(820-846) 唐朝의 藩鎭 制御
从穆宗到武宗时期(820-846)唐朝的藩镇控制 ―以河北三镇及其邻近藩镇为中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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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조종성
Advisor
조성우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4-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唐 後期藩鎭河北三鎭二元的 통제節度使 세습劉稹의 난會昌廢佛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4. 2. 조성우.
Abstract
憲宗 시기까지 조정은 藩鎭이 조정의 권위를 인정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우선순위를 달리하며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정책적 노선 위에서 唐朝는 일시적이나마 전체 藩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憲宗 시기의 전쟁으로 인해 唐朝의 재정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였다.
憲宗 사후 帝位에 오른 穆宗은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藩鎭의 병력을 감소시키려 하였고, 이는 藩鎭의 주 병력인 官健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들 官健은 官에서 모집한 직업 군인으로, 官健 직위를 세습화하는 과정에서 農耕 능력을 상실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官健의 이러한 반발을 틈타 河北三鎭에서는 재차 반란을 일으켰고, 조정에서는 이를 제압하는 데 실패함으로 인해 河北三鎭은 재차 할거하게 되었다.
물론 河北三鎭 내 권력구조의 불안정성 및 조정의 인근 藩鎭 장악 등의 이유로 인해 河北三鎭이 추가적으로 확장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초래된 불안정한 상태는 河北三鎭과 유사한 행보를 취하려는 藩鎭의 등장, 그리고 河北과 인접한 洛陽에의 위협 등 일련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조정은 河北三鎭의 할거는 인정하되, 할거를 지향하는 藩鎭이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억제하는 二元的 노선을 취하였다. 조정은 특히 節度使를 계승하려 시도하는 河南 및 河北의 藩鎭들을 저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節度使 직위의 세습은 해당 藩鎭 내의 제어권 일체가 조정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穆宗에서 文宗에 이르는 시기 조정은 이러한 시도를 철저히 억눌렀고, 이를 통하여 조정은 節度使의 임명권을 확보함으로써 河北三鎭과 인접한 藩鎭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는 곧 河北三鎭을 제외한 河南과 河北의 藩鎭이 조정에 순복하는 二元的 구도의 형성으로, 조정은 이를 통해 河北三鎭의 할거가 藩鎭 전반의 할거로 번지는 사태를 예방하였다. 한편 河北三鎭과 洛陽 사이에 河東 藩鎭, 河陽三城 藩鎭 등을 중심으로 한 방어선이 형성되는 효과로 인해 河北三鎭이 洛陽에 미칠 수 있는 위협은 감소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정은 河北三鎭이 할거하면서 나타난 문제의 상당부분을 무마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藩鎭 제어 질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昭義節度使의 세습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昭義節度使 劉悟의 사후 그 아들 劉從諫이 昭義節度使를 계승한 것은 조정에서 河北三鎭 인근의 藩鎭들에 대한 제어를 강화하는 움직임과는 상반된 행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비록 劉悟가 특수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고는 하나, 節度使 계승을 허용한 牛黨 집권기의 결정은 상당히 안이한 것이었다.
劉悟에 이어 節度使가 된 劉從諫 시기부터 조정과 마찰을 빚은 昭義 藩鎭은 조정의 통제에서 이탈하려는 등, 조정이 구상하는 二元的 통치에 반하는 행동을 보였다. 거기에 劉從諫이 그 조카 劉稹에게 節度使 직위를 계승시키려 함으로 인해, 조정과 昭義 藩鎭은 큰 마찰을 빚었다.
당시 재상이었던 李德裕는 牛黨 집권기에 나타난 모습과는 달리 昭義 藩鎭 토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조정은 河北三鎭의 할거를 묵인해주는 대신 그 병력을 활용하였고, 河北三鎭의 병력이 토벌군에 가담하면서 昭義 藩鎭은 고립되었다.
고립된 상태에서도 昭義 藩鎭은 상당 시일을 버티는 데 성공하였는데, 이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劉稹이 節度使 직을 조정을 통해 추인받는 데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이었다. 劉稹은 자신이 조정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며 할거 상태를 인정받기 원할 뿐이라는 뜻을 조정에 피력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더 이상 河北三鎭을 제외한 여타 藩鎭의 할거를 인정하지 않는 二元的 구도를 형성한 상태였다. 거기에 당시 재상은 李黨의 영수인 李德裕로, 그는 劉稹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토벌군을 채근하여 昭義 藩鎭을 압박하였다. 수세에 몰린 昭義 藩鎭에서 劉稹의 수하 장수들이 劉稹을 죽이고 항복함으로써, 결국 劉稹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唐朝의 二元的 통치 구도는 완비되기에 이르렀다.
조정과 藩鎭 간 관계는 안정을 찾았지만, 河北三鎭을 조정에서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사실은 조정에 적지않은 재정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天寶 초까지만 해도 唐 전체 재정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河北에서의 上供이 끊어지고 오히려 지원해야 할 비용만 남은 상황은 唐朝 재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거기에 위구르와의 전쟁 및 劉稹의 난 진압에 소요된 軍費까지 포함시키면 唐朝가 져야했던 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武宗 시기 佛敎의 대탄압을 일컫는 이른바 會昌廢佛이 劉稹의 난 과정과 맞물리면서 진행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劉稹의 난을 진압함에 있어 재정이 필요한 시기에 廢佛 조치는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廢佛의 최종적 시행은 劉稹의 난 이후 논공행상이 이루어질 시기를 즈음하여 나타난 것으로, 劉稹의 난이 廢佛 시행의 단초가 되었을 개연성은 상당히 높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河北三鎭에서는 廢佛 조치가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唐朝가 藩鎭 통치에 있어 河北三鎭과 여타 藩鎭을 구분하는 二元的 구도를 시행한 것과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廢佛이 진행되던 시기 唐 조정이 河北三鎭에 강한 압력을 줄 수 없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당시 廢佛의 시행 영역이 제한되었던 것은 唐朝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조정이 穆宗에서 武宗에 이르는 시기 藩鎭 제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조정은 河北三鎭과 여타 藩鎭을 구분하는 二元的 구도를 형성하였고, 때문에 조정과 河北三鎭 사이에는 매우 독특한 관계가 설정되었다. 이러한 양자의 특수한 관계는 해당 시기를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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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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