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

1920년대 보천교의 활동과 조선사회의 대응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
장원아
Advisor
권태억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3-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3. 2. 권태억.
Abstract
이 논문은 1920년대에 급격한 성장과 쇠퇴를 보인 普天敎의 활동 및 논리를 살피고, 그에 대한 조선 사회 각 세력의 반응에 주목하여 1920년대의 사회사상적 의미에서 보천교의 위치를 검토했다.
보천교는 3.1운동 직후의 정치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甲子年(1924)에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갑자등극설을 활용해 크게 성장했다. 보천교가 새로운 세상으로 제시한 이상사회인 後天仙境은 서구 근대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일상생활의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는 특성을 보였다. 후천선경은 민중의 생활감각을 기준으로 근대문명과 전통적 가치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성격을 드러낸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가 퍼뜨린 풍설을 엄중히 단속하며 보천교를 감시하다가, 1920년대 문화정치의 통치방침 아래 보천교를 회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에 따라 보천교는 1922년 공개적 활동을 시작했다.
보천교의 활동은 두 가지 차원에서 주목할 수 있다. 우선 종교적 차원에서 전북 정읍 본소 주변에 공동체 마을이 건설되었다. 다음으로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고 잡지를 발간하는 등의 활동이 주로 경성의 혁신파에 의해 시도되었다. 교단에 재산을 기부한 신도들이 모인 본소 주변 공동체는 이상 사회의 건설 시도라는 성격을 지녔는데, 물산장려운동의 토산장려 논리에 따라 자급자족에 따른 평등한 사회봉공적 공동체를 추구했다. 보천교의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은 서로 연결되어, 보천교 혁신파 인사들은 보천교의 사상으로 새 시대를 선도하고 조선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의식을 보였다.
당시 지식인층은 보천교의 부상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천도교는 상투를 유지하고 신교육을 반대하며 전통 옹호적 성격을 보인 보천교를 구습이자 미신이라 비판했다. 천도교의 비판은 근대화 노선에 따른 계몽의 담론인 동시에, 당시 동학계열 분파를 비롯한 신종교들 간의 경쟁구도에서 교세를 유지하려 한 성격을 지녔다. 보천교에 대한 비판은 당시 영향력을 확장한 사회주의 세력에 의해서도 진행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보천교 성토는 보천교 혁신파의 『시대일보』 인수를 계기로 강화되었는데,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민중에 대한 주도권을 성취하려 한 1920년대 전반의 상황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사회 각 세력의 비판과 『시대일보』 인수 실패를 계기로 혁신파가 파면되면서 보천교 교단은 분열했다. 보천교 보수파는 교세 유지 전략으로 일선융화를 선전하는 시국대동단을 결성했지만, 이는 오히려 보천교 박멸 운동을 불러 보천교의 사회적 고립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교주 차경석의 독재가 심화되고 성금의 수취가 강화되면서 공동체의 생활이 피폐해졌다. 그 결과 보천교 간부들이 교단을 분립해 나가 보천교 교세는 점차 약화되었다. 보천교 및 다른 증산계열 종단은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했지만, 근대적 계몽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교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사상통제를 강화한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195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Korean History (국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국사학과)
  • mendeley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