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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안동 상층 鄕吏의 鄕職繼承과 존재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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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정성학

Advisor
김인걸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4-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향리영리안동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4. 2. 김인걸.
Abstract
이 논문은 족보, 선생안, 그리고 토지조사부 등을 통해 조선후기 안동 향리의 감영리의 독점과 계승양상, 거주지와 항렬을 통한 동족의식, 그리고 토지 소유규모를 양반과 비교함으로써 그들의 존재양상을 검토한 것이다.
18, 19세기 향직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감영의 영리는 일부 군현의 향리가문에 의해 독점되었다. 안동의 안동권씨와 안동김씨는 경상감영의 영리를 독점한 대표적인 향리가계였다.
영직은 안동권씨, 안동김씨 향리가계 내부에서 직계 장자중심으로 계승되어 갔다. 영직의 장자중심 계승은 그것을 독점한 가계와 소외된 가계와의 분화를 심화시키는 한편, 영리를 집중 배출한 가계 내부에서의 경쟁도 격화시켜 갔다. 이 같은 사실은 향리 가계내부의 분화와 경쟁을 야기하였다.
향리사회에서 향직의 독점과 소외는 일차적으로 혈연적 결집력을 약화시켰다. 그들의 거주형태와 항렬자 사용은 이 같은 현실을 잘 보여준다. 향리들은 읍치에 거주하였지만 양반의 동성촌락처럼 특정 조상을 공유하는 후손들끼리 집중적으로 모여 살지 않았다. 그리고 사족화의 길을 선택했던 일부 가계의 경우는 거주지조차 옮겨갔다. 항렬 사용의 범위와 집중도도 양반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말하자면 향리들의 족적결합은 그 강도에서 양반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약하였다고 할 수 있다.
향직의 독점과 소외는 토지 소유규모에 있어서 양극화 현상을 가져왔다. 향리의 경우는 족적유대의 미발달로 인해 빈한한 동족을 구제를 강화하거나 경제활동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아무런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향리들의 토지 소유규모의 양극화 현상은 바로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향리들은 양반과는 달리 동족의 결속과 그들끼리의 공동체적 대응이 아니라 분산과 개별화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
이상을 통해 볼 때, 근대 이행기의 향리들은 양반과는 달리 동족의 결속과 공동체적 대응, 그로부터의 구속이 아니라 보다 자유롭게 분산과 개별화의 길을 통해 근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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