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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倭典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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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현주

Advisor
宋基豪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5-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왜전영객부왜사신라학문승신라의 대왜관계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5. 2. 宋基豪.
Abstract
본 논문은 신라 倭典의 설치목적과 성격, 그리고 폐지 문제를 다룬 것으로 이를 통해 7~8세기 신라 對倭外交政策의 변동상황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왜전은 領客典의 전신인 前期倭典과 영객전 성립 후 별치된 後期倭典으로 나뉜다. 전기왜전은 倭典이라는 명칭 및 領客府(영객전)가 대외외교업무를 담당한 관사임을 생각할 때 대왜외교업무, 특히 왜의 사신단을 접대하는 관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기왜전은 586년 예부령이 설치된 이후 처음으로 倭使가 신라에 내방한 591년 설치되어 왜사의 접대를 담당하였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침공을 받으며 한반도 내에서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親倭外交政策을 전개하면서 왜전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후 전기왜전은 621년 唐使의 내방에 대응해 영객전으로 개편되는데, 이는 신라가 국교를 맺은 대외각국의 사신에 대한 응접을 행하는 관사의 성립, 곧 접대 대상의 확대와 사신 접대 관사의 상설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객전은 651년 영객부로 승격되면서 확대개편되었다.
신라와 왜의 관계는 한반도 내에서 삼국통일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왜가 친백제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단절되었다. 양국의 사신교환이 재개된 것은 668년으로, 신당전쟁이 전개되기 직전이었다. 신당전쟁이 전개되는 와중에 배후에 위치한 왜의 동향을 주시할 필요가 있었던 신라는 대당관계가 개선되는 8세기 초까지 친왜외교정책을 유지해야 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672년 이후 당과 사신교환이 단절된 왜가 685년 무렵부터 8세기 초반까지 신라에 學問僧을 파견하였다는 점이다. 대당교류가 단절된 상황에서 왜는 신라를 통해 외래문물을 수입하고자 하였고, 신라는 대당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당과 왜가 연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왜와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왜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면서 다종다양한 물품을 보내고, 왜의 견당학생 ․ 학문승의 송환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견신라학문승의 신라 내 체류를 허용하여 신라인과의 교류를 추진함으로써 왜의 문물교류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켜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친왜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신라는 왜사 가운데 일정기간 신라에 체류하게 된 왜의 학문승에 대한 접대와 관리를 담당할 왜전을 별치하였다. 별치시점은 왜의 견신라학문승이 확인되는 685년 무렵일 것이다. 이때 후기왜전은 내성에 예속되었는데, 이는 왕실에서 학문승에 대한 접대비용을 제공하고 이들 학문승과 신라인 간의 교류를 왕실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699년 효소왕이 당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대당관계가 개선되면서 신라는 대일관계의 비중을 축소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양국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은 신라를 배제하고 당과 교류할 방법을 모색하는데, 발해를 경유하여 견당사를 파견하거나 당승을 일본으로 초청하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일본의 견신라학문승 또한 740년 이전에 귀국한 審詳을 마지막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신라는 경덕왕대 일본사마저 不納 ․ 不見하였고, 759년 무렵에는 전운이 감돌 정도로 양국관계가 악화되었으므로 후기왜전의 기능 또한 사실상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견신라학문승으로 확인되는 審詳이 귀국한 이후인 740년 무렵, 특히 신라가 일본사를 不納 ․ 不見한 742년~753년 무렵에 후기왜전이 폐지되었을 가능성이 상정된다.
그러나 신라학문승을 매개로 이루어졌던 인적교류의 영향이 단기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최후의 신라학생으로 확인되는 審詳은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많은 경전을 전래하여 이후 일본 불교에 영향을 주었다. 752년 김태렴 사행 시 審詳이 있던 大安寺를 방문한 것 또한 審詳이 신라학문승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전기왜전이 6세기 후반 왜사를 접대하기 위해 설치된 관사였다면, 전기왜전의 후신인 영객부가 존재하는 가운데 설치된 후기왜전은 7세기 후반 왜가 파견한 학문승을 접대하고 관리하기 위한 관사로, 모두 친왜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운영된 것이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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