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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故國原王의 平壤 移居와 南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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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지희
Advisor
송기호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6-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고국원왕평양천도이거남진정책낙랑공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6. 2. 송기호.
Abstract
【국문초록】
高句麗 故國原王의 平壤 移居와 南進

金 智 姬

본고는 故國原王代 平壤東黃城 移居의 의미를 살펴보고, 樂浪公 책봉 이후 적극적으로 추진된 고구려 南進政策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고국원왕이 재위하고 있었던 4세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중국은 五胡十六國으로 분열되었고,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국가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이들 중 고구려와 국경을 맞닿고 있었던 鮮卑族 前燕의 흥기는 고구려의 內政 및 外政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342년 전연의 침입은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국내성 지역의 기능 상실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343년 고국원왕은 현재의 평양 지역으로 이거하여 서북 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한편 전연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평양 지역의 경제적・문화적 선진성은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과제를 짊어진 고국원왕에게 최적화된 후보지였을 것이다.
고국원왕의 이거 자체는 外侵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 이거를 결정하였을 때는 사서에서 확인되는 용례 그대로 이동 후 定住를 의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고국원왕 시기 확인되는 이거를 단순한 이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 첫째, 사서에 기록된 이거의 대상 지역이 국내성 지역에서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평양이며, 《三國史記》의 찬자가 이를 고구려 國都 변화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에 삽입했다는 점, 둘째, 이거 기간이 30년에 가깝다는 점, 셋째, 평양동황성을 제외하고 이 시기 고구려의 王城에 대한 문헌기록이 부재하다는 점, 넷째, 355년 전연에 의한 낙랑공 책봉으로 외부의 위협이라는 이거의 원인이 사라진 후에도 고국원왕은 계속 평양 지역에 머무르며 경영에 주력하였고, 이는 고구려 南進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이때의 이거의 의미를 단순한 이동이라고 볼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黃色이 가지는 상징성을 고려할 때 평양동황성의 黃城은 고구려의 왕성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의 城名은 그 지방의 이름을 딴 경우가 종종 확인되는데, 그 지역 내의 가장 중심적인 성에 지역 명칭을 붙여 대표로서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343년 이후 고국원왕이 머무르고 있었던 평양동황성은 평양 지역에서 가장 중심적인 성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였을 것이며, 이에 평양 지역을 대표하는 성으로서 平壤城으로도 불리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점에서 고국원왕이 戰死했던 371년의 평양성은 평양동황성의 異稱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발굴 결과를 볼 때, 평양동황성은 청암동 토성일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108년 漢武帝에 의해 설치된 낙랑군은 313년을 시간적 界線으로 중국과 한반도에서 서로 다른 대상을 의미하게 된다. 355년 고국원왕이 전연으로부터 받은 낙랑공이라는 책봉호와 주변 국가가 받은 낙랑 관련 책봉호를 비교해보면, 낙랑공에는 낙랑의 고지, 즉 평양이라는 지역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낙랑공 책봉은 고국원왕의 평양 이거를 방증하는 한편, 이거의 성격 변화를 가져왔다. 고국원왕은 낙랑공 책봉으로 전연과의 관계가 안정된 이후에도 국내성 지역으로 還都하지 않고 평양 지역에 머무르면서 고구려 팽창의 방향을 남진으로 선택했다. 이러한 점에서 355년 이후 이거의 의미는 遷都와 비견될 수 있으며, 낙랑공 책봉은 고구려 대외팽창의 방향 전환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평양 이거 자체는 소극적 동기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낙랑공 책봉 이후 고국원왕이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점에서 자율적 동기 역시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낙랑공 책봉 이후 전연과의 안정된 관계 및 내정의 안정화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주변 국가에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이에 낙랑・대방군 축출 이후 국경을 맞닿게 된 백제와의 관계 설정이 필요해졌다. 그런데 366년부터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성립되었고, 이는 당시 평양 지역에 이거하고 있었던 고국원왕에게 직접적 위협이 되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못했고, 황해도 지역의 경제적 가치는 양국의 갈등 요소가 되기 충분했다. 이에 369년 고구려는 백제를 先攻함으로써 양국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고국원왕의 국왕으로서의 지위는 안정적이었고, 4세기 고구려 내정의 안정은 對百濟戰 선공을 시작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蓋鹵王이 北魏에 보낸 國書에서 양국의 오랜 仇怨을 고국원왕 시기로 소급한 것은 고구려 남진정책의 시작이 고국원왕대에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고국원왕의 343년 평양 이거와 371년 평양성 방어 결과, 고구려는 미천왕 시기 확보한 낙랑군의 고지를 확고하게 영역화할 수 있었다. 또한 고국원왕의 백제 선공으로 고구려 대외 팽창의 방향이 처음으로 남진이라는 명확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국원왕의 사망과 함께 고구려 왕실은 국내성 지역으로 환도했으나, 고구려 정권은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평양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고국원왕의 이거 이후부터 평양 지역은 고구려 정권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고국원왕의 戰死로 인해 격화된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갈등은 고구려로 하여금 평양 경영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小獸林王 시기부터 廣開土王때까지 평양은 대백제 공략의 전진기지이자 교통로로 활용되었고, 평양에 대한 관심과 경영은 427년 長壽王이 평양 천도를 단행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국원왕의 평양 이거와 정주는 고구려 대외 팽창의 방향을 西進에서 南進으로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요어 : 고국원왕, 평양, 천도, 이거, 남진정책, 낙랑공
학 번 : 2012 - 22880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16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Korean History (국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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