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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言論의 韓國戰爭 報道와 그 性格 - 日本人 從軍記者의 活動을 中心으로 - : Japanese Media's Reports on Korean War and Their Tendencies - Focusing around Japanese War Correspondents' Activit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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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요네즈 토쿠야

Advisor
정용욱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6-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한국전쟁미국의 대일언론정책일본인 종군기자반공주의식민주의휴전협정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6. 2. 정용욱.
Abstract
본 논문은 일본인 종군기자의 한국전쟁 파견 경위와 취재활동을, 주로 『아사히』와 『마이니치』 신문 기사를 분석함으로써 한국전쟁과 한국에 대한 당시 일본인의 인식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모습까지 고찰했다.
1945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미군)은 일본의 탈군국주의화・민주화라는 명분 아래 보도지침을 발표하여 일본 언론의 관리와 통제에 나섰다. 그런데 동아시아 냉전이 격화하면서 언론 통제의 목적도 반공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미군은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를 정간 처분함과 동시에 언론인 700여 명에 대해 레드퍼지(빨갱이 숙청)을 단행하여 일본 언론은 완전히 미군의 전쟁 수행을 돕는 홍보기관 노릇을 하게 되었다. 미군 점령 하 일본 언론은 한국에 특파원을 파견할 수 없었다.
상황은 1951년 7월 바뀌었다. 한국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일본인 종군기자 일행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한국이 독립된 후 처음으로 한반도 땅을 밟은 기자들이었다. 신문사와 통신사, 방송사 등 모두 16개 언론사 18명으로 구성된 일본인 기자단은 유엔군 영관급 장교 신분의 종군기자로 7월 11일 서울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이후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 때까지 2년간에 걸쳐 60여명의 일본인 기자가 파견되었다.
일본인 기자들은 미8군으로부터 다양한 편의를 제공받으며 한국을 어디든지 자유롭게 취재하며 돌아다녔으나, 기사를 일본에 보낼 때는 미리 미군 검열관의 엄중한 검열을 받아야 했다. 검열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기자들은 한국전쟁의 추이는 물론 한국의 사회상이나 민심, 대일감정 등을 취재하여 일본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이는 타 국가 출신의 종군기자가 일반적으로 전황을 중심으로 보도하던 수준과 달랐다. 왜냐하면 일본인 기자들은 일본어로 직접 한국인을 취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이 작성한 기사는 당시 일본인이 품고 있던 한국의 이미지까지 담겨 있다. 따라서 종군기자의 기사들은 오늘의 한일 관계를 생각하는 데 귀중한 선례를 보여준다.
일본인 기자들은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며 전쟁의 비참함과 식민지 조선의 흔적을 발견했다. 동시에 적극적으로 한국인을 만나 반공의식과 식민주의의 잔재가 얽힌 대일 감정, 일본 재무장에 대한 기대와 경계심이 뒤섞인 복잡한 여론, 앞으로의 한일 관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 등을 자세하게 기사화하고 이를 일본 독자들에게 전했다. 휴전회담 반대 여론이 고조됐을 때는 격렬한 시위 장면을 사진과 함께 일본 독자에게 전달했으며 미 해군기지에서 일하는 일본인 기술자의 모습이나 한국인과 결혼하여 서울에 머물고 있는 일본인 여성의 소리 등 일본과 한국전쟁의 생생한 관계를 밝혀냈다.
그러나 일본인 종군기자의 활동은 처음부터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파견 당시 그들은 미군의 강한 통제 아래 있었고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사실을 보도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미군의 공중폭격이 서울을 파괴했다는 사실조차 쓰지 못했다. 또한 일본인 기자들은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을 경성(京城)이라 부르고 일본어 취재를 당연시했다. 이러한 태도는 취재 대상이 된 한국인 지식인층의 친일적·반공적 성향과 결부되어 한국인들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최우선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기사들을 양산했다. 이 경향은 후에 한일협정의 성격을 예상케 하는 것이었다.
종군기자의 반공적·친일적 보도 태도는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동아시아에서 본격화되는 미국 주도의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수직적-차별적인 냉전질서 구축과 지체된 한일 양국의 탈식민화가 낳은, 즉 새로운 한미일 구조가 낳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그러나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로 일본이 독립하고 일본 국내에서 미군의 검열이 폐지된 이후, 일본인 기자는 나름의 독자성을 발휘했다. 휴전회담 반대 시위의 이면에 흐르는 한국인의 염전(厭戰)주의 또는 평화에 대한 염원을 적극적으로 일본 독자에게 전해주는 동시에 그때까지 주류를 이룬 반공주의적 한국전쟁관에서 벗어나 내전론에 기초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일본인의 민족적 경험에 기초한 평화주의의 반영이기도 했다.
일본인 종군기자의 활동은 한일 양국에서 거의 잊혔지만 그들의 보도는 일본인에게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한국전쟁과 일본의 관계를 이해시켰을 뿐 아니라 이승만 정부의 언론통제로 언로가 막혀 있었던 한국인에게도 귀중한 정보원이 되었다. 나아가 이들 기사에 나타난 한국인의 대일관(對日觀)을 보면 역사인식 문제를 외면 한 채 반공과 경제 원조를 목적으로 북한을 배제한 수교라는 한일협정 체제의 원형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종군기자의 활동은 현재 일본 언론의 한국관, 미국관을 형성한 원점이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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