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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및 고려시대의 풍탁(風鐸) 연구
A Study on Wind Chimes of the Unified Silla and the Goryeo Dynas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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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강보라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5-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풍탁(風鐸)탁(鐸)풍령(風鈴)영(鈴)고려 금속공예통일신라 금속공예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학전공, 2015. 8. 장진성.
Abstract
풍탁(風鐸)이란 뒤집어진 통형의 몸체, 치게, 바람판을 갖춘 음향 도구이다. 바람이 불어 풍탁의 바람판을 움직이며, 바람판에 연결된 치게가 통형의 몸체 내부를 타격하여 소리를 발생시킨다. 풍탁은 주로 탑과 건물 처마에 설치되어 사용되었다.
풍탁의 제작과 사용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도 확인되나, 삼국 모두에서 풍탁에 관한 연구는 드물다. 본 연구는 출토 보고서를 비롯해 각종 문헌에 단편적으로 소개된 풍탁의 사례들, 그리고 옛 풍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과 관련 기록을 모아 정리했다. 이러한 자료를 기반으로 풍탁의 명칭 및 기원, 설치방식에 대해 고찰하고, 개별 풍탁의 출토 상황과 양식을 정리하여 유의미한 연구 성과를 도출하고자 했다. 또한 풍탁의 양식적 변천을 살피고 그 변화에 내재된 의미와 풍탁의 종교적, 사회적, 미술사적 중요성을 밝히고자 했다. 본 연구의 주요 범위는 풍탁이 등장했던 최초의 시기인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이며, 이 시기는 풍탁의 기원과 초기 양식을 밝힐 수 있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
현재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풍탁의 명칭은 크게 탁(鐸), 영(鈴), 경(磬)으로 대별할 수 있으나, 풍탁을 가리키는 옛 명칭과 현재의 명칭에는 차이가 있다. 진양(陳暘, 1064-1128)의 『악서(樂書)』와 허신(許愼, 58?-147?)의 『설문해자(說文解字)』, 불교 경전, 각종 탁의 명문은 풍탁의 명칭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탁은 풍탁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예로부터 익숙하게 사용되었다. 영의 경우, 작은 탁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거나, 영의 범주에 탁이 속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기록에 따르면 경은 풍탁과 재질 및 원리부터가 다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연구된 풍탁은 그 명칭을 탁과 영으로 한정하였다.
탁은 기원전부터 중국에서 군사(軍事)와 관련된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탁 중에서도 풍탁은 불교와 강한 관련성을 지닌다. 초기 풍탁이 절에서 출토될 뿐 아니라 기록 및 다른 작품 속에 등장한 경우가 모두 불교와 관련된다는 점은 풍탁이 불교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생성, 발전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풍탁의 존재가 각종 기록과 미술품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은 6세기이다. 양현지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와 미국 프리어갤러리(Freer Gallery of Art)에 소장되어있는 중국 남향당산석굴(南響堂山石窟) 제2굴의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 석편이 그 증거이다. 한국에서 풍탁이 등장한 시점은 7세기 전후이다. 미륵사(彌勒寺)의 창건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미륵사지 출토 금동풍탁,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의 공방지에서 출토된 바람판이 전해지고 있다.
풍탁의 사용처는 다양한 문헌기록과 실물자료의 검토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문헌 및 시각자료로 전해지는 풍탁의 80% 이상이 절과 관련된 것이었다. 풍탁이 설치된 세부 장소 중 가장 많은 곳은 탑으로,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풍탁이 설치되었던 가장 대표적인 장소가 탑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탑 외에는 절의 기타 건물과 경당(經幢) 등에 풍탁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탁이 절 외의 건축물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이상적 세계를 묘사한 경전의 글과 남송 때 제작된 와 , 청말(淸末)에 제작된 은 절 외의 기타 장소에서도 풍탁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풍탁을 목조 건축물에 설치할 경우 추녀마루나 추녀에 별다른 장식 없이 혹은 풍탁을 입에 문 서수 장식과 함께 설치되었다. 1114년 남송(南宋)에서 제작된 에서는 서까래에 설치된 용두가 풍탁 고리를 물고 있는 모습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삼성미술관 리움과 메트로폴리탄박물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있는 용두 장식과 풍탁 일괄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풍탁이라는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는 유물의 양식, 출토지, 부속구는 용도, 즉 해당 탁이 실제 풍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과 제작된 시기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창녕 술정리사지(述亭里寺址) 풍탁과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 풍탁은 각각 진단구(鎭壇具)로 매납(埋納)되었을 가능성과 풍탁의 기능성이 배제된 장식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강릉 보현사(普賢寺) 풍탁, 거창 천덕사지(天德寺址) 풍탁, 경주 구황동(九黃洞) 풍탁은 전술한 정보와 사역(寺域) 유지에 대한 기록을 이용해 제작 시기를 검토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풍탁이 의도적으로 매립된 정황과 상세 출토지점의 연관성은 현재까지 명확한 근거가 밝혀지지 않은 사내(寺內) 공예품 매납에 대해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모자탁(母子鐸)의 실존하는 증거로 여겨지던 청주 사직동 동제풍탁의 조사 결과는 기존 연구 결과를 반증한다. 겹쳐 있던 소형 탁과 중형 탁은 각각의 치게를 지닌 채 독립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매장 당시에만 겹쳐서 보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자탁은 기본적으로 자탁(子鐸)의 몸체가 모탁(母鐸)의 내부를 타격하거나 자탁의 비교적 둔중한 몸체가 바람판의 역할을 하여 모탁의 치게를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모자탁의 작동 원리는 풍탁의 기능성과 배치(背馳)되는 구조이다. 모자탁의 존재를 증명할 근거는 아직까지 충분하지 않은 실정이다.
탁의 형태와 양식을 이루는 요소로는 높이, 하단(下端), 입면(立面), 평면(平面)의 모양, 돌대(突帶)의 유무 등이 있다. 이를 기준으로 탁의 외양을 분류하였을 때, 두 유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종형(鐘形) 풍탁이다. 외양(外樣)이 종과 유사한 이 풍탁들은 연호형의 하단과 돌대를 지니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대부분은 종의 유곽(乳廓)에 해당하는 부분에 돌대를 둘러 처리했으며, 유곽 내에 몇 개의 유(乳)와 화문(花文) 당좌(撞座)를 갖추는 경우가 많다. 행인형(杏仁形)의 평면과 사다리꼴의 입면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사각형의 평면을 갖고 있는 경우 혹은 반원형의 입면을 갖고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미 초기의 풍탁부터 등장한 이 유형은 고려 후기에도 천판(天板) 위의 화판(花瓣) 장식 등 당대(當代) 종의 특징을 반영하며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두 번째는 방형(方形) 풍탁이다. 연호형의 하단, 사다리꼴의 입면, 사각형의 평면과 돌대가 있는 풍탁이 이 유형에 해당된다. 방형 풍탁은 다양한 모양의 입면 구멍과 장식문양이 확인되며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풍탁이다.
탁의 장식문양은 편년을 위한 기준 자료가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풍탁의 편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 중 연화문(蓮花文)은 해당 문양의 기와가 다양한 유적에서 상당한 수량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범자문(梵字文)은 고려 12세기부터 기와 문양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에 풍탁의 편년에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금동풍탁,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 청동풍탁, 경주 황룡사지 청동풍탁, 삼성미술관 리움과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풍탁은 화문 당좌를 지니고 있어 연화문 기와와의 비교 편년이 가능하다. 강진 월남사지(月南寺址) 금동풍탁, 김천 직지사(直指寺) 금동풍탁, 일산 원각사(圓覺寺) 소장 청동풍탁, 상명대학교박물관 소장 금동풍탁에는 범자문이 있어 제작시기의 상한을 추정할 수 있다.
제작 시점의 상한과 하한의 기간이 4세기를 넘지 않는 탁들을 편년 기준작으로 삼아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유물과 고려시대의 유물로 나누어보면 시대에 따라 양식이 변화하는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풍탁의 크기는 대형화되고, 돌대가 있는 탁들이 많이 만들어지며 장식문양이 증가한다. 평면은 행인형에서 사각형이 많아지며, 돌대가 있는 방형 풍탁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다수가 확인된다. 통일신라 말까지도 풍탁에는 치게와 연결구의 역할을 겸한 봉형의 금구가 사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연결구와 치게의 역할이 분리된 풍탁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풍탁에 장식문양이 많아지고 치게가 독립되어 등장한 현상은 풍탁의 크기와 관련이 있고, 풍탁의 크기는 결국 풍탁이 설치된 건물의 성격 및 규모와 관련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사료에서 관찰할 수 있는 풍탁의 위치와 의미를 고려했을 때, 당시 사회에서 이해되었던 풍탁은 세속에 속하지 않는, 불교와 관련된 물건이자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전달하는 음향도구였다. 사랑스럽고 즐거운 소리 혹은 쓸쓸하고 고독한 소리 등 상반된 감정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경전에 나타나는 풍탁은 여래의 음성과 같은 역할을 하며 기적을 불러오고, 장엄구(莊嚴具)이자 공양구(供養具)의 일종으로서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불교에서 중생을 중요한 도달점, 즉 번뇌와 죄업 소멸, 극락왕생, 깨달음, 해탈, 득도로 이끄는 풍탁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음향 도구였다.
풍탁은 불가에서 사용되는 다른 법음구(法音具)들과 달리 특정한 용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 풍탁은 제작된 후에 사람에 의해 소리가 제어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바람에 의해 불시에 소리를 만들어낸다. 제어하고자 하는 의도와 실용적 용도가 부재한 풍탁이 오랫동안 불가에서 사용되어 왔으며 불교를 상징하는 소리 도구로 서술되어 왔다는 사실은 풍탁이 보다 종교적 상징성을 강하게 띈 법음구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금으로 도금된 풍탁이 전 시대에 걸쳐 많이 제작되었다는 점 역시 풍탁의 종교적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그 동안 미술사학계에서 풍탁은 다른 금속 유물에 비해 비교적 적은 관심을 받아왔다. 그러나 귀한 재료로 공력을 들여 만든 물품이었던 풍탁에는 그 시대의 기술과 양식이 필연적으로 밀도 높게 반영되어 있다. 풍탁은 당시의 종교적?사회적 맥락 및 금속공예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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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rchaeology and Art History (고고미술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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