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ations

Detailed Information

백남준의 독일시기(1959-1963) 퍼포먼스와 전쟁의기억 : Nam June Paik's Performances in German Period(1959-1963) and the Memory of War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

육영신

Advisor
김영나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5-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백남준퍼포먼스정치적 미술플럭서스하이레드센터전쟁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학전공, 2015. 8. 김영나.
Abstract
국 문 초 록

백남준의 독일시기(1959-1963)는 행위와 음악이 결합된 이른바 액션뮤직(Aktion-Musik) 작품들로부터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1963)에서의 텔레비전 작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업경향을 아우르고 있다. 그가 독일시기 초반에 선보인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Hommage a John Cage: Music for Tape Recorder and Piano)〉(1959)와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구(Etude for Pianoforte)〉(1960), 카를하인츠 스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의 《오리기날레(Originale)》에서 선보인 〈심플(Simple)〉(1961) 등의 액션뮤직 작품들은 유난히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행위들로 인해앙팡테리블이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악명이 높았다. 백남준의 이러한 행동주의적 양상은 1950년대에 스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과 존 케이지(John Cage)가 음악을 공간화하고 작곡에 행위를 도입시키고자 했던 음악의 전위적 경향위에 있으며, 넓게는 모더니스트적 미학에 대항하고 20세기 초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재평가하는 것으로부터 부상한 전후(戰後) 퍼포먼스의 맥락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백남준의 퍼포먼스들은 단순히 미학적 강령들을 실천하는 것에서 벗어나, 전쟁의 기억과 그 직후 냉전기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수사들을 함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는 백남준이 존 케이지의 유산들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이었으며, 1950년대 말부터 나치독일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억압된 기억들을 복원하고 있던 볼프 포스텔(Wolf Vostell)이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와 같은 독일의 예술가들과 유사한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독일에서는 지난 전쟁의 참상을 예술로서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중심으로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는데, 마르쿠제(Herbert Marcuse)와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아래에서 수학한 바존 브락(Bazon Brock) 등은 정치적 목적에 이바지하는 미학적 실천들로서 퍼포먼스와 같은 행동주의적 양상들을 옹호하고 있었다. 백남준은 이러한 지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던 쾰른의 아방가르드 서클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케이지조차 생경하리만큼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피아노를 파괴하는 등의 난폭한 행위들을 벌였다. 예측불가하며 파괴적인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지켜보던 당시의 독일 관객들은 그가 전쟁의 폭력적 장면들을 끔찍하게 재현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행위를 통한 간접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당대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백남준은 자신의 첫 액션뮤직 작품인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의 제2악장을 열정과 어리석음이 동시에 작용하여 이룬 독일의 경제 기적에 대한 경고로 정의했다. 알렉산더와 마가렛 미체를리히(Alexander · Margarete Mitscherlich) 부부는 저서 『애도의 불가능성(Inability to Mourn)』(1967)을 통해 전후의 독일인들이 경제기적의 신화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방법으로 홀로코스트와 같은 나치독일의 과오를 회피하려 했다고 분석했는데, 즉 백남준의 경고는 전쟁의 기억이 억압되고 있던 당대 독일의 분위기에 대한 비평적 개입을 시도한 것이었다.
백남준이 퍼포먼스를 통해 표명하는 정치적 입장들은 대개 서독의 학생운동이나 예술가들이 공유하던 문제의식들과 공명하는 것이었지만, 일제치하의 한국과 냉전기 보수내각하의 일본에서 성장한 그의 정치적 경험들과도 은밀히 결부되어 있었다. 그는 1960년의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구〉에서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가 선물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 내는 방법으로 스즈키의 선(Zen)과 일본 군국주의와의 야합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표출하는가 하면, 이듬해의 《오리기날레》에서는 우편향 논조의 선정적인 보도로 서독 학생들의 반발을 샀던 일간지 『빌트(BILD)』를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부터 목도해 온 선동적이며 일-방향적인 미디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출했다.
백남준은 독일 시기 직후인 1963년부터 1년간 잠시 일본에 머물렀는데, 1960년의 미-일 안보조약 이후 시민운동들에서의 직접행동에 영향을 받아 부상한 그룹 하이레드센터(HI-RED-CENTER)의 퍼포먼스들에 참여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백남준이 이 그룹의 활동에 대해 공감을 표한 기저에는 이들이 〈패전기념만찬회(敗戰記念晩餐會)〉(1962)와 〈셸터플랜(シェルタ?プラン)〉(1964) 등을 통해 전후 일본 내에서의 패전이라는 단어의 은폐와 빅브라더의 검열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던 점과, 이러한 정치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었다. 백남준은 독일시기의 퍼포먼스를 통해 정치적 지향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으면서도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거부했는데, 하이레드센터 역시 유사한 전략을 구사했다. 플럭서스의 본부를 소비에트 연방(USSR)에 세우려는 구체적인 야심까지도 지니고 있던 조지 마치우나스(George Maciunas)와의 노선갈등을 촉발한 원인이 되기도 한 백남준의 이러한 태도는, 한국과 일본, 독일을 거치는 동안의 불분명한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이데올로기적 회의를 경험했던 그가 택했던 정치적 전략이었다.
본 논문은 백남준의 독일시기 초기 퍼포먼스를 케이지의 유산 아래 기존 음악에 대한 성상파괴적(Iconoclasm)인 태도로 해석하거나 플럭서스의 전사(前史)로만 위치시키는 그간의 단선적인 서술에서 벗어나, 그의 정치적 지향성과 그 전략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했다. 1963년의 기념비적인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 이후 백남준의 정체성이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공고화되면서, 이후의 작업들은 그의 초기 퍼포먼스와는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백남준이 이 전시에서 텔레비전의 일-방향적 정보전달의 경로를 독재에 비유하고 그 내부 회로를 파괴했던 것은 미디어에 대한 검열과 선동이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던 전쟁과 냉전기의 기억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이처럼 독일시기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전쟁의 기억과 냉전의 정치적 역학 속에서 해석하는 것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두 예술형식을 관통하는 백남준의 초기 문제의식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요어: 백남준, 퍼포먼스, 정치적 미술, 전쟁, 플럭서스, 하이레드센터
학번: 2011-23116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39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Altmetrics

Item View & Download Count

  • mendeley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