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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대 寶寧寺 水陸畵의 후원자와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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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유수란

Advisor
이주형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6-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보녕사 수륙화(寶寧寺 水陸畵)수륙회(水陸會)『천지명양수륙의문(天地冥陽水陸儀文)』토목(土木)의 변우옥현(右玉縣)팔기주방(八旗駐防)욕불절(浴佛節)묘회(廟會)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2016. 2. 이주형.
Abstract
136폭의 보녕사(寶寧寺) 수륙화(水陸畵)는 명대(明代)에 제작된 축(軸)형 수륙화 가운데 거의 전체가 갖춰진 작품이다. 수륙화는 아귀를 위한 시식의례(施食儀禮)인 수륙회(水陸會)에 진설(陳設)되는 의식용 불화이다. 중국의 수륙화는 70폭에서 120폭 정도의 규모로 제작되었고 각 폭에는 법회에 소청(召請)되는 존격들이 그려졌다. 보녕사 수륙화는 정면관의 불보살과 아귀가 그려진 20폭의 불화를 비롯해 명왕도, 나한도, 재난장면이나 지옥이 묘사된 불화, 옆으로 몸을 틀고 있는 존격들이 그려진 불화 등으로 구성된다. 원래 이 수륙화는 산서성 우옥현(右玉縣, 옛 右衛城)의 보녕사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인해 여러 기관을 거쳐 태원시(太原市) 산서박물원(山西博物院)에 이관되었다.
1962년 연구가 시작된 이래로 보녕사 수륙화는 명대 수륙화를 대표하는 예로 동시기의 다른 축형 수륙화, 산서성과 하북성의 수륙벽화, 명대 황실 발원 불화와 비교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보녕사 수륙화의 제작과 관련된 고문헌이 모두 유실되었기 때문에 기존 중국 학자들은 다른 수륙화와의 양식과 도상 비교, 주변 정황을 중심으로 제작 맥락만을 논의해왔다. 지금까지 보녕사 수륙화의 여러 측면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수륙화 제작 이후의 양상은 연구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산서박물원에는 보녕사 수륙화로 지칭되는 136폭의 불화 외에도 이 불화와 관련된 3장의 문헌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2장은 각각 강희(康熙) 갑신(甲申, 1704)년과 가경(嘉慶) 20년(1815)에 이루어졌던 수륙화 중수 기록이 적힌 중수제기이다. 나머지 1장은 1704년의 중수에 참여했던 공양자들의 명단이다. 부속 문서로만 언급되어온 이 문헌들은 18세기와 19세기에 실제 의식에서 보녕사 수륙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중수제기에는 중수의 목적, 후원 주체, 당시 수륙화가 사용되던 모습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수륙화 제작시기에 초점을 둔 기존 연구에서 벗어나 제작시점부터 후대까지 수륙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로 시선을 옮긴다면, 수륙화의 기능이 변화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보녕사 수륙화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이 작품의 하사(下賜)에 대한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의 중수제기에는 변방을 진압하기 위해 황실에서 하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실이 진변(鎭邊)을 목적으로 수륙화를 하사한 것은 1449년에 발생한 토목(土木)의 변과 관련이 있다. 토목의 변은 명나라 황제였던 주기진(朱祁鎭, 1427-1464, 재위 1435-1449, 복위 1457-1464)이 하북성의 토목에서 몽고의 오이라트(瓦剌, Oirat)족에게 1년간 포로로 끌려갔던 사건이다. 황실 주도의 수륙회는 큰 전쟁이나 왕조가 교체되는 시점에 전쟁으로 죽은 병사들의 혼을 위로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거행되었다. 황실에서 수륙회를 통해 민생의 안정화를 꾀한 것은 삶과 죽음의 세계가 연속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늘 아래 모든 이를 교화하는 황제의 책무가 사후세계까지 확장된 것이었다. 또한 수륙화에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위계적인 구성 방식은 수륙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계급을 각인시키는 데 유용하였다. 보녕사 수륙화도 토목의 변으로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세우고 북방 경계선까지 황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하사된 것이었다.
18세기가 되면 보녕사 수륙화의 후원 주체가 달라진다. 강희 갑신년(1704)의 중수에는 우위성(右衛城)에 주둔해있던 팔기주방(八旗駐防)이 단체로 참여하였다. 이 지역의 팔기주방은 강희제(康熙帝, 1654-1722, 재위 1661-1722)가 외몽고와의 전쟁을 계획하면서 파견했던 군사들이었다. 우위성은 만리장성과 가까운 변경이었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군사 집단의 영향력이 컸다.
우위팔기주방은 보녕사 수륙화 외에도 주변의 보(堡)나 사원 중수에도 참여하였다. 팔기주방이 보녕사 수륙화의 중수를 비롯한 지역의 공공사업에 참여했던 것은 지역 사회의 이익을 위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명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원은 종교적인 공간이자 사회적인 공간으로 지역 공동체의 집단적인 이익을 대표하기도 하였다. 명·청대에 지역 권력집단이었던 신사(紳士)나 지역 동향을 배경으로 한 상인들은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고 이를 과시하기 위해 종교사원을 비롯한 공공사업에 후원하였다. 우위팔기주방이 인근의 사원 수리에 자금을 댄 것도 우위성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영향력을 공고히 다지고 널리 선전하는 방식의 일부였다.
한편 19세기에 접어들면 보녕사 수륙화는 18세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 1815년의 중수제기에는 수륙화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매년 석가모니의 탄신일인 4월 8일 욕불절(浴佛節)이 되면 보녕사에 수륙화가 진설되었다. 청 말 변경의 사원은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었기 때문에 사원에서 모시는 주신(主神)의 탄신일 법회는 사원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1815년의 중수제기에 보이는 사방에서 시주가 모두 모이며 우러러 배례하였다는 기록은 19세기에 보녕사 수륙화가 어떻게 기능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욕불절에 보녕사에 전시되었을 100여 폭의 수륙화는 시각적으로 사람들을 매혹시켰고, 신도들의 신앙과 관심을 이끌어 냈다. 또한 사방에서 모인 군중들의 시주는 보녕사에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 중수제기는 사원의 경제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신앙이 교차했던 욕불절을 보여준다.
보녕사 수륙화에 대한 기록들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흐름에서 본 수륙화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보녕사 수륙화가 제작된 이후 우위성의 상황이 달라지면서 수륙화를 중수하고 사용했던 집단도 바뀌게 되었다. 하사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수륙화가 원래의 맥락과 점차 유리되었고, 이후 새로운 지역 집단이 다른 방식으로 수륙화를 수용하면서 보녕사 수륙화는 기존과 다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보녕사에 소장되었던 중수제기를 통해 명대부터 청 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그림이 정치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변화에 맞게 수용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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