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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의 <이집트 피난길의 휴식>: 할례에서 세례로
Albrecht Altdorfer's Rest on the Flight into Egypt: From Circumcision to Bap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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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다솔
Advisor
신준형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유아 세례할례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신성로마제국레겐스부르크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학전공, 2016. 8. 신준형.
Abstract
레겐스부르크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는 1510년 에서 아기 예수를 분수의 넓은 수반에 기울여져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본 논문은 이 모티프를 기독교의 유아 세례 성사에 대한 암시로 해석하고자 한다. 아기 예수는 유대 전통을 따라 할례를 받았으나 이 그림에서는 세례반처럼 수반이 넓은 분수에서 세례를 받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알트도르퍼는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유대인 중심지 중 하나였던 레겐스부르크에서 활동한 화가이다. 그는 유대인 쟁점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던 독일의 인문주의 지식인들과 교류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본 논문은 그림이 그려진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아기 예수의 세례라는 모티프가 동시대 레겐스부르크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신학적,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함의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주요 연구들은 의 풍경화적 요소를 분석하거나 기초적인 도상을 해석하는 데 그쳤다.
논문의 제2장은 아기 예수와 분수를 다른 작가들이 묘사한 방식과 알트도르퍼의 그림을 비교하여 알트도르퍼가 유아 세례를 암시했다는 점을 보인다. 동시대 성모자상 그림에서는 아기 예수가 성모의 젖을 먹거나 과일을 집어 드는 모습으로 주로 나타나는 반면, 알트도르퍼의 아기 예수는 성모의 손에 들려 물이 담긴 분수에 금방이라도 담가질 듯 기울여져 있다. 이러한 구성 요소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아 세례 장면을 그린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제3장은 예수의 할례와 이후 요단강에서의 세례를 재현하는 미술사 전통에 비추어 알트도르퍼의 재현 방식이 당대에 어떻게 이해되었을지 추론한다. 예수가 받은 성사를 재현하는 주된 방식과 달리, 알트도르퍼는 아기 예수의 세례를 암시했다. 이로써 알트도르퍼는 동시대 기독교인이 실제 신앙생활에서 행하는 유아세례를 유대인의 할례보다 드높였다. 알트도르퍼의 시대 기독교인은 봉헌 문학, 수난극, 설교 등을 통하여 세례의 신학적 교훈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교훈은 예수 자신이 인류를 대신하여 할례를 받았기에 신자들은 고통스럽지 않은 세례만 받고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신학자들은 할례를 동시대에 어떠한 구원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구시대의 율법으로 강등시키는 반면 세례를 유일하게 신자를 천국으로 이끌 수 있는 입문 성사로 구축했다.
15-16세기경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할례에 더욱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15세기 후반 엔딩엔과 트렌트에서 유대인에게 제기된 살인 혐의 공판은 기독교인들이 할례에 대해 지니고 있던 두려움과 혐오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16세기 북유럽의 대표적인 신학자와 인문주의자인 루터와 에라스무스도 유대교의 할례를 비난했다. 16세기 초 독일에서 유대교와 기독교 의례를 대비하여 반 유대교 프로파간다를 내세운 대표적인 사례로 페퍼코른이 1508년 쾰른에서 출판한 유대인의 거울 팸플릿을 들 수 있다. 이 팸플릿은 알트도르퍼가 을 그리기 수 년 전 출판되어 반 유대인 감정에 힘입어 신성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팸플릿의 표지에는 유아 세례를 받는 기독교인 및 새로 세례를 받는 개종자들과 악마에 이끌려 할례를 받으러 가는 유대인들이 대비되어 있다.
이처럼 할례와 세례를 대비하는 종교적 상징은 실제 사회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반영했다. 따라서 제4장은 의 역사적 배경을 짚기 위해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과 레겐스부르크의 유대인 역사, 유대인의 지위에 대한 기독교인의 논쟁,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알트도르퍼의 반응을 논한다. 15세기와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 때 자주 일어난 유대인 추방은 1519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일환으로 히브리어와 유대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알트도르퍼가 동시대의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알트도르퍼가 을 제작한 시기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경력 초기부터 성직자와 인문주의 지식인들에게 작품을 주문 받았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성직자, 공직자,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대인과 유대교는 첨예한 논쟁거리였다. 따라서 알트도르퍼는 유대인 문제를 잘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레겐스부르크는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의 오래된 지적 중심지였으며, 유대인 집단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알트도르퍼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유대인의 위기가 절정에 달할 때 레겐스부르크의 주민일 뿐만 아니라 시의회의 의원이었다. 레겐스부르크 유대인을 오랫동안 보호하던 막시밀리안 1세가 1519년 1월 12일 사망했을 때 알트도르퍼를 포함한 시의회는 유대인을 모두 도시에서 추방하고, 시나고그를 없애고, 그 자리에 레겐스부르크의 아름다운 마리아(Schöne Maria)에 봉헌하는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한편 알트도르퍼는 미술가로서 이 사건에 기여했다. 그는 레겐스부르크 시나고그가 파괴되기 직전 내부를 묘사한 에칭 두 개를 제작하고 아름다운 마리아를 다양한 매체로 복제했다.
에서 아기 예수가 세례를 받는 것 같은 특이한 장면은 바로 예수가 기독교인의 유아 세례를 확립했다는 신학을 암시한다. 또한 할례와 세례가 각각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대표하므로, 은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확정하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관념은 동시대 레겐스부르크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긴장 및 지식인들 사이에서 높아지던 유대교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어 있었다. 알트도르퍼 그림 속의 세례 모티프는 유대인에 대하여 증오와 호기심이 모두 고조되던 동시대 신성로마제국의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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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rchaeology and Art History (고고미술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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