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ations

Detailed Information

金弘道의 <朱夫子詩意圖> 硏究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

김선경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김홍도(金弘道)정조(正祖)주자(朱子)아송(雅誦)대학(大學)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시의도(詩意圖)궁중회화(宮中繪畵)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학전공, 2016. 8. 장진성.
Abstract
는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가 1800년 정월에 그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에게 세화(歲畵)의 목적으로 바친 작품으로 알려졌다. 각 폭에는 김홍도의 자필(自筆)로 주자(朱子, 1130-1200)의 시(詩)와 웅화(熊禾, 1253-1312)의 주(註)가 적혀있으며, 각 폭에 붙은 웅화의 주는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궁중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의미로 통용되던 전통적인 세화와 는 여러 측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통상 궁중에서 그려졌던 세화는 주로 송축(頌祝)의 의미로 화훼·영모·신선의 주제가 대개 그려졌고,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圓)과 도화서 화원이 할당된 수량을 기일에 맞추어 이를 봉진(奉進)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반면 의 주제인 주자 시는 세화의 화제로는 물론, 유교적 궁중회화의 주제로도 제작되었던 적이 없는 매우 이례적인 소재였다. 본 연구는 를 구성하는 두 개의 텍스트- 주자의 시와 『대학』 -가 정조의 통치철학과 맺고 있는 특수성을 분석함으로써, 정조를 작품의 주제 선정부터 제작 과정까지 모두 관여한 제작 주체로 설정하고 의 성격을 주문화로 재규정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의 화제인 주자 시의 출처를 주자의 문집인 『회암집(晦庵集)』에서 찾았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작품의 화제(畵題)가 1799년에 정조가 간행한 주자의 시선집(詩選集)인 『아송(雅誦)』에서 선택되었음을 새로이 밝혀냈다. 가 『아송』의 간행 시기와 맞물리는 세화의 진상 시기인 1799년 말에 제작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작품에 수록된 주자의 시는 『아송』이 제작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정조가 직접 관여한 『아송』이 의 출처라면 작품의 제작 주체 또한 정조임이 명백해진다. 또한 『아송』에 기재된 주자 시의 해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웅화의 『대학』에 대한 언급을 차용하면서 작품의 주제를 『대학』의 팔조목으로 해석한 제작 주체의 의도에 주목하였다. 정조는 군왕의 학문은 일반 사대부의 학문과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군주의 적극적인 정치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대학』에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정조는 『대학』이라는 텍스트를 군주만을 위한 책으로 규정하며,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목표로 하는 『대학』의 핵심 내용이 정치라고 볼 때 모든 규모와 절목은 군주의 직분에 따른 행위라고 거론하였다. 이는 『대학』의 팔조목이 제왕학(帝王學)의 영역 안에서만 완전히 실현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제작 주체인 정조가 를 기획하면서 『아송』에서 선택한 주자 시를 『대학』의 팔조목으로 해석한 이유는 각 폭에 구현된 『대학』의 팔조목을 실현하는 진정한 주체가 왕 자신이라는 사실을 회화적으로 표상(表象)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아송』을 간행하면서 자신이 주자로 이어진 유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하였음을 사대부들에게 천명하는 한편, 시문(詩文)의 전범(典範)으로 주자 시를 세움으로써 당대 쇠약해진 문풍(文風)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러한 『아송』의 간행 목적은 정조가 학문적 지도자인 군사(君師)로 자임함으로써 학문의 영역에 직접 개입했던 정치적인 목표와도 부합한다. 정조는 주자학을 자신의 학문적 이데올로기의 최정점에 위치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는 문예정책을 펼쳤는데 이것이 『아송』을 위시한 주자서선본(朱子書選本) 간행과 문체반정(文體反正)이었다. 원래의 주자학은 사대부들 사이에서 전승되어오던 학문이었다. 삼대(三代)의 정치에서 왕통(王統)과 도통이 분리된 후, 군신공치(君臣共治)로 이루어진 이래 학문의 전통은 사대부들이 맡아 연구되어왔으며, 각 학파의 자신들이 주자의 도통을 이은 진정한 학자집단이라 인식하였다. 한편 정조는 이러한 주자학이 담고 있는 문화 권력을 역으로 이용하여, 군주가 주도하는 주자서대일통(朱子書大一統)을 이루고자 했다. 정조는 학문적 권위를 사대부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정치·학문적 최측근 세력인 규장각 각신(閣臣)과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아송』 편찬에 적극 참여시켰으며 배포 범위에도 필수적으로 포함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송』의 간행이 주자의 도통을 이은 군주와 신하가 함께 주도한 것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울러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주자학에 위배되는 문장과 시문을 쓰는 사대부들을 교정하는 주체로 나섰다. 특히 정조는 당시 패관소품문(稗官小品文)에 빠져있는 노론신진엘리트를 집중적으로 책문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을 군주의 문화정책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정조가 주자학을 정치·학문적 이데올로기로 삼아 펼친 일련의 문예정책은 모두 규장각 각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반정형태로까지 군주가 추구했던 합의점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집단은 바로 김조순(金祖淳, 1765-1832) 등의 노론신진엘리트에 집중되어 있었다. 즉, 정조가 그의 통치이념에 주자학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이루고자 했던 정치적 목표는 자신의 정치적 측근들을 존왕(尊王)의 방편인 주자학으로 회귀하도록 설득시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의 주제인 주자 시는 군사로 자임한 정조가 사대부들 사이에서 주자의 도통을 잇는 학문적 지도자로서 정당성을 얻고, 주자학이라는 학문적 근거를 통해 제기된 화제였기 때문에, 자신의 최측근세력들에게 정치행위의 정당성을 표상하기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제였다.
정조는 자신이 정치의 유일한 주체임을 표상하는 통치철학을 시각화하기 위해, 각기 다른 내용의 주자 시 여덟 수를 한 화면에 배치시키고 이를 『대학』의 팔조목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나의 완성된 시각적 내러티브를 구현했다. 정조가 에서 서술하고자 했던 치세 말년의 통치철학은 크게 수신(修身)하기 위해 통치자가 도덕적 수양을 도모하는 명명덕(明明德)의 관점과 명덕(明德)을 밝힌 후 군주가 백성들에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과정인 신민(新民)의 관점에서 규명될 수 있다. 주자가 직접 자연을 소요하며 읊은 산수시(山水詩)를 배치한 명명덕(明明德)의 장면은 통치자가 明德을 밝히기 위해 수양해야 하는 다섯 개의 조목(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으로 해석되면서, 입도차제(入道次第)의 시각적 연결성을 확보하였다. 즉, 제1폭부터 제5폭까지는 주자의 유훈(遺訓)이 담긴 산수에서 군주가 도덕적 수양을 하는 공간으로 시각화되었다. 다음 신민(新民)에 해당하는 제6·7·8폭은 군주가 백성들을 새롭게 진작시키기 위해 목표한 바를 구현한 것이자, 통치자로서 직접적인 정치행위를 펼쳤을 때 실현되는 장면들이다. 정조는 제6·7·8폭의 화운시(和韻詩)에서 신민(新民)의 장면을 철저히 통치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궁중에서 풍속을 바라보는 시각문화와도 연결된다. 궁중에서의 풍속은 통치자가 파악해야 할 백성들의 실상을 나타낸 것이자, 군주의 정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의가 있었다. 이에 통치자가 궁중에서 풍속을 바라보는 시각문화에 비추어 신민(新民)의 장면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게 되면, 군주의 선정(善政)으로 인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신민(臣民)의 이상국가로 일원화된다.
정조는 치세 말년에 자신의 통치철학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상징화하면서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유일한 정치주체임을 표명하였다. 즉, 명명덕(明明德) 장면에서 정조는 자신을 주자의 유훈이 담긴 공간에서 제왕이 되기 위한 도덕적 수양을 도모한 군사(君師)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한편 신민(新民)의 장면에서 정조는 백성들을 새롭게 진작시켜 평천하(平天下)한 국가로 이끌 주체 역시 자신임을 표명하고자 했다. 1800년 새해, 새로운 왕권론을 지지할 세력이 필요했던 의 제작 주체 정조는 유교통치의 중핵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치세 말년의 통치철학으로 제시하였다. 정조는 를 통해 주자 시에 담긴 정치적인 함의(含意)를 자신의 최측근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였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42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Altmetrics

Item View & Download Count

  • mendeley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