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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代 中期 別號圖 硏究 : Hao Paintings of the Middle M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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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최여훈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Issue Date
2013-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별호도(別號圖)별호(別號)당인(唐寅,1470-1524)문징명(文徵明,1470-1559)명대 중기의사(醫師)죽서초당도(竹西草堂圖)수암도(邃庵圖)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2013. 8. 장진성.
Abstract
본 논문은 명대 중기(약 1465-1580)의 오파(吳派)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던 별호도(別號圖, hao painting)를 대상으로 그 제작 배경과 기능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별호도는 주문자의 호(號)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말한다. 중국 회화사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그림 주제(畵題)들이 전시대(全時代)에 걸쳐 꾸준히 그려졌던 것에 반해, 별호도는 명대 중기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만 제작된 독특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선행 연구들은 별호도의 이와 같은 특이성과 주제의 참신함에 주목해왔다. 그러나 정작 별호도의 구체적인 제작 맥락과 기능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했다. 몇몇 연구들이 별호도의 제작 배경으로 당시의 시은(市隱) 문화나 정원 조성 문화, 문인들 간의 교유 활동을 거론하긴 했으나, 모두 매우 피상적이고 모호한 설명에 그쳤을 뿐이다. 이에 본고는 별호도가 발생하고 유행하게 된 보다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배경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와 함께 별호도 주문자층의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별호도의 기능을 추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별호도가 후대에 어떻게 인식되고 수용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별호도가 주문자뿐만 아니라 후대의 수장가들에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기능했던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별호도의 기원 및 발생 배경에 대한 파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악(張渥, 약 1336-1364 활동)의 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서(竹西) 양겸(楊謙, 1283-?)을 위해 제작된 이 작품은 조옹(趙雍, 1298-약 1360)이 쓴 죽서 두 글자와 장악이 그린 죽서초당의 풍경, 그리고 양유정(楊維楨, 1296-1370)이 지은 죽서지(竹西志)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명대 중기에 제작된 별호도들의 구성 방식과 일치한다. 호의 의미를 보여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문(記文)과 그림의 내용 역시 별호를 도해한다는 별호도의 개념에 부합한다. 더욱이 이 작품은 별호도가 유행하기 바로 직전 시기부터 당인(唐寅, 1470-1524)을 포함한 소주(蘇州) 지역 문예가들에 의해 감상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가 명대의 별호도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별서도가 그러하듯이 별호도의 발생에는 별호의 의미를 서술한 별호기(別號記)의 발생이 선행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따라서 양유정의 문집에 죽서지와 비슷한 종류의 별호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즉 명대 중기에 유행하게 된 별호도의 발생에는 그보다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별호기 문화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미술사적, 문학적 배경 속에서 발생한 별호도가 명대 중기에 와서 특히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별호를 짓는 문화의 확산과 이를 통한 자기 표방(標榜)에의 욕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별호도의 주문자들 가운데 높은 관직을 지낸 유명한 문인관료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하게 (1500)를 주문했던 양일청(楊一淸, 1454-1530)을 꼽을 수 있으나, 그 역시 를 주문할 당시에는 낮은 직급의 관리에 불과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볼 때, 문인들의 별호도를 통한 자기 표방은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성공한 이들보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 의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별호도 주문자들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두 직업군, 즉 4품 이하의 관리와 의사(醫師) 집단의 성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집단은 모두 사회경제적 지위가 다소 불안정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4품 이하의 관리들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내부 경쟁에서는 결국 도태된 이들이었다. 의사들의 경우도 비슷했다. 이들은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미 한차례의 실패를 겪은 이들이었고, 의사들 간의 경쟁에서 마저 실패할 경우 경제적 이득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위치에 놓여있었다. 이들에게 별호를 짓고 별호도를 주문하는 일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남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들은 별호도에 자신의 집안 배경이나 성품, 지식 등을 내세우는 내용을 담아 자신의 사회적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명(名)이나 자(字)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격식적인 호칭이자 친한 사이에 서로를 거리낌 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었던 별호 자체의 성격은 주문자들에게 별호도가 특별히 매력적일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이다. 즉 주문자를 그의 호로써만 호칭하는 별호도권은 작품의 주문자로 하여금 그 제작에 참여한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인 문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보이게끔 기능했을 것이다. 한편 당시에는 별호를 짓는 풍습이 지나치게 보편화되면서 너도나도 별호를 짓기 시작하였고, 문인들이 보기에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별호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동일한 호를 가지게 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따라서 자신의 이름과 명성만으로는 특정 별호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이들은 자신의 별호에 대한 정당성을 검증받을 수 있는 절차를 필요로 했다. 주문자들은 역사적, 문학적, 철학적 지식이 풍부한 문인들의 힘을 빌어 자신의 별호에 보다 심오하고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별호도는 단지 그 주문자들에게만 매력적인 장르였던 것은 아니다. 제작자들에게 있어서도 별호도는 다양한 주문자들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별호도는 주문자와 제작자 간, 그리고 화가와 문필가 간에 그 어떤 정서적, 사상적 교감이 없이도 손쉽게 제작될 수 있었다. 문징명(文徵明, 1470-1559)과 같은 이들은 별호도 제작을 다소 귀찮고 사소한 종류의 일로 불평했지만, 자신의 재능으로 먹고 살던 직업적 문인들에게 있어 별호도는 사실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따라서 화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공력을 들여 별호도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각자만의 스타일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약간의 변형만을 가하여 별호도를 그림으로써 효율적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상품을 차별화할 수 있었다. 화가들은 주문자의 별호에 따라 매번 새로운 모티프를 채택해 다양한 시도들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광범위한 주문자층은 이들이 별호도 제작에 있어 보다 자유롭게 임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별호도는 개인의 별호 및 그와 관련된 개인사를 주제로 다루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사적(私的)인 그림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상당수의 별호도는 오랜 기간 주문자의 집안에 가전(家傳)되거나 혹은 그 후손들에 의해 재발견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선조를 기리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시각적 전기물로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모든 회화 작품이 그러하듯이, 별호도 역시 언젠가는 주문자 가문의 손을 떠나 제3의 새로운 수장가를 만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이 후대 수장가들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인물을 주제로 한 별호도를 그대로 수용하는 대신 작품에 새로운 주제와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이들은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전유(專有)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들을 강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별호도는 점차 탈맥락화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본 논문은 별호도의 발생과 유행 및 후대의 수용양상에 대해 다각적으로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단순히 별호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설명되어 온 별호도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별호도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재조명했다는 점, 이제까지 미술사에서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수장가 계층을 새롭게 발견했다는 점, 그리고 별호도는 고급 문인 문화의 결과물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본 논문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The hao painting (別號圖) is a picture that illustrates the meaning of someone's biehao (別號), a sobriquet. Different from other subjects in Chinese art, the hao painting flourished exclusively during the middle Ming period. Many art historians have paid attention to the hao painting because of its thematic originality and uniqueness. However, despite the high level of interest, the only thing we know about the hao painting is that it was produced to 'celebrate' the patron's biehao. In order to go beyond such a superficial understanding, this study explores the socio-cultural context in which hao paintings were created and how they functioned in mid-Ming society.
With regard to the problem of the origins of hao paintings, a handscroll known as the is worthy of notice. In this handscroll, Zhao Yong (趙雍, 1298-ca.1360), Zhang Wo (張渥, active ca.1336-ca.1364), and Yang Weizhen (楊維楨, 1296-1370) respectively delivered the meaning of 'Zhuxi (竹西)' by means of calligraphy, painting, and writing for Yang Qian (楊謙, 1283-?) of Songjiang (松江). Zhuxi was Yang Qian's biehao. The composition and the manner of treating the subject exactly correspond to those of hao paintings produced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According to the colophons attached to the handscroll, from the 15th century it was appreciated by the eminent Suzhou literati including Tang Yin (唐寅, 1470-1524), a painter who created numerous hao paintings. He was the most prominent master in the hao painting genre. This indicates that might have had a direct impact on the creation of hao paintings during the middle Ming period.
The hao painting genre gained enormous popularity during the early sixteenth century. By that time, the practice of adopting one's own biehao began to spread among people from all walks of life. In this regard, the social status of the patrons of the hao paintings deserves special attention.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few noted people who had succeeded in their career ordered hao paintings. The only exceptional example of this is which was ordered by Yang Yiqing (楊一淸, 1454-1530), a renowned politician of the middle Ming dynasty. But he was also a minor official at the time of his commissioning the painting. Most of the patrons who requested the hao paintings were people of somewhat unstable, marginalized, and ambiguous social statuses, such as minor officials and doctors. To be specific, minor officials were the people who had succeeded in entering the government service but eventually fell behind in the competition among them. Doctors were placed in a similar situation. The number of doctors had rapidly increased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Ming dynasty and the competition among doctors became fierce and stiff.
In this respect, it is supposed that they needed a specific means of differentiating themselves from others and strengthening their competitiveness. For example, minor officials who were lack of capacity to promote to the higher rank instead advertised their family background or exaggerated their own personality with the help of biehao. Similarly, doctors tended to utilize biehao to emphasize their advantages as a doctor, such as wealth of medical knowledge, family background, or approval from other noble men. In this process, they needed a help of literati of renown, who were knowledgeable and highly celebrated, because the doctors could not prove their great ability and reputation in society and acquire exclusive rights of their own biehao by themselves.
Then what were the roles of the images and records in their hao paintings? Records in hao paintings were designed to explain the specific meaning of the patrons' biehao. They were full of embellished words, laudatory sentences and philosophical and literary sources. Meanwhile, images of hao paintings were intended to display the meaning of biehao more simply but more effectively by visualizing the motifs that symbolized the biehao. They also emphasized the existence of the patrons by showing them as prominent figures in composition.
Hao paintings appealed not only to the patrons but also to the painters. Although painters, such as Wen Zhengming (文徵明, 1470-1559), used to complain of hao paintings being tiresome, the making of hao paintings was their main source of income. In addition, painters could create easy and effective methods of dealing with hao paintings. They had no need to meet the patrons personally or visit their estates. All they needed was brief information about the patrons' biehao. In fact, in many cases, they illustrated the meaning of a patron's biehao arbitrarily without any interaction with the person. Painters used a standardized format of their own to save their time and energy. In this way, they could establish their own 'brand' in hao paintings, with which their own 'products' could be differentiated from others'.
Hao paintings were used as 'visualized biography' by the patrons' descendents. On the other hand, the later owners who had no personal relations with the works' original owners were different. They rather tended to erase the traces of the original owners and subjects. It might have been uncomfortable for the later owners to commemorate someone whom they know nothing about. As a result many hao paintings changed their meaning and subject by the later added colophons.
This study has its significance in three points. First, this article has reestablished the status of hao paintings as an independent and representative genre. Second, this study has illuminated the specific statuses of patrons whose characteristics have not been clearly explained before in the context of art history. Lastly, it has challenged the previous scholarship on the hao painting as an 'elegant' art. In every respect, hao paintings are socially conditioned works. This study is an attempt to explore the historicity of the paintings.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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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rchaeology and Art History (고고미술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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