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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시대 근대적 군사제도의 수용: 교련병대(별칭 별기군, 왜별기)의 설치와 운영 : The Introduction of Modern Military System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Gyoryeonbyeongd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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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dvisor최정운-
dc.contributor.author이종진-
dc.date.accessioned2017-07-19T12:04:39Z-
dc.date.available2017-07-19T12:04:39Z-
dc.date.issued2014-08-
dc.identifier.other000000022149-
dc.identifier.urihttps://hdl.handle.net/10371/134086-
dc.description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정치외교학부, 2014. 8. 최정운.-
dc.description.abstract1882년 6월 구식군인들의 반란인 임오군란으로 인해 고종이 창설한 최초의 신식부대인 교련병대(별칭 별기군, 왜별기)의 운영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하지만, 군란 발발 당시 약 1년 2개월간 근대식 훈련을 받았던 교련병대 소속의 사관 및 병졸들과 구식군인들 간의 전투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구식군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죽임을 당한 일본인 교관과 일본인 유학생 및 헌병들, 조선의 고위 관료들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있다. 또한 교련병대 출신의 사관 및 병졸들의 회고담이나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은 창설 및 운영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을 가지게 하였다.
본 논문은 고종시대 근대적 군사제도의 수용 시도 중 최초이자 이후 구한말과 대한제국의 근대적 군사제도 변화에 주요한 영향을 준 교련병대 사례를 선정하여 창설 과정 및 운영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한계 요인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와 관련된 기존 연구는 크게 네 가지로 범주화할 수 있다. 첫째, 정치집권자 고종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논하는 연구들이다. 둘째, 조선후기 군사제도를 중심으로 한 연구들이다. 셋째, 군사사 분야에서 고종 시기의 군사제도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교련병대 자체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이다. 하지만, 해당시기 고종에 대한 세밀한 서술과 교련병대에 대한 총체적 설명력에 한계가 있어, 본 연구에서는 교련병대에 대한 실체적 서술을 통해 고종과 조선을 둘러싼 권력 집단과의 모습을 살피고자 했다.
본 논문의 핵심 주장은 교련병대의 창설 및 운영 과정을 살펴보고 이에 따라 어떤 한계점을 지니게 되었는지 분석해봄으로써 교련병대와 직접적 관련을 가졌던 창설 주체로서의 고종세력 및 우호세력뿐만 아니라 이에 대항하는 조선 내 권력집단, 그리고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였던 청국과 일본 등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본 연구 사례로 선정한 교련병대는 구한말 근대적 군사제도의 수용에 대한 최초의 사례인 동시에 임오군란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갑신정변, 갑오개혁,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그리고 1907년 군대해산으로 이어진 근대적 군사제도의 개혁과 연이은 실패의 시발점이 된 사례로서 근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기존 연구에서는 소홀한 면이 있었다.
본 연구는 교련병대 조직에 중점을 두고 근대적 군사제도로서의 교련병대의 도입과정을 조선과 청국, 일본 간의 창설 협상과정과 조직의 운영, 그리고 이에 대한 관련국들의 반응을 통해 살펴보았다. 여기에 도입과정에서 나타난 쟁점과 원인을 분석하였으며 이를 통해 교련병대가 지녔던 내부적 한계와 조선 사회의 외부적 한계를 제시했다.
교련병대가 다층적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던 요인들 중 근본적인 것은 무엇보다 교련병대의 창설 시점, 협상대상국의 선정 및 조직의 운영에 대한 고종과 주도세력의 권력 지향 및 과시적 의도였을 것이다. 고종과 중전 민씨, 개화파 등의 연합세력에 의해 창설된 교련병대의 존재는 이에 거세게 저항하는 조선의 위정척사 세력 및 재야 세력이 타도해야할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이후 고종은 자신의 근대적 권력 상징인 교련병대에 대한 지나친 편애와 조정 내 정치적 균형감을 상실하면서 군란 발발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인들의 분노가 향한 곳은 실체적 세력인 교련병대 소속 군인들이 아니라 일본인 교관 및 관련자들, 그리고 중전 민씨와 그 외척 관료들과 같은 집권세력이었다.
또한 고종과 우호세력이 창설한 교련병대는 개화시기의 근대적 군사조직의 단순한 설치로서가 아닌 조선의 양반문화와 기존 주도세력에 대한 도전 행위였고 이에 양반층 및 기존 전통 권력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던 것이다.


주요어 : 교련병대, 고종, 군사제도, 정치 권력, 개화파, 양반 문화

학번: 2011-20220
-
dc.description.tableofcontents국문초록

I. 서론 1
1. 문제제기 및 연구의의 1
2. 기존연구 검토 2
3. 연구방법 및 자료 5

II. 예비적 고찰 7
1. 고종의 인식 변화 7
2. 권력 분포의 변화 11

III. 근대적 군사제도의 도입 14
1. 교련병대의 창설 과정 14
1) 청국과의 협상(제1기) 14
2) 일본과의 협상(제2기) 17
2. 교련병대의 운영 18
1) 교련병대의 성격 18
2) 조직 편성 19
3) 교육 및 훈련 과정 21
3. 관련국들의 반응 22
1) 청국의 반응 22
2) 일본의 반응 23

IV. 교련병대 창설의 배경 24
1. 동북아시아의 정세변화 24
1) 조선책략의 영향 24
2) 일본의 접근 26
2. 고종의 권력장악 시도 30

V. 교련병대의 운영에 대한 반발 31
1. 교련병대의 한계 31
1) 내부적 한계 31
2) 외부적 한계 37
2. 국내 위정척사세력 40

Ⅵ. 결론 50
1. 고종의 권력 장악 50
2. 근대적 제도의 수용으로서 교련병대 53
3. 조선의 문화적 요소 55

참고문헌 57

Abstract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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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formatapplication/pdf-
dc.format.extent1289525 bytes-
dc.format.mediumapplication/pdf-
dc.language.isoko-
dc.publisher서울대학교 대학원-
dc.subject교련병대-
dc.subject고종-
dc.subject군사제도-
dc.subject정치 권력-
dc.subject개화파-
dc.subject양반 문화-
dc.subject.ddc320-
dc.title고종시대 근대적 군사제도의 수용: 교련병대(별칭 별기군, 왜별기)의 설치와 운영-
dc.title.alternativeThe Introduction of Modern Military System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Gyoryeonbyeongdae-
dc.typeThesis-
dc.contributor.AlternativeAuthorJongjin Lee-
dc.description.degreeMaster-
dc.citation.pagesⅳ, 62-
dc.contributor.affiliation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
dc.date.awarded20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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