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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城旬報》구성의 연원과 학술기사의 재구성 양상 : Origins of the structure and strategy of reconstituting scholarly articles in Hanseongsunbo

DC Field Value Language
dc.contributor.advisor문중양-
dc.contributor.author이상재-
dc.date.accessioned2017-10-31T08:26:43Z-
dc.date.available2017-10-31T08:26:43Z-
dc.date.issued2017-08-
dc.identifier.other000000146577-
dc.identifier.urihttps://hdl.handle.net/10371/138017-
dc.description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문대학 국사학과, 2017. 8. 문중양.-
dc.description.abstract본 논문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알려진 《漢城旬報》의 지성사적 의미를 고찰하였다. 《漢城旬報》는 1883년 10월부터 갑신정변의 여파로 폐간되기까지 약 1년 동안 조선 정부가 발간한 매체로, 개항 후 萬國公法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하기 위한 조선의 정책적 산물이었다. 이에 《漢城旬報》 지면의 대부분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보도 기사와 서양 지식을 소개하는 학술기사로 채워져 있다.
《漢城旬報》의 필진은 창간사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들에 대한 포폄(褒貶)과 권징(勸懲)의 뜻을 담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도덕적, 학문적 기준을 제공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필진의 취지가 가장 잘 반영된 것은 서양 지식을 소개하기 위한 학술기사이다. 이들 학술기사는 《漢城旬報》 필진들이 당대 동아시아에서 통용되던 다양한 서학서와 잡지들로부터 관련 지식을 선별하고 재구성한 것이었다. 바로 그와 같은 속성은 《漢城旬報》에 대한 연구가 언론사적 의의에 못지않게 지성사적 맥락으로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할 필요를 웅변한다.
본 논문은 먼저 지적 구성물로서의 《漢城旬報》가 가진 구성적 특징의 연원을 추적하였다. 외국기사에 편중된 편집은 《漢城旬報》 창간 준비를 주도한 유길준의 진단대로 낙후된 교통과 사실의 보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1880년대 조선의 현실 속에서는 차라리 강요된 선택에 가까웠다. 그에 비해 국제 정세와 서양 지식을 소개하는 외국기사들은 조선 정부가 정책적으로 수집한 時務서적들과 외국의 정기간행물들에 담긴 다양한 분야의 정보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漢城旬報》의 세부적인 지면 구성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창간한 일본의 《時事新報》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19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지식 선교의 목적으로 발간한 잡지형 정기간행물들과 매우 흡사하였다. 특히 《漢城旬報》는 1874년부터 상해에서 발간된 《萬國公報》의 체재와 의제를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漢城旬報》의 지성사적 의의는 그 구성의 연원은 물론 함께 전체 학술기사의 분야와 출처와 주요 내용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학술기사는 당대 조선 정부의 서적 수집을 통해 축적된 지식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한 글들이므로, 수집된 서적의 경향성은 곧 학술기사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출처를 적시하고 있지 않은 대부분 학술기사들의 활용 출처는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다양했다. 한역서학서와 청의 지식 잡지들은 물론 일부 일역서학서도 활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기사의 출처가 규명됨에 따라 비로소 기사 내에 혼재되어 있던 지식 정보와 그에 대한 필진의 해석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필진들의 지식 재구성 양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필진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사견을 덧붙이기도 하였고, 필요에 따라 복수의 출처로부터 지식을 모아 새롭게 기사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서양 지식에 대한 중국의 번역과 일본의 번역이 한 기사 내에서 공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서양을 모방한 메이지 일본의 제도에 대한 관심은 일본으로부터 수집한 서적의 종류는 물론, 서양의 제도를 소개하는 학술기사들의 서사 구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漢城旬報》의 학술기사들은 지식의 선별이라는 의미는 물론 지식 자체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조선 역사상 최초의 시도였던 정기간행물을 통한 서양 지식의 재구성의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불과 1년에 그친 발간 기간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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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description.tableofcontents머리말 1

一. 《漢城旬報》의 구성적 특징과 그 연원 9
1.《漢城旬報》의 외국기사 편중성과 국내적 배경 9
2. 19세기 중국 정기간행물의 영향 10

二 .《漢城旬報》의 학술기사 재구성 양상 26
1. 새로운 지식의 축적과 그 경향 28
2. 축적된 지식의 재구성 37

맺음말 54

부표 1 56

參考文獻 71

Abstract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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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formatapplication/pdf-
dc.format.extent826524 bytes-
dc.format.mediumapplication/pdf-
dc.language.isoko-
dc.publisher서울대학교 대학원-
dc.subject한성순보-
dc.subject만국공보-
dc.subject공보초략-
dc.subject학술기사-
dc.subject서양지식-
dc.subject재구성-
dc.subject.ddc951-
dc.title《漢城旬報》구성의 연원과 학술기사의 재구성 양상-
dc.title.alternativeOrigins of the structure and strategy of reconstituting scholarly articles in Hanseongsunbo-
dc.typeThesis-
dc.contributor.AlternativeAuthorSangJae Lee-
dc.description.degreeMaster-
dc.contributor.affiliation인문대학 국사학과-
dc.date.awarded20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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