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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과 1980년대의 사회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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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박해남
Advisor
박명규
Major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Issue Date
2018-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서울올림픽1980년대사회정치사회적인 것도시개조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2018. 2. 박명규.
Abstract
이 연구는 서울올림픽이 1980년대 국가의 사회정치 수단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서울올림픽의 구상, 준비, 개최에 관한 제반 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를 증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회정치란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질서와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제도적 사회보장만이 아니라 습속개조와 도시개조 등의 다양한 방법과 국가의 정책과 시민사회의 대응 등 다양한 양상을 시야에 넣어오게 된다. 그 중에서도 이 연구가 주목하는 것은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방식의 습속개조와 도시개조 과정, 그리고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이다. 준비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 연구는 올림픽의 유치와 개최 쪽에 초점을 맞추어왔던 기존연구를 넘어서고자 하며, 나아가 경제발전을 우선시한 것으로 여겨져 온 국가가 1980년대 들어서는 올림픽을 매개로 사회발전을 추구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정부 및 조직위원회의 공문서와 백서, 공식보고서를 대상으로 정책분석을 수행하고, 정부와 조직위원회, 관변단체의 홍보자료와 저항적 시민사회의 성명서 및 팜플렛을 통해 담론을 분석하였다. 분석의 결과 발견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1960년대 이후 지속된 발전국가의 사회정치 위기를 배경으로 1988년 하계올림픽의 유치가 논의되고 개최가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을 분석하였다.
1960-70년대의 국가는 발전국가로 정의된다. 발전국가는 급속한 경제발전과 국제적 지위향상을 중요시했으며, 이를 위해 사회를 재조직하려 하였다. 그 방법은 개별 주체들의 습속을 개조하는 것으로, 경제발전과 및 권위주의 정치에 활용가능하도록 탈정치화되고 비서구적인 동시에 생산적인 습속을 갖춘 주체들을 다수화시키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었다. 한편, 스포츠는 발전국가에게 국제사회 내 지위향상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되었다. 그 중에서도 스포츠 메가이벤트의 개최는 가장 중요한 지위상승 수단 중 하나였다. 이에 따라 국가는 1960년대부터 아시안게임 유치 논의를 시작했고,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 반납한 바 있으며. 이어서 잠실개발과 더불어 국제 스포츠 이벤트를 위한 경기시설을 만드는 등의 준비작업을 계속해나갔다.
1979~80년 사이 논의된 1988년 올림픽의 유치는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1978년 말 정권의 2인자 박종규의 구상에서 출발한 올림픽 유치는 대통령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1979년 10월 초 발표되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중단되었다가 전두환의 등장과 함께 재개된다. 이러한 권력자들의 결정 뒤에는 올림픽의 유치 결정에는 발전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조우했던 정체성 위기와 국내사회에 대한 권위주의적 통치의 위기가 존재했다.
1981년의 유치 활동 과정은 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대통령과 관료들은 예상 개최비용이 2900억원에서 6900억원으로 증가하자 유치를 포기했고, 아시안게임 개최를 위해 일본과 협상을 시도했다. 유치는 협상이 거절당해서 계속된 것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시작된 유치는 다음 몇 가지 요인으로 인해 성공으로 결론나게 된다. 미리 만들어 둔 스포츠시설, 체육엘리트와 관료, 재벌로 이뤄진 추진 엘리트 집단의 집중적 유치 활동, 개발도상국 올림픽 개최론, 아디다스 회장과의 이면계약 등이 그것이다. 약 2개월 뒤엔 아시안게임도 유치하게 되었다. 유치과정에서 추진엘리트들은 중요한 과제를 갖게 된다. 한국의 냉전적 정체성도 있었지만 독재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등이 국제사회에서 문제시 되자, 이에 대한 해결을 국제사회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 즉 사회질서와 사회의 통합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것이 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갖게 된 과제였다.
3장에서는 올림픽 유치 이후 올림픽의 준비과정이 기획되는 양상을 분석하였다. 이 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 요소는 1980년에 새로이 권력을 잡은 정권의 사회정치에 대한 관심, 그리고 도쿄올림픽이라는 참조모델이었다.
1980년에 권력을 잡은 군인들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한 과정에서 있었던 사회구성원들의 저항을 도시하층민의 무질서한 행위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습속을 개조하기 위한 기구를 확대·강화했다. 한편으로는 자율화정책, 사회복지담론 등을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확장하면서 사회질서와 더불어 사회통합을 추구해나가면서,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선별성을 강화했다.
1964 도쿄올림픽은 서울올림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참조모델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과 국내사회를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개최된 이 올림픽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경관의 창출을 목표로 도시민들의 습속을 개조하고 도시 경관을 개조하려는 노력을 수행했다. 그 위에서 개최된 올림픽은 경제강국이자 과학기술대국인 일본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창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아시아 내에서의 입지를 강화하는데도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발전국가 한국은 올림픽을 통한 일본의 국제사회 내 지위 강화를 내세워 국민을 설득했고, 스스로는 도쿄올림픽의 준비과정을 참조하여 올림픽을 매개로 도시·습속을 개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올림픽의 기획과정에서 이 두 요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올림픽의 기획과 준비과정의 의사결정을 독점하다시피한 국가는 관제시민사회를 올림픽 준비과정에 참여시켰는데, 그 목표는 역시 사회를 개조하는 것이었다. 올림픽 마스터플랜만 아니라 주요 홍보선전물에서도 국가는 올림픽을 통해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습속이 바뀔 것임을 반복해서 선전했다. 올림픽을 통한 사회정치를 공식화한 것이다.
그런 국가는 이제 올림픽의 사회정치를 위한 구체적 전략의 생산에 들어간다. 국가는 올림픽의 사회정치가 달성해야 할 목표를 문명의 과시 혹은 문화의 과시로 상정하는 가운데,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을만하다 상정되는 습속을 개별주체들이 가질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국제사회란 선진국으로 일컬어지는 서구사회였다. 이들의 시선에 인정받을만한 경관이 형성되도록 사회 구성원들의 습속을 규율하여 개조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지만, 사회의 기층구성원들을 도시와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전략과 국제사회에 과시할 수 있는 도시공간을 만드는 전략 역시 병행되었다. 올림픽의 사회정치는 사회구성원들을 선별했던 것이다.
제 4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서울올림픽 준비과정에서 사회정치가 수행되는 양상을 분석하였다. 중요한 연구영역은 국가에 의한 습속개조 캠페인과 도시개조 프로젝트들이었다.
먼저 국가는 도시와 사회로부터 빈곤을 배제시키고 무질서를 처벌하려 들었다. 식민지기부터 사회적 타자였던 부랑인들을 지속적으로 감금하는 가운데 각종재개발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빈민들로 하여금 서울 내에서 터전을 잃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공공장소에서의 무질서한 습속 또한 올림픽을 방해한다는 혐의로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들어 시민사회의 성장하자 국가는 사회질서에서 사회안정으로 강조점을 옮기고, 이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각종 집단행동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사회 구성원들의 습속을 개조하는데 동원된 것은 내무부와 법무부, 서울시 등의 국가기구만이 아니었다. 범민족올림픽추진위원회, 새마을운동, 사회정화운동에 이르는 관제캠페인 조직들까지 여기에 동원되었다. 이들의 역할은 교육과 선전을 통한 엄청난 양의 담론을 생산함과 더불어 서구인들의 시선을 대리하여 시민들의 습속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한편으로 여가수단으로의 스포츠 활성화와 소비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풍요로운 도시경관이 습속을 통해 조성되도록 하는 작업 또한 이뤄졌다.
그와 더불어 준비되어 간 것은 국제사회에 한국의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과시할 수 있는 경관의 창출이었다. 이는 도시개조과정을 통해 주로 수행되었다. 1960~70년대 특정 지역을 선택하여 전략적으로 산업경관을 창출하였다던 국가는, 1980년대 들어 올림픽을 위해 서울 일부지역을 선택하여 한국의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을 과시할 공간으로 삼았다. 올림픽 및 아시아 선수촌과 공원, 한강개발과 대형문화시설(국립현대미술관, 독립기념관) 등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올림픽의 개폐회식을 포함한 각종 문화이벤트 역시 한국이 가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고 준비된 것이었다.
제 5장에서는 올림픽의 사회정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응과 이에 대한 국가의 재대응이 핵심 분석대상이다.
이 과정에서 있어 중요한 변수는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형성된 탈냉전 국면과 국내적인 시민사회의 성장이었다. 1984년에 있었던 88올림픽 개최지 변경론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사회주의 국가와의 스포츠외교에 적극 나서게 하였고, 사회주의국가들의 다수 참가를 배경으로 올림픽을 평화 이벤트로 재정의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민주화와 더불어 활성화된 시민사회에 영향을 미쳤고, 저항적 시민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냉전을 넘어 민족구성원의 일원으로 북한을 적극포섭하고자 하는 자세를 형성하는데 일조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저항적 시민사회는 민족구성원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포섭을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빈민들을 도시와 사회로부터 배제한 올림픽과 그 사회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함과 더불어 국민의 생존권을 국가가 보장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더욱 연장하여 남북공동올림픽을 통해 상징적이나마 민족구성원 전체를 포괄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또 하나의 흐름이 등장한다. 경제발전과 민주화 국면에서 마찬가지로 성장세를 보인 중산층의 경우 올림픽을 다른 방식으로 소비한 것이다. 이들은 올림픽의 성공을 환영하면서도 국가가 아닌 메달리스트들과 올림픽 성공에 공을 세운 전문가집단에 주목하였고, 그럼으로써 민족의 성공 내러티브를 자수성가 내러티브로 변형시켜 갔다.
민족구성원에 대한 포괄요구에 대한 국가의 재대응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1989년 올림픽 대응이벤트라 할 수 있는 평양세계청년축전에의 참가는 불허하면서도 세계한민족체육대회를 열고 중국 및 소련의 동포들을 참가시킨다. 민족구성원의 포섭 문제에 관한 선별적 기조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 내 구성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철거민 문제에 대하여는 1989년 1월 영구임대아파트 정책을 통해 철거민들의 요구를 전격 수용했지만, 이들이 사회 내에서 문화적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 최소포섭의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한 한편으로 국가는 과시적 공간을 복제하는 방식으로 사회 내에 인정가능성을 공급했다. 사회구성원에 대한 인정에 기초하여 사회부조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에 대한 인정과 부조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4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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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Social Sciences (사회과학대학)Dept. of Sociology (사회학과)Theses (Ph.D. / Sc.D._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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