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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漢 帝國의 國家祭祀 硏究 - 古代 中國의 祭祀 體系 확립 과정 - : 秦·漢帝國的國家祭祀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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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용찬

Advisor
김병준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8-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五嶽·四瀆孔子祭祀儒敎郡國廟國家祭祀郊祀極廟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18. 2. 김병준.
Abstract
前漢 末 이후 國家祭祀에서 郊祀가 중심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郊祀가 만들어지기까지 秦·漢 帝國의 國家祭祀는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한 혼란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前漢 末에 가서야 最高의 天神을 위한 祭祀 施設은 長安의 郊祀로, 郡·國의 郡國廟는 七廟를 중심으로 모두 정리되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변화를 새롭게 등장한 儒家 官吏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前漢 末을 기준으로 秦·漢 帝國의 國家祭祀를 나누어 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현재까지 추종되고 있다.
그러나 그 內實을 들여다보면, 前漢 末의 改革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변화의 흐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무질서해보이는 最高의 天神을 위한 祭祀 施設과 郡國廟는 前漢 初 형성된 이른바 郡國制의 遺産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高祖에서 武帝까지 漢 皇帝들은 諸侯國을 무력화시키고 天下를 지배하는 名實相符한 天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러한 노력은 最高의 天神을 위한 祭祀 施設의 남발이라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高祖 死後 惠帝가 세운 高廟와 長陵은 남·북을 잇는 子午線 위에 있었고, 그 연장선에는 북쪽으로 東井과 五星을 상징하는 祭祀 施設, 남쪽으로 子午谷이 위치하는 등 中軸線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이와 같은 中軸線은 秦 始皇에 의하여 구상된 것이었다. 極廟를 중심으로 한 地上이 天上을 그대로 구현하게 하여 秦 帝國의 권위를 絶對化할 수 있도록 시도한 것인데, 이와 아울러 秦 始皇은 極廟에 자신의 아버지인 秦 莊襄王을 太上皇으로 추존하여 모시고 이를 帝者의 祖廟로 삼기까지 하였다. 나아가 秦 始皇은 모든 縣級 行政 單位마다 廟를 만들어 中央의 極廟와 마찬가지로 太上皇을 모시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漢 帝國의 郡國廟로 계승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高祖 이후 武帝 이전까지 漢 皇帝들은 諸侯國의 존재로 인하여 秦 始皇이 實現한 것과 같은, 天下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이룰 수 없었다.
高祖 이후 漢 皇帝들이 지속적으로 諸侯國을 약화시켰고 그 지배 영역을 天下로 확대하여 마침내 武帝 시기에 郡國制를 완전히 극복하였다. 이와 더불어 全國的인 國家祭祀 體制도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武帝는 東方 巡狩를 통하여 受命天子로서 封禪을 올리고 그 주변의 神들과 祭祀를 확보해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武帝를 도운 主役은 方士들이었다. 이것은 宣帝에게 계승되어 五嶽·四瀆과 主要 祭祀 施設로 정리되어 各級 行政 單位에 위임되었다. 成帝 시기에 이르면 方士들이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地方 長官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地方 行政 單位마다 확보된 主要 祭祀 施設은 前漢 末에 이르면 全國的으로 700여 곳에 달하였고, 國家祭祀에 포섭된 祭祀 施設은 1,500곳 이상이었다.
郊祀는 이와 같은 前漢 末의 歷史的 背景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後漢 初 光武帝에 의하여 집결된 雒陽 南郊의 1,514位 神들은 前漢 末까지 漢 帝國이 확보한 天下의 神들을 망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光武帝는 郊祀 중 南郊의 上壇에 天과 함께 漢 帝國의 始祖인 高祖를 配祀함으로써 漢 皇帝의 권위를 極大化하였는데, 이것은 秦의 極廟에서부터 文帝의 渭陽 五帝廟, 武帝의 長安 泰一祠와 甘泉 泰畤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 祭壇의 外形인 3壇 8角 구조, 여러 神들을 한 곳에 모아 한꺼번에 祭祀지내는 것조차 長安 泰一祠와 甘泉 泰畤를 계승한 것이었다. 郊祀는 儒家 官吏들의 專有物이 아니었다.
秦·漢 帝國의 國家祭祀는 中央의 郊祀와 地方의 五嶽·四瀆 및 主要 祭祀 施設뿐만 아니라 末端인 里에 이르기까지 神과 祭祀를 규제하는 體制를 갖추어나갔다. 春秋 시기 秦에서부터 民들의 자연발생적인 社를 行政 單位를 중심으로 조직, 神과 祭祀를 집중시켜 그 시기와 祭物을 규제하였다. 나아가 秦·漢 帝國에서는 中央의 社禝에서부터 各級 行政 單位마다 社 祭祀를 두어 全國에 대한 一元的인 지배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 운영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제공하기 위한 體制를 갖추어갔다. 처음 그 祭祀는 商·周 이래로 史·卜·祝 등 祭祀에 특화된 世襲的 技能人들이 담당하였으나, 점차 地方 長官과 그 屬吏들이 담당하게 되면서 國家祭祀는 점차 制度化되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主要 祭祀 施設 이상에서 巫·祝과 方士가 축출되고 一般 官吏들이 祭祀에 참여하는 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 변화를 가속화한 것이 바로 史·卜·祝의 선발 과정보다 우위에 선 文學 선발 과정이었다.
郊祀의 등장과 함께 後漢 初에 이르면 孔子가 國家祭祀의 對象으로 포섭되었다. 孔子 祭祀는 前漢 末부터 祭祀 改革을 주도한 儒家 官吏들에 의하여 제안되었고, 王莽이 孔子를 簒奪에 이용하면서 國家祭祀 안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孔子 祭祀는 明帝 시기에 中央의 辟雍과 地方의 學校마다 설치되어 天下에 고루 분포하게 되었고, 明帝, 章帝, 安帝의 東方 巡狩로 漢 皇帝에게 완전하게 장악되었다. 나아가 魯國의 孔子 祭祀 施設이 孔子廟로 격상되면서 孔子는 儒家 經典의 편찬을 통하여 漢 帝國을 豫備한 豫言者로서의 地位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儒家 經典에 입각한 漢 帝國의 國家祭祀는 완전히 儒敎化되었고, 그 이후를 名實相符한 儒敎國家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漢 帝國의 儒敎國家적인 모습은 어디까지나 前漢 末까지 이어진 國家祭祀 건설의 결과물로, 巫·祝과 方士, 地方 長官과 屬吏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儒敎的으로 粉飾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基底에는 天下를 對象으로 완전한 지배를 추구한 國家權力의 노력이 담겨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41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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