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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古代 職官制度의 구조와 그 변화 : 中国古代职官制度之结构与变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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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동오

Advisor
김병준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9-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19. 2. 김병준.
Abstract
中國의 職官制度는 일찍부터 발전해왔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역사적 특징을 지닌다. 甲骨文에서부터 등장했던 다양한 職官들이 점차 분류되고 체계화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西周時代부터이다. 周王朝의 國政 機構는 卿事寮와 大史寮로 兩分되었다. 卿事寮는 𤔲土・𤔲馬・𤔲工을 지칭하는 參有𤔲와 각 지역에 산재한 師 등으로 구성되었다. 軍事를 비롯한 政局 運營의 中樞 技能을 담당한 것은 바로 이들 卿事寮 구성원들이었다. 이들은 周王室의 구성원 혹은 각 氏族 集團의 首長으로서 각 지역 및 氏族에 대한 統治라는 行政的 技能도 동시에 수행하던 자들이었다. 이 단계에서 職官은 단순히 國家 業務를 수행하는 手段일 뿐만 아니라 西周 王朝가 在地 勢力을 포섭하는 매개체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한편 大史寮 속관 중에서 金文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作冊과 內史였다. 이들은 祭祀・冊命 등 儀禮를 담당하였다. 大史寮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것은 토지 등 經濟 혹은 財政 관련 기록에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史官들이 본래 祭祀儀禮에 필요한 犧牲 物品의 收給과 管理 그리고 記錄을 관장하던 것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능 보유로 인해 史官들은 후일 文書 行政의 발전에 따라 職制 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터였다. 祭祀官들의 經濟的 技能과 유사한 職掌을 담당했던 것은 王家 事務를 관장하는 宰와 善夫였다. 宰와 善夫가 大史寮의 속관인지 여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이들이 大史寮와 긴밀한 業務상의 連關 關係를 맺고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다만 史가 土地의 分配, 商賈・倉庫의 管理 등에 집중한 반면 宰와 善夫는 王宮 소속 奴隸나 百工 그리고 王命의 傳達에 집중하고 있었던 점은 나름의 分業 關係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西周時代는 卿事寮와 大史寮라는 즉, 職官이 분화되고 나름의 구조적인 체계를 갖게 된 첫 번째 시대였다. 𤔲徒・𤔲馬・𤔲工・司寇・師・宰 등 職官들은 職務 내용과 對象이 곧 官名化된 것이었다. 軍事・民政 기관으로서의 卿事寮와 祭祀儀禮官으로서의 大史寮의 분립은 國之大事, 在祀與戎이라는 당시인들의 國家 技能에 대한 理解에 부합하는 職制 構造를 보여준다. 그러나 西周 職制는 職官 사이의 上下 關係가 일정 정도 존재하였으나 여전히 未備하였다. 金文에 職官 任命 때마다 담당 직무를 일일이 서술한 것은 당시까지도 職官의 직무와 기능이 불명확하며 臨時的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西周시대의 職制는 卿事寮와 大史寮라는 水平的 構造는 형성되었으나 兩僚 내부의 垂直的 構造가 체계화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春秋時代에 접어들면서 西周 秩序의 崩壞는 본격화되었다. 統治 權力은 周王에서 각 諸侯國의 霸者로 이동하였다. 周代 典章 制度의 동요와 政治社會的 변화는 職制에도 중대한 변화를 야기하였다. 魯・鄭・宋 등의 諸侯國들은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西周 職官을 계승하였다. 司徒・司馬・司空과 師 등은 이들 諸侯國에서 여전히 最高位官을 대표하였다. 이에 반하여 齊・晋・楚 등의 諸侯國들은 각국의 사정에 대응한 新職官을 설치하였다. 이중 齊의 相, 晋의 將・尉 등은 후대 職制의 주요 직관으로 부상하였다. 春秋時代의 職制는 각국 간에 분명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종합적으로 考察해보면 이들 職官의 淵源이나 技能은 西周代 卿事寮 계열의 職官들이 확대 발전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반면 西周이래 점차 쇠락해온 大史寮 계열의 職官들은 개인적 능력에 의존한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정치 일선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春秋時代 各國의 高位職官은 世族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左傳󰡕 등 文獻 資料에서는 執政 勢力의 교체와 職官 분배를 대서특필하였다. 기존의 身分, 爵制的 秩序에서 점차 職官의 보유 여부가 중요해졌다. 이는 職官에 부수되는 祿邑의 賜與와 國人에 대한 支配權과 연관되어 있었다. 公室과 世族 혹은 世族 간의 紛爭이 격화되면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職官이 중시되었다. 春秋中期 이후 世族 간의 紛爭과 妥協의 결과, 執政官은 多數化되었다. 일부 諸侯들도 世族들의 職官 독점에 대응하기 위해 新職官을 도입함으로써 職制 體係는 더욱 복잡해졌다.

春秋時代에는 社會的 變化도 격렬하였으며, 이에 대응한 職官들도 등장하였다. 특히 國人 중심의 統治 構造에서 점차 鄙邑의 野人이 보유한 軍事的・經濟的 가치가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國人과 野人의 구분도 점차 희미해졌다. 鄙邑 野人의 지위 상승에 따라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尉와 司寇가 설치되었는데, 이들은 全國的인 齊民 支配의 선구로서 평가할 수 있다.

春秋時代가 지역차에 따라 諸侯國 간의 職制가 차이가 發生하고 이것이 심화되는 경향을 보였던 반면 戰國時代에는 各國 職制 간의 상호 교류와 도입이 활성화되던 시기였다. 이는 富國强兵을 위한 變法 改革이 추진되고, 變法 성공을 위해 敵國의 制度와 政策 그리고 人才를 유입했던 점, 縱橫家의 활약 등에서 보이는 대로 각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진 결과였다. 개별적인 사례로서 春秋時代까지도 고유의 土着的인 職制를 유지해왔던 秦과 楚가 戰國時代에 들어와 中原 地域 諸侯國의 職官을 대거 흡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統一帝國 탄생이후 天下의 一元的인 支配가 貫徹되는데 제도적 기반이 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春秋時期 新職官의 창설과 職官의 난립상에 더해 戰國時代에 일어난 職制 交流는 職制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또한 君主權力의 專制化와 더불어 職官을 수단으로 君主權力을 잠식하려는 시도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도 강구되었다. 君主는 자신의 權力을 職制에 投映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마련하였다.

중앙관에서는 將相의 分離가 가장 현저한 특징이었다. 相은 君主의 補佐役에서 출발하여 君主權力의 專制化와 더불어 고위관으로 상승하였다. 諸侯國 간의 상호 兼幷이 날로 격화된 戰國時代에 將軍은 전쟁 시 軍 指揮權者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將軍의 이러한 권한은 君主에게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戰國時代는 將軍들이 각국에서 활약하던 시대였음과 동시에 이들에 대한 견제책이 발전하던 시기였다. 전시와 평시를 구분하여 指揮權을 부여하거나, 印綬・符節制度가 확립되고 將軍의 하위 관속이었던 尉官의 지위가 점차 上昇한 것은 당시 將軍의 軍事權을 牽制하려는 각종 조치하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戰國時代에 일어난 文武官의 分離는 단순한 職制의 내재적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분화가 아니라 君主의 意圖가 개입된 것이었다.

西周이래 지위가 쇠락하던 祭祀官 계열의 일부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戰國 職制의 새로운 경향이다. 秦의 內史는 全縣의 生産・財政 문제를 총괄하였다. 이는 西周代 大史寮가 경제문제에 간여하던 것을 계승한 것으로 해석된다. 戰國 秦의 內史는 君主에 直屬된 地域을 統治하는 地域 行政官的 性格에서 領域의 擴大와 더불어 國家 財政 問題에도 간여하였다. 이후 秦郡의 설치가 확대됨에 따라 본래의 軍事的 技能은 축소되고 財政的 技能이 擴大되었다. 西周 祭祀儀禮官에서 출발한 內史가 春秋戰國을 거치면서 보여주는 다양한 변화의 배경에는 君主權力이 자리잡고 있었다. 內史의 변화는 그 內部에 새로운 변화에 照應할 수 있는 職能을 보유한 것에 起因하기도 하지만 君主의 親臣이라는 성격이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새롭게 요구되는 國家事務에 대해 君主는 자신의 親臣을 이용하여 이에 대응하였던 것이다. 相과 마찬가지로 內史 역시 君主가 자신의 권력을 보다 直接的으로 職制에 投映한 결과였던 것이다. 相과 內史가 반영하는 것은 專制 君主制 下에서의 職制의 改編이란 君主와의 距離짓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이후 帝國으로도 계승되었다. 그 결과 古代 帝國의 職制 構造란 君主와의 距離에 따른 差等的 權力 配分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완전하였다. 職官이 본래 가지고 있는 公共性이라는 이념의 粉飾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帝國時代의 職官 구조 형성에 공헌한 것은 君主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官僚로 任職했던 士人層 역시 또 다른 주역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帝國의 職制에 理念을 부여하였다. 이들이 내세운 이념이란 天道로 명명된 自然的 秩序였다. 이 理念은 이미 戰國時代 統一王朝를 바라보던 諸子들 사이에서도 논의되어 오던 바였고, 漢代 士人官僚들은 이를 계승하여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들은 天子는 天道를 體現하는 存在로 존엄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현실로서 존재하는 專制權力을 인정하였다. 또한 帝國의 職制는 萬物을 生育하는 天道를 具現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公共性을 부여하였고, 그 속에서 君主 개인의 私益도 일정 부분 보장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作爲的으로 설정된 漢代 三公九卿이란 君主와 士人官僚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戰國秦漢의 職制 論議는 한편으로는 帝國의 職制에 대한 이념적 근거를 제공해주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士人官僚의 集團的 利益을 보장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들이 묘사한 君主像은 天道를 體現하는 儀禮的인 天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의 理想的인 政治像은 君主와 官僚의 共治로 설정하였으며, 내면적으로는 君主의 官僚에의 統治 權力 委任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현실 정치에서 실체화되어 禪讓論과 결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君主는 이러한 士人官僚들의 주장을 容認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破局으로 끝났다. 󰡔白虎通󰡕에 드러난 君主에 隸屬된 官僚의 모습은 결국 이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職制의 체계화 과정도 漢代를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漢初까지 다수 존재했던 中央 最高位官은 점차 통폐합을 통해 三公九卿으로 정리되었다. 後漢에 이르면 皇帝-三公-九卿으로 이어지는 上下統屬體係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또한 九卿 휘하의 중앙정부의 속관조직도 점차 체계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도 三公九卿이란 理念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한번 정립된 中央의 職官組織은 三公九卿이라는 理念에 속박되기 시작하였다. 職官은 현실에 대응하고자 했으나 理念은 永遠不變한 秩序로서 요지부동이었다. 理念과 現實의 간극은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漢帝國은 끝내 이러한 理念을 포기할 수 없었다. 後漢代 九卿 屬官 組織에서 보이는 分散性과 조직 체계의 동요는 古代 帝國의 職官 構造가 한계에 부딪혔음을 잘 보여준다.
中国之职官制度由来已久,历代各有其历史性特征。甲骨文中可确证的、各种职官分类与体系化的过程,始自西周。周王朝之国政机构两分为卿事寮与大史寮。卿事寮由参有司(指𤔲土、𤔲馬、𤔲工)与散布各地的师等构成。此类卿事寮的成员在军事一类的政治运作中担有中枢之能。他们多是周王室之成员或各氏族首领,是周王朝对各地域与氏族统治的执行者。在此阶段,职官不单纯是行使国家职能之手段,同时还是西周王朝统摄各地方势力的媒介。一方面,大史寮的属官中最常见于金文的是作册和内史。他们负责祭祀、册命等礼仪。经查确,担任此类工作之氏族多包括商代遗民,据此可推测此或是继承了商代史官之传统。关于大史寮,值得注意的是它同样出现在土地等经济或财政类的记录中。此应是源自史官在祭祀礼仪中收集、管理并记录所需物品之职责。日后,随着文书行政体系的发展,史官之所以在职官体制内的角色尤为重要,其基础正式此类职能。如同祭祀官的经济职能,掌管王家事务的宰与善夫亦有类似职掌。目前虽尚不能断定宰与善夫是否是大史寮之属官,但他们可被确证在业务上与大史寮存在紧密的关联性。但史之职能集中于土地之分配、商贾与仓库的管理,宰与善夫则与之不同,其职能集中于管理王宫所属的奴隶或百工,以及传达王命。此应可概括为彼此间已形成了分工之关系。

西周时期,是卿事寮与大史寮一类的职官分化并在结构上形成各自体系的第一个时期。司徒、司马、司工、司寇、师、宰等职官是职务内容与对象官名化之结果。作为军事、民政机关的卿事寮与作为祭祀礼仪官的大史寮,二者分立的职制结构符合了国之大事,在祀与戎这一时人对国家职能的理解。但西周职制中,职官间的上下关系尚不存在。金文中每逢职官之任命,对需担任的职务均一一有详细的叙述,可知当时职官之职务与职能尚不明确,多是临时性的。西周时期之职制在横向上由卿事寮与大史寮构成,两寮内部在纵向上的构造尚未达到体系化之阶段。

进入春秋时期,西周之秩序完全崩坏。统治权力由周王下移至诸侯国中的霸者。西周典章制度的动摇与政治社会的变动引起了职官制度的重大变化。鲁、郑、宋等诸侯国在整体上依然继承了西周的职制,司徒、司马、司空与师等依然代表了诸侯国内的最高职官;与此相反,齐、鲁、楚等诸侯国则设立了与各自国情相应的新职官。其中齐之相,晋之将、尉等后代职制中的主要职官亦随之出现。春秋时期,各国间的职制虽呈现出明确的差异,但经整理对比可知,整体而言,此类职官之渊源或职能多是西周时期卿事寮一系职官的扩大与发展。与此相反,西周以来逐渐衰落的大史寮一系的职官,除少数凭个人能力得以留存之事例外,政治方面之职官大多不再出现。

春秋时期,各国之高位职官多被世族所掌握。《左传》等文献即曾就执政势力之交替与职官之分配大书特书。既有的身份、爵制的次序中,是否保有官职日渐重要。此与随职官一并下赐的禄邑,以及对国人的支配权相关。随着公室与世族,以及世族间纷争的激化,官职作为维持自身势力的手段而被重视。春秋中期以后,作为世族纷争妥协的结果,执政官所占的比例成为多数。部分诸侯与世族为了应对某些职官被独占之情况,导入了新的职官,使官制更为复杂。

春秋时代社会变动激烈,相应之职官亦同时出现。从以国人为中心的统治结构开始转型,鄙邑野人所持有的军事、经济价值逐渐得到重视。国人与野人之区分亦随之日渐模糊。随着鄙邑野人地位的上升,为了进行统制,尉与司寇也被设置,可谓全国性齐民支配的先驱。

春秋时期,随着地域性差异,诸侯国间的职制出现了差异并呈日渐深化之趋势;与此相反,战国时期各国职制间的互相借鉴与导入却十分活跃。为了富国强兵,各地变法改革不断推进;为了变法的成功,引入敌国之制度、政策及人才;纵横家在各国的活跃。此类现象均是各国间的交流逐渐活跃的结果。作为特殊案例,秦与楚到春秋时期仍维持着原有的当地体制,进入战国时期后,亦被确证曾大量吸收中原各诸侯国之职官。此或可谓统一帝国诞生后,在天下之范围内贯彻一元性统治的制度基础。

春秋时期新职官的设立与职官之乱状日益加剧,加之战国时期出现的职制之交流,使职制的改编成为必要。同时随着君主权力的专制化,亦在寻求防止以职官为手段蚕食君权的对策。故君主采用多种方式,在职制中反映自身的权力。

在中央官中,将相分离是最为显著的特征。相做为君主之佐臣,随着君主权力之专制化一并上升为高位官职。战国时期,诸侯国间的兼并日趋激烈,将军作为战争时的军事指挥者拥有莫大的权力。但将军如此的权限被认为是对君主的潜在威胁。战国时期,将军们活跃于各国,与此同时,针对他们的牵制政策亦随之发展。将战时与平时相区分,视情况赋予指挥权;确立印绶、符节制度;曾在将军之下的属官尉官的地位逐渐上升。这些均是为了牵制将军军权的种种措施下出现的现象。春秋时期,相并未转化为百官之长,而是发展为了为牵制世族所占有的军事官而存在的装置,正是君主为了保障专制权力的安定而做出的努力。战国时期出现的文武官的分离,并不单纯是随着职制内在的发展而自然出现的分化,而是君主之意志介入的结果。

西周以来地位衰落的祭祀官,其中的一部分再次兴起。这是战国职制的又一新倾向。秦之内史总管全县的生产、财政问题。这可解释为是对西周时期大史寮干涉经济问题的继承。战国时期秦之内史,其性质本是君主直属地域的地方行政官,所辖领域扩大后,开始干涉国家财政问题。此后,随着秦郡的设置不断扩大,原有的军事职能缩小,同时财政职能扩大。以西周之祭祀礼仪官为起点的内史,到了春秋战国表现出了种种变化,君主权力在其背后占有重要位置。内史之变化,部分原因是为了具备应对其内部变化的职能,但更为直接的原因是其作为君主近臣的性质。随着时代的变化,君主利用自身的近臣处理新出现的国家事务。内史与相如出一辙,亦是君主直接将自身权力投映入职制的结果。相与内史反映了君主专制下职制的改编,是以君主为中心,依距离远近对权力进行的差等分配。此情形亦被日后之帝国所继承。但仅以此尚不完全,仍需以职官原有的公共性等理念予以粉饰。

对帝国时代职制的形成有所贡献的不仅是君主。事实上,被任命为官僚的士人阶层是此过程中的另一主角。他们将理念赋予了帝国职制。他们所树立的理念即称之为天道的自然秩序。该理念自战国时代起,已在期盼统一王朝的诸子百家中有所论及;汉代士人官僚则在继承的同时不懈努力,试图将之与现实调和。他们将体现天道的存在这一庄严的地位赋予天子,以此为作为现实存在的专制权力立证;同时,将帝国的职制规定为体现生育万物的天道的体现,赋予之公共性;在此过程中试图对君主之部分个人利益予以保障。汉代,通过此过程被设定的三公九卿,即是君主与士人官僚间妥协的产物。

此类战国、秦汉时期之职制论,一方面为帝国之职制提供了理论依据,一方面也包含有保障当时士人官僚集团利益的意图。他们所描绘的君主形象是体现天道的、礼仪性的天子。他们将理想的政治蓝图设定为君主与官僚的共治,主张在内部君主应将统治权力委任给官僚。此主张在现实政治中实体化,与禅让论有一定结合。但君主对此类士人官僚之主张不可能容忍,此说只能以失败告终。《白虎通》中完全隶属于君主的官僚形象,正是他们种种尝试失败的象征。

一方面,职制经汉代逐渐开始了体系化之过程。汉初尚存的多数中央最高职官渐渐以统、废、合的方式被整理为三公九卿。时至东汉,由皇帝-三公-九卿组成的上下统属体系完成。九卿麾下的中央政府属官组织亦渐渐走向体系化。在此过程中,三公九卿这一理念形成了一定影响。一度被定立的三公九卿为中央职官组织的理念开始成为范式。具体职官虽根据具体现实有所变化,但上述理念却成为永恒之秩序,丝毫未曾动摇。而理念与现实间的冲突亦逐渐开始出现。但汉帝国至终未抛弃此理念。东汉九卿属官组织的分散性与组织体系的动摇,恰恰体现了古代帝国职官结构的局限性。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5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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